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우선 『춘향전』 번역을 결심하게 된 동기부터 말해야 되겠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과 스페인 바르셀로나자치대학교와 교류 협정이 체결된 후, 여러 차례 바르셀로나자치대학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이유는 나의 학문적 사명이자 꿈이기도 했던 한국학을 스페인 현지에 소개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나의 꿈은 현지 교민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자치대학교에 한국어 강좌가 설강된 것이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현지에서 한국학 학술대회를 개최하고자 했고 1년여의 준비를 거쳐 2001년 바르셀로나자치대학교 문과대학 강당에서 한국에서 온 한국학 전공 교수 10명과 다수의 바르셀로나자치대학교 교수들, 그리고 한국어 강좌를 수강하는 스페인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한국학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학술대회가 끝난 후, 현지 한국학 담당 교수가 한국의 유명한 고전으로 알려져 있는 『춘향전』 번역을 간곡히 부탁했다. 한국의 뛰어난 고전문학 작품을 수강 학생들에게 선보이고 싶은데 스페인 번역본이 많지 않아 어려움을 느낀다고 하면서 수차례 『춘향전』 번역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스페인 교수의 음성은 계속 내 귓전을 때렸고 결국 번역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훌륭한 고전을 4억의 스페인어권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자 했던 나의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는 번역에 들어가자마자 실감나는 현실로 다가왔다. 아득했다. 꼬박 1년 반을 여기에 투자했다. 1년간의 오스틴 소재 텍사스 대학에서의 연구 생활 내내 『춘향전』은 나의 뇌리를 지배했고 돌아와서도 그 망령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춘향전』은 『춘향전』이었다. 번역의 괴로움 저편에는 어느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감칠맛 나는 『춘향전』의 매력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 매력은 번역의 두려움을 상쇄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의 고전 중의 고전 『춘향전』, 계급을 뛰어넘은 이도령과 성춘향의 지고한 사랑, 수많은 고전 인용구들, 시와 사설들, 재기 넘치는 해학과 풍자, 작품 전편에 등장하는 민중의식과 평등사상, 그리고 구성과 등장인물의 사실성 등등, 『춘향전』은 가히 고전문학의 백미였다.

  어떻게 하면 스페인어권 독자들에게 이 작품의 진수를 올바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것이 나와 공역자인 에스더 교수의 고민이었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이 번역을 시작한 죄(?)로 『춘향전』의 망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앞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토론하고 토론했다. 내가 알고 있는 번역은 단순히 문자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문화를 다른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스페인을 비롯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중남미권의 문화는 진정 우리 문화와 다르다. 이 문화의 이질성을 번역을 통해 극복해 나가는 것이 큰 과제였다. 예를 들어 우선 춘향의 신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기생”을 이해시키는 것도 문제였다. 분명 “창녀”도 아니고 그렇다고 뚜렷이 “예술인”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서구에 없는 이 특이한 신분을 설명하는 것,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각주로 이를 처리하면서도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찜찜함이 남아 있다. 인명, 지명, 관직명, 동/식물 이름 번역은 에스더 교수의 도움을 얻어 하나하나 최대한 스페인의 것에 접근시켜 나갔다. 진정 “접근”시켜 나갔다는 말이 옳다. 한국의 지형과 스페인의 지형이 다르고 생태계가 다르니 어찌 모든 식물들이 같을 수 있겠는가. 또 나를 괴롭힌 것은 판소리의 운문적 표현이었다. 이들의 리듬을 살리는 것도 어려운 작업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최선을 다해야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쉽지만 이제 『춘향전』은 나의 손을 떠나 독자의 판단에 맡겨졌다. 그러나 마음은 뿌듯하다. 비록 어려운 번역이었지만 4억의 스페인어권 독자들이 『춘향전』에 담겨 있는 우리 고전문학의 맛과 멋에 조금이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역자의 사명은 일부 감당될 것이다. 외국문학 전공자로서 늘 우리 문학에 빚져 온 마음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다.

※ 『Historia de la Castidad de Chun'hyang 춘향전』은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스페인어로 번역을 마치고 현재 출간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