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물덩어리 내 시집 속에서 부화한 것일까, 저기 책상모서리 똥파리 한 마리! 나는 다가간다. 내가 쓴 시집을 내가 읽다말고 조심조심 다가간다. 나는 내 똥 덩어리에서 태어난 파리를 내 손바닥으로 때려잡는다. 손바닥같이 납작한 시집으로 때려잡는다. 파리의 몸속에는 피가 없는가, 육신을 쥐어짜서 만든 시집 표지 위에, 내 이름 위에, 더럽게 찌익 뭉개진 파리의 주검! 드디어 이것이 드디어 이 망할 놈의 시집이 제 기능을 다 하는구나. 피도 없이 뭉개진 주검 하나를 나는 멍하니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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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이 아닌 식육 코너에서 무표정하게 핏기 없이 나만의 시집을 묶어 팔고 싶다’던 나의 꿈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꿈꾼다. 어느 백화점에선가, 어느 마트에선가, 누군가가 그런 제의를 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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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다! 첫 시집을 묶고 나서, 힘이란 힘이 모두 다 빠져나간 듯 허탈해진 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말이다. 어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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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망측한, 이 발칙한, 이 불효막심한, 이 귀싸대기 맞을, 후레자식의 말의 탄생을 위하여 나의 첫 시집은 묶여진 것일까? 어머니가 죽었으면, 어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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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을 들고 찾아간 심심산골 고향집. 오월 마루 끝에 앉아 듣는다 한 방울 눈물도 한 소절 곡(哭)도 없이 내다묻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와 그리고 ‘아직도 아홉 살짜리 형‘의 무덤이 있는 안산 사곡(沙谷)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어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다…… 목 놓아 목을 놓아 우는 뻐꾸기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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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차마 보여드리지 못한, 당신의 생전에는 차마 끝끝내 보여드릴 수 없는 시집! 그래서 뻐꾸기 소리로 들려오는 울음, 어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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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걱거리는 어머니의 장롱 밑을 시집으로 고인다. 어머니 밭에 나가고 안 계시는데 시집으로 장롱 밑을 고이느라 낑낑거린다. 아무도 들춰볼 수 없는 시집, 주둥이가 짓눌려져 있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시집, 아무 말도 안 해도 되는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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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산실(産室)이며 아버지의 주검이 수습된 영안실인 고향집 안방에 싸늘한 눈을 감고 누워본다. 시신처럼 미동없이 주검처럼 베개 없이 누워본다. 어머니만 없으면, 어머니만 없으면, 나 아무 때나 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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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을 깡그리 잊어 먹는 일, 관짝 같은 첫 시집을 안산 사곡에 내다 끌어묻는 일, 이제 그 일만이 남았다. 아버지의 주검처럼 눈물도 없이 곡도 없이 혼자서 치러내야 할 나의, 나의 시의 장례(葬禮)여!
※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은 대산창작기금을 받아 2004년 실천문학사에서 발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