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20일(토),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해 ‘만해마을’(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완연한 봄 날씨 덕분에 고속도로와 국도는 미리 봄꽃축제를 보기 위해 나온 행락객들로 붐볐다. 우리도 그 틈에 끼어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행사장에 도착했다. 보통 ○○문학기행이라고 하면 문인들의 제철 나들이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번 ‘시사랑 전국 도서벽지 순회 시낭송회’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사단법인 시사랑문화인협의회(회장 최동호)가 문예진흥원의 후원으로 이 행사를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다. 욕지도(경남 통영시)와 예올문화원(제주 북제주군)에서 있었던 지난해 행사는 문인들과 일반인, 그리고 행사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얻었었다. 이번에 찾은 ‘만해마을’은 시사랑회가 올해 계획한 여섯 번의 행사 중 그 첫 번째 장소다. ‘만해마을’은 재단법인 만해사상실천선양회(이사장 오현 스님)가 만해 스님의 사상과 정신을 이 시대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마련한 곳이다. 두 단체의 의도가 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자 ‘만해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2003년 8월에 완성된 이곳은 심우장, 만해학교, 문인의집, 만해사, 만해문학 박물관 등 현대식 건물이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일행은 ‘문인의집’에 우선 여장을 풀었다. 문인들의 고졸한 서예작품이 걸려 있는 복도를 따라 행사가 있을 강당으로 자리를 옮기자 오전에 미리 백일장을 마친 인근 지역 중․고생들이 시낭송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에 비해 달라진 것은 학생들의 참여 기회를 더 늘리려는 목적으로 신설된 백일장이다. 시인과 학생들의 시낭송도 중요하지만 여러 학생들의 참여를 더 높게 생각해서였다.
오전부터 백일장을 치르느라 지쳐 보이는 학생들의 표정은 처음 시인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내 옆에 앉은 여학생은 어디선가 본 유안진 시인의 얼굴을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한다. 옆에 앉은 친구에게 귓속말로 저 사람이 누구인지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그 얼굴이 어찌나 명랑했던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옆 테이블에 앉은 조숙해 보이는 남학생은 고개를 숙이고 아까부터 뭔가를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알고 봤더니 낭송할 시를 외우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저 순수함과 긴장감이 오래오래 가길 몰래 빌었다.
곧바로 소설가 박덕규 교수의 사회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시낭송회가 있기 전에 먼저 유안진 시인의 문학 특강이 있었다. 오랜 경험 탓인지 선생님은 딱딱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풀어주셨다. 꽤 오래 전 어느 지방에서 열린 백일장 심사 경험담을 통해 이제 막 문학을 처음 접하는 학생들이 문학에 대해 뭔가 오해라도 할까봐 시란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사실, 문학강연이란 늘 정답에 가까워서 아이들에게 자칫 실망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강의 도중에 몇몇은 졸기도 하고, 지루해졌는지 한 여학생은 핸드폰을 연신 열었다 닫았다 한다. 그러다 유안진 선생님이 심사 중에 읽었던 가장 감명 깊었던 시구를 말씀해 주시자 강당 안은 순식간에 웃음으로 가득 찼다.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던 여학생도 옆에 있는 친구를 쳐다보며 마음껏 웃는다. 지루함과 긴장을 웃음으로 바꾼 것은 백일장에 어울리지 않는 속된 말 때문에 수상작으로 뽑히지 못했던 어느 학생의 시였다. 가난한 집, 어머니는 매일 시장에 채소며 나물을 갖다 팔아 생계를 꾸려 가시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은 매일 술만 먹고 큰 소리만 쳤단다. 학생이 그 아버지를 “지도 사내라고 지랄한다”고 표현했더라는 내용이다. 얼마나 감동적이고 멋진 표현인가. 그 구절에는 아버지에 대한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시란 생활의 일부이며, 일상의 언어가 어떻게 시의 언어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학생들도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이는 눈치다.
이어서 시인들의 시낭송회가 시작되었다. 편치 않은 몸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어김없이 행사에 참여하신 최하림 시인은 학생들의 마음을 “이슬방울 속의 말간 세계”에 비유하셨다. 이번 행사는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며 앞으로 계속될 행사가 기대된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뒤를 이어 김수복, 맹문재, 박덕규, 홍해리, 유안진, 전길자, 임병호, 박찬 등 시인들의 시낭송과 학생들의 암송이 멋지게 변주되며 진행되었다. 낭송에 참여한 학생들은 굳이 그 시를 선택한 이유를 말해 선생님들의 주의를 끌기도 했다.
이어 백일장 시상식이 이어졌다. 심사를 맡은 유안진, 박찬 선생을 비롯한 다른 심사위원 모두는 학생들의 작품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읽고 평을 해주었다. 손님으로 초대된 시인들은 시인의 이름을 벗어버리고 학생들의 잔치에 기꺼이 도우미 역할을 자청했다. 아마 학생들에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될 것이다. 시상식이 진행되자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능청을 떠는 학생, 놀라 어쩔 줄 모르는 학생, 뒤늦게 자기 이름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학생, 다들 일생 동안 잊지 못할 추억을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리라. 그 중에서도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중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록 가작에 불과했지만 자신의 시가 상을 타게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친구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았던 여학생이다. 시를 썼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상까지 타다니, 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중학생으로 돌아간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너무 큰 복을 받아 그 뒤가 무서워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은 아마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공식행사가 끝나자 학생들은 모두 돌아갔다. 행사에 참여한 문인들과 진행요원, 그리고 도와주신 현지 선생님을 비롯한 이곳 주민들은 ‘만해마을’에서의 행사를 정리하며 자축연을 가졌다. 지난해 두 번의 일정에 비하면 대폭 그 횟수가 증가된 때문에 부담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한층 의미 있는 행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애초 시사랑회가 이와 같은 행사를 준비하게 된 까닭은 상대적으로 문화 행사를 접할 기회가 적은 도서벽지 학생들과 주민들에게 문화의 접촉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의 소중한 문학적 감성을 북돋워주기 위해서였다. 생색내기에 그치는 행사들과는 의도와 목적이 달랐다. 당연히 행사에 참여하는 문인들도 편안한 ‘놀이’가 되지 않을 줄 알면서도 기꺼이 1박2일의 시간을 흔쾌히 내주셨다. 참여한 문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 있을 행사에 꼭 참여하고 싶다는 문인들의 말씀이 행사 진행요원들에겐 큰 힘이 되었다. 무엇보다 돌아가는 학생들의 어깨가 처음보다 한 뼘은 더 높아 보였다. 학생들의 마음속에 인간과 삶에 대한 애정이 싹트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소중한 자리였다. 시인과 학생들은 그렇게 서로에게서 시심을 배우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