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도흠_한양대 국문과 교수,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 1958년생. 저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동양철학 에세이-왜 착한 사람이 더 고통받을까』 등
한용운_시인, 불교학자. 1879년에 태어나서 1944년 사망. 시집 『님의 침묵』, 소설 『흑풍』 등
현인의 지혜가 그리운 시대,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물고 계시는 백담사를 찾았다. 설악은 한창 정진(精進) 중이었다. 나무들은 겨우내 감추어두었던 불심(佛心)을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길어 올려 생명의 잔치를 펼치고 있다. 초록 하나로 만가지 색이 어우러진 수록화(水綠畵)를 그리는 바람에 지나는 나그네도 그를 마음에 담으며 자신도 모르게 불심을 드러낸다. 일주문을 들어서 만해문학상 수상작 시들을 읽으며 만해문학관을 지나 의상·만해연구원에서 선생을 만났다. 오현 큰스님과 차를 나누는 중이었다. 인사를 드리니 석가모니께서 그러신 것처럼 미천한 녀석에게도 자리를 나누어주고 차를 주신다. 그윽한 다향이 코를 지나 머리를 비운다. 선생께서 시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 기복불교와 일본불교에 맞서서 불교를 개혁하고자 한 스님, 한국 서정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대시인인 만큼 세상 돌아가는 것과 불교, 그리고 문학과 예술에 대해 한 줄기 빛을 받고자 했다.
이도흠 오다 보니 숲도 맑고 나뭇가지 새로 보이는 하늘이 그지없이 청정(淸淨)하더이다. 일주문 밖 세상은 아마 하늘이 흐려 사람들도 혼탁한 모양입니다.
만해 세상과 사람이 둘이 아닌데 어찌 서로를 닮지 않겠습니까? 하늘이 흐리니 그를 보는 사람의 마음이 흐려지고 사람의 마음이 혼탁하니 각종 공해를 만들어 하늘을 더럽히지요. 그리 서로를 더러움으로 물들게 한 것이 현대 사회이고 20세기가 아닌가 합니다.
이도흠 20세기는 전쟁과 학살, 환경파괴로 점철되었기에 지난 세기를 반성하면서 21세기는 공존공영의 시대로 맞으리라 다짐했는데 아직도 전쟁과 학살, 환경 파괴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에게 미래는 있나요?
만해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을 고집하면 당연히 파멸뿐이지요.
이도흠 전혀 방법이 없나요? 혹 선생께서 관심을 기울이셨던 화엄철학에 대안이 있지는 않나요?
만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요. 전혀 모르던 이 선생과 내가 차 한 잔을 나누는 사이에 서로 친하여졌습니다. 길거리에서 두 사람이 원수처럼 싸우는데 한 아주머니가 나타나 큰소리를 외치는 것입니다. 어릴 때 헤어졌지만 너희들은 형제 사이라고. 당연히 싸움을 멈추겠죠. 대립하고 갈등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됨을 안 뒤에는 사랑하게 됩니다. 상대방 속의 부처를 보는 것이지요. 화엄에서 말하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뜻이 여럿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미국 사람들도 ‘바이오스피어 2 (Biosphere Ⅱ)’ 프로젝트를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지구 전체의 대기의 균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깨닫지 않았습니까? 예전엔 북경에서 나비가 팔랑이면 뉴욕에 폭풍이 분다는 것이 황당함을 비유하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서요?
이도흠 네. 혼돈이론에 의하면, 북경의 나비의 팔랑임으로도 임계상태에 있는 북경의 대기에 혼란이 일어나고 이것이 북동아시아 기단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차례로 북태평양 기단에, 북아메리카 기단에 영향을 미쳐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해 그 봐요. 지구상에 사는 온갖 것들이 서로 깊은 영향 관계에 있는데 소홀히 할 것은 무엇이고 함부로 죽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수학자들에 의하면 인류는 네 다리만 건너면 모두 친구랍니다. 한 사람이 대략 3천 명의 사람을 소개받고 3백여 명과 가깝게 지낸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다리를 건너면 나는 3백 명을 알고 있으며, 여기서 한 다리를 건너면 내가 아는 3백 명에 각자 3백명씩을 곱하게 되니, 9만 명의 사람을 알게 되고, 또 한 다리를 건너면 2천7백만 명의 사람을 알게 되고, 네 다리를 건너면 81억 명을 알게 됩니다.
이도흠 인류가 지금 60억이니 네 다리만 건너면 우리 모두는 서로 알게 되네요?
만해 물론 여기에 지역과 문화의 제약을 상정하지 않은 것이지만, 산술적으로 볼 때 인류는 네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친구인 셈입니다. 열 다리도 아니고 네 다리만 건너면 모두 친구인데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서로 피가 다르고 생활양식이 다르다고 으르렁거리고 총을 겨누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인연의 사슬이 깊어, 우주 나이 137억 년 가운데 그 수조 분의 1도 안 되는 같은 시간대에, 수조 개의 별 가운데 한 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별에서 같은 시대에 미국인과 이슬람인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그 자체가 수천조 분의 1의 확률을 갖는 ‘기적’입니다. 기적처럼 만나 함께 사는 우리는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입니까? 세계가 인연의 비늘로 철저히 겹쳐 있는데 홀로 존재한다 할 수도 없거니와 홀로 무엇이라 내세울 수도 없으며, 홀로 삶을 영위할 수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있어서 나는 있습니다. 이슬람인이 있어서 백인이 있고 백인이 있어서 이슬람인이 있습니다. 백인에게도 이슬람인스러움이 있고 이슬람인에게도 백인스러움이 있습니다. 『성경』이 타인을 사랑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만큼 『코란』도 타인을 사랑하고 평화를 이루라고 가르칩니다.
이도흠 연기론의 입장에서 이라크전을 전망해 보시죠?
만해 이라크전은 미국에게 제 2의 베트남이 될 것입니다. 미국이 승리할수록 테러리스트와 게릴라는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테러를 종식하고 미국 국민이 편안하게 중동의 고대 문명 유적지를 활보하고 미국 국민과 이라크인이 서로 웃으면서 축구를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테러를 막는 근본적인 길은 이라크에 폭탄 대신 구호식량과 약품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라크 인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 평화의 싹들이 살아나서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들까지 소멸시켜 버릴 것입니다. 이렇듯 화엄의 연기론을 알면 대립과 갈등은 금세 상생으로 바뀌죠.
이도흠 그렇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알고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러나 남한 사람이 용천역 폭발사고 소식을 접하자 형제가 죽고 다친 것처럼 아파하고 자발적인 성금과 구호를 하자 북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전쟁이 나기란 거의 불가능하죠.
만해 화엄을 한 마디로 말하면 어울림입니다. 어울림이란 상대방에게서 부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남한 시민이 도깨비로 알았던 북한 사람에게서 남한과 똑같은 사람의 향기를 맡고 북한 인민이 미국의 괴뢰로 알았던 남한 사람에게서 북한과 같은 동포애를 느끼면서 남북은 하나로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서구와 제3세계, 좌파와 우파,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다면 인류는 20세기와 전혀 다른 세상을 맞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도흠 그런 면에서 불교의 역할이 크다고 보는데 요즘 불교에 대해 다시 『불교유신론』을 쓰신다면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습니까? 저는 ‘朝鮮佛敎維新論’이 치밀하고 명쾌한 논리로 당시 불교계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한 명저이자 지금도 현재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만해 제가 『불교유신론』을 쓴 것이 1913년입니다. 90여 년이 지났지만, 거기서 주장하던 것이 고쳐진 것도 있고 고쳐지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아직도 한국 불교가 미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미신과 기복(祈福)에 대해 그리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아직도 한국 불교가 이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한국 불교가 신라시대에 샤머니즘을 포용하여 산신각이나 용왕당을 절 안에 배치한 역사성까지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에도 재앙을 없애고 복을 불러온다는 제재초복(除災招福)의 원리에 근거해 현세의 복을 빌어주고 그 대가로 보상을 받는 것은 없어져야 합니다. 절은 스님들이 정진을 하여 깨달음을 얻고 중생들을 깨우쳐 부처를 이루는 곳이지 귀신을 만나 자신만의 복, 그것도 현세의 복을 비는 곳은 절대 아닙니다. 다음으로 앞에서 말한 대로 인류가 구원받으려면 대립과 갈등에서 상생과 연기의 패러다임으로 대전환을 이루어야 하고 이렇게 하려면 상생과 연기의 패러다임을 가진 불교가 더 많이 실천하고 더 많이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스님을 보면 두 종류의 스님이 대부분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 부류의 스님들은 산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선정이나 하면서 혼자의 깨달음에 빠져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합니다. 또 한 부류의 스님들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시장 원리를 도량에까지 끌고 와 절을 넓히고 신도를 늘리고 시주돈을 축적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오현 스님이나 도법 스님처럼 불교를 민중들에게 알리고 선방에서 나와 민중들의 가슴에 있는 부처들을 드러내는 분이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
이도흠 이제 문학과 예술 이야기를 나누죠. 어떤 평론가가 선생님의 시를 평하며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에서 ‘약한 등불’은 식민지 시대의 어두움은 물론이고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어두움도 밝혀주는 등불이며 이 등불은 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칠 줄 모르고 타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꺼뜨릴 수 없는, 정신의 등불이자 생명의 불씨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문학을 보면 이런 등불이 없는 것 같은데……
만해 지금 한국 대중들은 욕망과 과소비를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 같아요. 그를 정화시켜 주는 것이 문학이고 예술인데 반대로 문학과 예술이 이를 부추기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일제 시대에 저를 비롯하여 육사나 윤동주 등의 많은 시들이 어두운 식민시대에 조국 독립을 향한 등불을 얼마나 환하게 비추었습니까? 그 등불이 없었어도 독립이 올 수 있었을까요? 포스트모더니즘이고 형식의 실험도 좋지만 문학과 예술은 시대와 역사에 침묵하면 안됩니다.
이도흠 그런 면에서 시대와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참여한 80년대의 민중문학론은 어떻습니까?
만해 그건 시대와 역사를 비춰주는 등불이 아니라 시대와 역사의 무게에 눌려버렸죠. 우리는 단 한마디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리얼리즘의 승리를 이룬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보다 더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통렬하게 부정하게 됩니다. 이처럼 문학과 예술은 상상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고, 기존의 코드와 형식을 해체하면서 기존의 코드와 형식에 안주하던 이데올로기와 권력을 해체합니다. 제 시가 조국 독립의 이념이나 불교철학을 담는 데만 주력했다면 지금까지 읽히겠습니까? 이제 시대와 역사에 대한 통찰이 빛나면서도 그 시대의 무게에 눌리지 말고 등불을 비추어주는 동시에 기존의 코드와 형식을 해체하고 새로운 창조를 이루는 문학과 예술이 창조되기를 바랍니다.
이도흠 디지털 시대란 전혀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문학과 예술은 어떤 대응을 해야겠습니까?
만해 디지털 시대의 가장 큰 특성은 가짜가 진짜를, 가상이 현실을 대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사이버세계에서 남북통일을 수만 번 이룬다 하더라도 실제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상을 넘어 실상(實相)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도흠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여쭙겠습니다. 고은 선생의 최근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만해 허, 허, 헛! 나에 대해 어떤 폄하나 비방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수많은 나의 모습 가운데 하나인데 그것 또한 받아들여야겠지요.
이도흠 역시 대인다우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씀을 반대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만해 선생에 대한 수많은 정당한 평가 가운데 단지 하나의 혹평일 뿐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