글 / 이명수_시인, 계간 『詩로 여는 세상』 대표. 1945년생. 시집 『空閑地』 『旺村日記』 등
어느 날 이태리 로마 한국대사관의 외교관 이동진 시인이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참으로 희한한 풍경이었다. ‘해변의 누드 예술인 캠프’, 벌거벗은 몸으로 시를 읊조리고, 연주를 하고, 설치미술로 사람들을 모으고…… 전위예술이란 용어 자체가 낯설던 우리의 70년대 상황으론 거부감도 없지 않았지만 사진 속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숨어 있었다. 시인,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자기표현 방식, 대중 속에서 함께 나누며 장르의 벽을 허물려는 진지한 모색. 이 같은 점을 한국적 정서로 바꾸어 낼 수는 없을까 하는 발상이 해변시인학교를 낳게 한 바탕이었다고나 할까. 허나 이 같은 생각은 생각으로 그치기가 쉽다. 어떤 계기가 없이는 행동과 실천으로 옮겨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73년 박목월 시인에 의해 창간된 월간시전문지 『心象(심상)』은 78년 박목월 시인이 타계함으로써 구심점을 잃고 일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장남 박동규 교수가 발행의 책임을 맡고, 편집 실무를 도와온 필자가 이어서 편집 실무를 맡아 제 2기 『심상』을 꾸려나가는 체제에서 변화는 불가피해 보였다.
지식인과 시인들이 한없이 움츠려들어 무기력하고 왜소해질 수밖에 없는 70년대 말 유신정권 치하. ‘시인들도 바캉스를 간다’고 외쳐보면 조금은 숨통이 트일까. 가벼운 마음으로 만용을 부리듯 우리는 구룡포 외진 바닷가에 ‘제 1회 해변시인학교’ 깃발을 꽂았다.
박목월 문하생 시인과 『심상』의 필자들에게 참여를 권유하고 신문사에 독자 참여를 권유하는 홍보기사를 부탁해 두었다. 그리고 하루 전날 선발대 몇 사람과 경주행 기차를 탔다. 다시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포항을 거쳐 도착한 경북 영일군 구룡포. 장윤우 시인이 제작한 1회 해변시인학교 목판 판넬과 텐트를 해변에 세우고 구룡포초등학교 허름한 교실 2칸을 빌려 본부를 설치했다. 참으로 궁색한 출발이었다.
과연 몇 사람의 시인과 독자가 이곳 구룡포까지 찾아올까. 삐걱이는 목선에 앉아 밤바다를 지켜보며 소주잔으로 불안함을 달랬다. 1979년 8월 3일, 이기철, 이태수 등 대구의 시인들이 먼저 도착했고, 서울에서 20여명 시인들이 물어물어 구룡포초등학교를 찾아왔다.
『심상』의 애독자. 신문을 보고 찾아 온 일반독자의 숫자는 20여명. 바닷가에 나가 피서객 10여명을 더 모집해 50여명 시인학교 가족을 구성할 수 있었다. 8월 3일부터 8일까지 5박 6일의 일정, 참가 회비도 없고, 준비해 온 음식도 없었다. 『심상』 잡지와 시인들이 기증한 시집. 그리고 원고지만이 준비물의 전부였다. 허나 시인들이 하는 일이 그렇듯이 지나쳐버린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 먹지 않고 시를 쓰고 시를 이야기하고 시집을 읽으며 견딜 수는 없었다. 낮에는 바닷가 음식점을 삼삼오오 전전하며 끼니를 때우고 아침은 독자들이 준비해 온 석유버너에 라면을 끓여 시인들을 대접했다. 행사를 총괄해야 하는 필자로선 빵으로 허기를 채울 때가 여러 번이었다. 그래도 즐겁고 진지한 분위기였다.
해변시인학교 초대교장 김광림 시인, 원로 황금찬, 홍관기 시인 그리고 장윤우, 이유경, 강우식, 김종해, 이건청, 이하석 시인들, 어느 독자가 말했다. “나는 시인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왔다. 굶어도 좋다. 시인들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 이보다 더 할 수 있겠나.” 시인과 독자가 바닷가에서 직접 만나 대화한다는 자체가 당시로는 설레임이었다. 난생 처음 집을 떠나 시인들과 한 지붕 아래 잠을 잔다는 자체에 의미를 두는 독자도 있었다. 초등학교 교실 흑판에 시를 써놓고 시인과 독자들은 열띤 토론을 하며 밤을 꼬박 지새우기도 했다.
만남은 이렇듯 아름다운 소통으로 이어지고, 고독하게 쓴 시인의 시는 독자를 속에서 뜨거운 감동으로 꽃피워졌다. 가까운 시인과 독자들이 캠핑가는 마음으로 며칠 바닷가에서 교분을 나누자는 소박한 뜻은 신문, 방송이 비중있는 뉴스거리로 다루며 화제를 낳았다.
국민학교 마루바닥에 앉아 / 詩를 얘기했다 / 구멍 뚫린 마루바닥에 앉아 / 人生을 얘기했다 / …… / 거기쯤에서 누군가 울었다 / 黃 詩人 앞에 얼굴을 묻고 / 朴龍來 詩人처럼 울었다 / - 어디 유치한 사랑, 해보지 않은 사람 손들어 보시오 / 상처난 사랑 한 조각 꺼내 / 詩를 짓는 1979년 구룡포 / 눈물은 모래알처럼 빛났다//
‘제 2회 만리포 해변시인학교’는 인파의 열기로 가득했다. 홍익대 연수원을 빌려 초대수용인원 2백명을 모집하려 했으나, 7월 초에 신청자가 2백50명을 넘어서 2백50명으로 마감하고 50여명 참가 희망자를 사절할 수밖에 없었다.
1회 해변시인학교가 시인과 독자를 바닷가에서 만나게 하는 ‘만남’에 의미를 두었다면 2회 행사는 ‘시를 통한 가족화운동’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그리고 소그룹 단위를 ‘반(班)’이나 ‘조(組)’라는 명칭 대신 ‘가족’이란 호칭을 썼다. 세상에 ‘가족’이란 말만큼 따스하고 가슴 뭉클한 말이 또 있겠는가. 1가족, 2가족, 3가족…… 어떤 독자는 시부모에 부부 그리고 어린 자녀까지 동반하고 온 가족이 참가하기도 했으니 불편한 잠자리지만 어찌 되돌려 보낼 수가 있었으랴.
해변시인학교의 열기로 보아 80년대 벽두는 ‘시의 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독자들의 참가도 다양했다. 시와는 거리가 먼 일상에서 시를 잊고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호남선 어느 조그만 역에서 일한다는 여사무원, 부산의 작은 공장에서 일한다는 기능공, 서울 을지로 철물점을 경영한다는 중년의 신사, 서독에서 돈도 벌었지만 사랑의 상처를 안고 돌아온 간호사, 모두가 잊을 수 없는 독자들이다.
80년 9월, 제 2회 해변시인학교에 참석했던 열성 독자들이 서울에 돌아와 ‘해변 문학회’란 동인을 결성하고, 여름 바닷가에서의 인연을 이어가며 한 달에 한 번 시낭송회를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81년 ‘제 3회 죽도해변시인학교’ 무렵부터는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해변시인학교란 자부심과 함께 정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3박 4일 참가회비를 8천 원에서 1만 원씩 받으며, 쌀과 부식, 음료, 기념품, 운동기구, 의약품도 장만해 싣고 바닷가 초등학교 건물을 빌려 사용했다. 그러나 30도를 웃도는 불볕더위에 대형 솥단지에 불을 지피고 3백여 명을 먹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갓 등단한 초년생 시인을 본부의 일꾼으로 차출해 운동장에 전선을 늘여 가설무대를 만들게 하고, 리어커를 끌어 부식을 나르게 하는 노력 봉사를 맡겼다. 어디 그뿐인가, 별동대를 조직해 야간 순찰을 돌며 혹시 있을 각종 안전사고에 대비했다. 일몰 후에는 교문 밖을 나가지 못하게 하고, 마지막 날 캠프파이어 때를 제외하고는 일체 술을 마시지 못하게까지 했으니 총 진행을 맡은 필자에게 ‘박 대통령 보다 더한 독재자’라고 애교 섞인 항의를 하는 독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참가한 남녀 독자가 눈이 맞아 뒷날 부부가 된 경우도 있고, 담임시인을 맡은 시인과 학생독자가 결혼한 예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시를 통한 아름다운 만남이 더욱 깊어져 인생의 동반자가 됐으니 시의 신 뮤즈의 축복이 아니겠는가.
시의 저변 확대,
시 운동의 새로운 모델 제시
해변시인학교가 횟수를 거듭할수록 해변시인학교를 성공 모델로 한 문학, 예술캠프가 곳곳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지역 시인들이 주축이 된 소그룹 시인학교는 물론 소설가, 추리작가, 음악가들이 다투어 여름 해변을 축제의 장으로 장식했다. 80년대 중반의 이같은 열기는 경제적 풍요와 함께 점차 개방되어 가는 시대 흐름의 영향도 있지만, 70년대 불모의 문화 환경에 도전적으로 시인학교를 처음 개설한 『심상』의 해변시인학교가 공헌한 바 크다. 이제 시인들은 적어도 시를 읽어줄 독자가 없다고 불평하지 않아도 된다. 좋은 시를 제대로 평가해 주고 시인을 대접해 주는 최소한의 풍토는 마련되어 있으니 어찌 보면 한국은 시인공화국이 아니겠는가.
해변시인학교 프로그램 중에 독특한 것은 자정에 열리는 ‘자정백일장’이다. 일정이 거의 끝나 가는 마지막 날 밤, 자정에 시제를 내고 밤새 시를 써 다음 날 아침에 심사하는 제도다. 여기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의 점수를 얻으면 장원상이 주어지고, 전격 시인으로 등용된다. 20여년 동안 자정 백일장을 통해 등단한 시인은 11명, 가능성을 인정받아 그 후 등단한 시인까지 합하면 해변시인학교를 거쳐 시인이 된 수는 무려 50여명에 이른다. 25년간 연인원 5천여명이 참가한 해변시인학교이고 보면 50여명 시인은 많은 숫자가 아니지만, 시의 붐을 조성해 시의 저변을 넓히는데 일조한 공은 결코 간과할 수가 없다.
▲해변시인학교의 단골 참가자였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정주영 회장. 박목월 선생의 미망인인 고 유익순 여사, 황금찬 시인과 함께
해변시인학교가 절정기에 이른 것은 아무래도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를 꼽아야 할 것 같다. 88년 ‘제 10회 주문진 해변시인학교’가 열리고 있을 때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해변시인학교 단골 독자가 되어 있었고 95년 ‘제 17회 안면도 해변시인학교에서 그에게 명예시인패가 전달되었다. 현대중공업 노사분규가 한창일 때 정 회장은 해변시인학교에 참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고, 평범한 독자로 참석해 1만8천 원 회비를 기꺼이 냈다. 그리고 초등학교 걸상에 앉아 배식기를 들고 독자들과 함께 담소하며 식사를 즐겼다.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고성 고향 땅을 밟기 전날 밤도 정 회장은 해변시인학교에서 강의도 듣고 강연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이같은 인연으로 정 회장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을 때에도 해변시인학교에 들렸고, 현대건설 신입사원과 해변시인학교 가족들이 한때 어울려 장기자랑도 하는 친교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10여년 동안 해변시인학교 밥을 공으로 먹은 밥값을 하겠다고 95년 안면도에 해변시인학교의 건물을 지어 기증해 주었다.
돌이켜 보면 해변시인학교에 참석한 저명인사는 정 회장뿐이 아니었다. 이만익, 최경환, 오수환 화백은 연이어 5년을 찾았고, 중광스님도 구상 시인을 따라 바람처럼 왔다갔고, 국회의원 신분을 감추고 독자로 참가한 김영선 의원도 있었다. 탤런트 최불암, 강부자, 방송작가 김수현, 그리고 성악가, 가수들은 손꼽기조차 힘들 정도다.
해변시인학교는 단순히 시인과 시 독자들만의 학교가 아니었다. 인접 예술장르의 예술가들이 시의 축제에 참석해 시의 영역을 넓히는데 한몫했고, 기업인, 연예인도 시의 감성을 우리사회에 전하는 역할을 했다. 시인이 쓰는 시가 시인들만의 것이 아니듯 해변시인학교도 시에 국한된 성격을 이미 벗어나 있다. 메마른 사회에 감성을 불어넣고, 인간의 참된 가치를 회복하게 하며 함께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인간학교’가 돼 있다. 여기에 가장 인간적인 황금찬 교장선생이 20년이 넘게 자리를 버티고 있으니 이 또한 튼튼한 버팀목이 아니겠는가. 필자도 덩달아 그 그늘 아래 25년 세월 자리를 지켜왔으니 이런 가슴 뿌듯한 감회가 있으랴.
허나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동해, 서해를 유랑극단 무리처럼 떠돌았는데, 해변시인학교가 안면도에 안착하며 시인들의 역마살을 채워줄 신비로움이 퇴색되어 가는 듯하다. 여기에 고 정주영 회장이 지어준 해변시인학교 건물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 아름다운 날의 순간들을 돌이켜 볼 고향이 사라져버린 것 같아 쓸쓸하기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