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사람의 됨됨이를 형성하는 데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있다. 굳이 단순화한다면 공부와 경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공부는 독서라고 해도 좋다.

  공부만 하고 경험이 부족하거나, 경험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공허한 사변(思辨) 또는 관념론으로 흐르기 쉽고, 그 반대는 아집(我執)과 편벽 그리고 만용(蠻勇)에 빠지기 쉽다. 이런 관계에 대해 균형을 강조한 것이 『논어』의 테마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양자 모두 변변치 못해 균형을 잡느니 마느니 할 주제가 못된다.

  그러나 하나의 구원이 있으니 상상력의 도움일 것이다. 예술, 특히 소설 쓰기가 그렇지만 엄밀한 논리의 구성을 요구하는 과학 이론에 있어서도 상상력과 비전이 선행(先行)된다는 것을 여러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어린 소년이 인생의 무상함을 겪은 노인 같은 시구를 읊는가 하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이가 청춘의 사랑을 할 수도 있다. 바로 랭보와 괴테의 경우이다.

  나도 그 무렵은 다른 또래 친구들처럼 지적 허영에 잡혀 있어서 난해한 철학 책을 끼고 다녔지만, 통속적인 해설 따위를 이해할 정도여서 대개 누구의 뭣뭣도 봤다는 제스처에 머물렀다.

  그러나 젊었을 적의 이런 것이 진실 되지 않은 몸짓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그런 책들을 제대로 읽어야지 하는 보상심리의 부담이 두고두고 나를 따라다닌 것은 반드시 속절없는 노릇은 아님을 차차 알게 된다.

  나이와 체험은 독서의 깊이와 묘미를 더해주며 같은 글이라도 이해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겪어보는 일이다.

  하여간에 남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총체적인 체험을 싼값으로 분배를 받거나, 훔칠 수 있다는 것은, 독서인(讀書人)의 행복이다. 그런 혜택은 인쇄술의 발명 덕분이라고 하는데, 정보와 지식의 획득을 전자매체에 의존하게 된 요즘 과연 독서인이란 이미지가 성립되는지 의심스럽다.

  대개 그랬듯이 나도 청소년기엔 문학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개조사(改造社)라고 하는 일본의 출판사에서 낸 세계문학전집은 남김없이 읽었고, 그때그때 감흥을 받은 작품도 부지기수지만 지금껏 내 뇌리와 가슴에 인화돼 있는 것을 말하자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특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들어야겠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수십 년 만에 이 책을 군데군데 다시 읽어보니, 지난날의 이해도가 매우 천박했음을 느끼게 되었다.

  중년기엔 좀더 범위를 넓혀 역사, 사회과학, 그리고 고전에 속하는 것들을 자주 찾게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위대한 역사문학이며, 표현 하나하나가 금석(金石)에 새긴 듯한 확고함을 감지하게 한다.

  나는 그 패턴을 모방한 몇몇 단편들을 통시적인 방법으로 쓰기도 했다.

  프로이트, 융크, 프롬, 그리고 다윈, 레비-스트로스 등 정신분석학과 인류학에 관한 유명한 책들은 소설 쓰기에도 빠질 수 없는 식재(食材)같은 것이라고 여긴다.

  지적 탐구의 첫걸음은 그 입구가 여럿 있겠으나, 대개 나와 타인,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하는 물음에서 비롯된다.

  서양 사람에겐 ‘신과 나’라는 등식이 거의 고정화된 듯하다. 존재론의 핵심은 유물론자를 빼고, 거의 신과 나와의 관계에서 의미를 구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 일본인 등 유일신교를 믿지 않는 동양인에겐 대단히 난삽한 문제이다.

  근․현대 서양철학의 주제가 자아(自我)의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을 다루고 있고, 또 문학도 이 문제에 대한 고뇌로 점철돼 있다. 하이데거 이후의 실존철학, 신을 배제하려는 사르트르마저도 신을 의식하고 있음을 미완의 작품 「자유의 길」같은 데서도 촌탁할 수가 있다.

  지난날엔 으레 그러려니 했지만, 나이 들면서, 나는 그런 그들의 자아의식의 공고함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한다.

  『논어』나 『맹자』 등 중국의 고전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서양인들의 ‘에고(Ego)’라는 개념은 찾아볼 수가 없다.

  동양인 특히 유교에서는 나의 존재가 신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가족․사회 등 어디까지나 인간관계 속에 자리하고 있다.

  도덕관에 있어서도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주변사람․공동체의 구성원이 보는 눈이 가치척도가 된다.

  군자소인(君子小人)론이나 군신론(君臣論), 부자관계 등등 자기 책임 하에서 수분(守分)하는 주체로 자기를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동양인들이 모두 무신론자거나 초월적 존재를 부인하고 있지는 않다.

  천명(天命)사상이 있고,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는 용법에서처럼 최종의 심판자를 천(天)으로 설정하고 있으나, 그건 기독교적인 신의 개념과 다르고, 보다 포괄적이고 관념적이다.

이런 차이를 자꾸 말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의 일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熱帶)』같은 것을 보면 서양문명(기독교와 기계)의 오만함을 반성하고 있다. 선주민과 침식을 같이 하며 연구한 그의 논문들은 인간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 권력구조, 자원의 분배, 혼인과 가족 등 인류사회의 기본요소가 서양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선주민이라고 해서 결코 열등하거나 미개한 것이 아님을 깊은 인간미와 함께 기술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를 생각할 때, 우리의 신은 비유하지만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조상의 피와 정신을 이어받은 존재이고, 이 같은 나는 현세에서 죽어도, 대대자손을 이어간다. 조상 숭배는 일반화된 신앙이며, 내세(來世)도 자손을 통해 보장된다.

  지금 가정의 해체, 자기만의 행복 따위와 같은 말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생활 형태는 그럴지 몰라도 심리적으로는 혈연과 사회와의 사슬에 묶여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가정을 부러워하는 서양인들도 많다.

  종교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나오고 사후의 불안을 덜어주는 장치라고 하기도 한다.

  옛 노인들이 수의와 관을 준비하여 거실에 놓아두고, 명당 고르기를 재미로 여기는 일처럼 인간적인 사생관(死生觀)도 없을 것이다. 그런 노인이 죄를 지은 탓에 단테의 지옥으로 빠질 염려는 애당초 없는 것이다.

  여러 인류학자들이 선주민들의 증여(贈與)나 교환(交換) 등 행위가 권력관계를 완화하는 실질적 경제행위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만사를 손익계산을 적용하는 현대인의 비인간적 관계에서보다 훨씬 사람다움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 역사를 읽으면서 강하게 느낀 점의 하나는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좀체 변화하지 않는 원형질(原形質) 또는 문화의 핵(核), 요새 말의 유전자라는 것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유전자도 역사적 문화적 체험으로 분포상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지만, 유전자 자체는 여간해서 변질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이론이 옳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권력 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치면에서 특히 그렇고, 집단적 심리 상태가 그렇다.

  흔히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들을 하는데, 지금도 대통령을 임금, 나라님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 사람들의 무리가 촛불집회에서 발칙한 신하들을 규탄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서구식 민주제도는 아직 멀다는 생각에 앞서, 어진 임금(仁君) 아래 못된 벼슬아치들을 규탄하는 서슬 퍼런 선비들의 상소와 절규가 오버랩 되기도 한다.

  왕조사를 곰곰이 보면 때에 따라 일정치는 않지만 왕권과 사대부, 즉 엘리트 집단간의 권력 게임이 되풀이됐고, 당쟁의 치열함 속에서 사화(士禍)로 일컬어지는 숙청, 추방 등의 형태가 10년이 멀다하고 반복됐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의 밸런스를 잘 잡은 임금이 명군이란 칭찬을 들었다. 광해군이나 연산군은 사대부들의 비판과 비난에 참을성을 잃고 대량학살로 앙갚음을 하여 폭군이란 악명을 받았다.

  중국이나, 서양의 황제 같았으면 임금을 비난하는 언사조차 어림없는 일이었다. 조선왕조가 유례없는 장기간의 체제 유지를 한 것도 엘리트 집단의 왕권 견제와 거의 정기적인 숙청에 따른 정권 교체가 통풍(通風)의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엘리트 집단의 무기는 성리학에 기초한 도덕적 이데올로기였다.

  고려가 망한 원인은 내외로 복잡하여 간단치 않으나, 불교 특히 사찰의 부패, 무인 집단과 문인 집단간의 투쟁, 몽고 등 외국의 침략,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지배 집단의 분열 등이 지적되고 있다. 어느 나라도 그렇지만 망할 때엔 인심과 사회가 극도로 혼탁해진다.

  고려 후기부터 성리학의 세례를 받은 이른바 신진(新進)사대부들이,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이데올로기’를 성리학의 원리에서 찾았다.

  이 원리는 기본적으로 인간관계의 안정을 위한 것이다. 군신, 가족, 벗과 이웃 등의 위계질서를 세우고, 이를 통해 지역공동체의 안정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권력 관계에서 대의명분(大義名分), 가족에 있어서는 부모와 조상을 절대시하는 효(孝), 향촌에서는 장유(長幼)의 질서를 강제적으로 내리 먹였다.

  일례로, 장법(葬法)에 있어서도 고려시대 가난한 백성들은 풍장(風葬)이 많았다. 이것이 야만이라 하여, 매장하고 봉분을 쓰게 했는데, 개국 후 이 장법을 보급하는데 백년 이상이 걸렸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생활양식의 강제적 변혁이었다. 사찰과 중은 깊은 산 속으로 추방됐지만, 도시 속 곳곳에 암자가 생기고, 변장한 중들이 무시로 문안을 출입했다. 민간신앙이 음성화된 것이다.

  암자, 무당집, 점장이집 따위를 통틀어 음사(淫祠)라 했는데, 개혁을 부르짖는 엘리트 집단들은 이를 참지 못했다.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들이 궐 밖 가차운데 있던 소격서(昭格署) - 주로 궁중 여인들이 드나들던 암자 - 를 없애야 한다고 들고 일어나, 기묘(己卯)사화의 발단이 되었는데, 공산사회에서 교회를 없앤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조광조 등의 개혁 명분도 역시 권력의 정당성에 관한 것이었다. 연산군의 폭정을 종식시키고자 감행한 중종반정이 성공하였으나, 연산군 때의 기득권자들이 계속 살아남아 권력을 농단하고 있음은 반정의 대의에 어긋나며, 따라서 통치 권력의 도덕성과 정당성을 본질적으로 훼손하고 있으므로, 전시대의 벼슬아치들을 도태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이른바 공신삭훈(功臣削勳)이었다. 삭훈은 하사했던 전답도 반환해야 하므로, 생존권의 박탈이나 다름없었다.

  엉터리 신하들을 내쫓고 대신 명망 있고 어진 선비를 기용하여 충원(充員)하자는 것이 이른바 현량과(賢良科)의 창설이다. 과거를 보지 않아도 고급관리가 될 수 있는 제도이다.

  그런데 현량과에 추천된 인사들은 대개, 신진세력들의 친척이나 지인(知人), 학문의 선후배 등이 많아 공평치 못하다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삭훈할 때나 현량과 추천시나 모두, 누군 빼고 누군 넣었다는 논의가 시끄러워, 개혁세력간의 불화를 빚기도 했다.

  결국은 한정된 자원 배분의 문제인 것이다.

  한말의 개혁적 사대부의 한사람으로 유명한 이건창(李建昌)은 그의 저서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나누어 줄 자리는 적은데 대기하고 있는 사람은 많아 싸움이 날밖에 없다”고 했고, “싸움이 치열해지다 보니, 논의가 지나치게 준엄․격렬하다”고도 했다.

  걸핏하면 단죄(斷罪)요 추방이요, 죽여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가득 찼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먹을 알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개혁 드라이브라는 것은 으레 과격한 급진파가 헤게모니를 잡게 마련이다. 중도파였던 조광조도, 20대의 급진파에 떠밀려, 이러다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겠구나 싶으면서도, 관성의 법칙에 따라 외곬으로 내치다가 결국 왕권에 점점 도전하기에 이르자, 위기감을 느낀 국왕이, 그들을 일망타진하여 정국을 뒤엎었다. 이건 친위 쿠데타도 아니고, 국왕 쿠데타라고나 할까, 국왕이 관료집단을 깡그리 숙청한 것이다.

  조광조 등은 사대부의 귀감으로 길이 남아, 추앙을 받았으므로, 그의 정치가 실패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후대 사대부와 선비들은 그를 모범으로 삼아,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을 간하고 직언을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임금을 교육하려고 했고, 인군(仁君)이 돼야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로 국왕을 압박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지나친 도덕주의적 대의명분론은 문화적으로, 성리학 교리를 가장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는 소중화(小中華)사상에 빠지게 하여, 이를 모르는 일본인이나 서양인들을 오랑캐라고 비하․배척하여, 재난을 자초한 것이 한말의 대외노선이었다.

  명치유신으로 서구의 문물을 수입하여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한 일본정부가 보낸 국서 가운데, 천황(天皇)이란 글자가 있는 것을 비난하며, 그 국서의 접수를 거절하기도 했다. 황자는 중국의 임금밖에 쓰지 못하는데, 너희 섬나라의 오랑캐가 어찌 그런 글자를 쓰느냐는 것이었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미디어들은 일왕(日王)이라고 쓰고 있는데, 저간의 사정이 닮은 데가 없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조선 왕조가 오래 간 것은 도덕주의적 관념론의 줄기찬 승리였던 동시에 패망의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고.

  조선 후기와 한말의 정치론 가운데, 그다지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귀담아 들을만한 서구인의 책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미대사관에도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정치 The Politics of the Vortex」란 논문이다.

  조선의 정치가 권력 과잉, 정치 만능임을 전제하면서 모든 권력이 임금이란 정점을 향해 일제히 소용돌이치며 수직 상승한다는 진단이다. 이와 유사한 발상이, 어느 미군사령관이 말한 ‘들쥐론’이다.

  헨더슨은 당시 권력의 구도를 하나의 단극자장(單極磁場 - 중앙지향의 토양)이란 말로 집약하고 있다.

  그 자장의 중심은 엄청난 인력(引力)을 지니고 있으며 시골에 살아도, 항상 서울에 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옳게 본 것이다. 우리 젊었을 때만해도 밥술 깨나 먹는 지방 유지들은 일년에 두어 번은 상경하여 모모하는 고관 집에서 며칠씩 묵고 온 것을 자랑삼아 얘기하곤 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래야 시골 조무래기들이 괴롭히지 못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권세가 한창일 때 글씨와 그림을 달라는 사람이 하도 많아, 운현궁의 식객 노릇을 하는 화가들에게, “자네가 적당히 그려서 내 도서를 찍어주게”하며 도장을 맡기곤 했다. 그래서 대원군 난초엔 위작(僞作)이 많다는데, 대원군은 그렇게 하여 화가의 수입을 올려주자는 배려였던 것이다.

  대원군의 난초를 사랑에 걸어두면, 시골 아전 따위가 수작을 부릴 엄두도 못 냈던 것이다.

  권력의 빛이 구석구석까지 비쳐주었다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사정이 크게 나아졌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앞으로는 꽤 오랜 기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권력으로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가리는 것인데, 왕조 시대의 사고방식과 습성이 오늘날까지 소멸되지 않았으니, 제도만 민주화됐다고 민주사회가 됐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다.

  헨더슨 말고, 제임스 B. 파레라는 사람이 쓴 『전통한국에 있어서의 정치와 정책 Politie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란 책이 있는데 한말의 정치를 중심으로 특히 대원군의 개혁을 소상히 다루고 있다.

  세제(稅制)․전제(田制) 등의 경제제도 개혁과 정부기구의 개편과 인재 충원, 신분제도의 개선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논술하고 있다.

  대원군은 부패 척결을 위한 중앙정부의 통제 강화에 힘을 쏟았고 양반사대부 집단의 전횡을 억제하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면서 왕비 민씨 일족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려고 애썼다는 둥을 소개하면서 꽤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대외 정책면에서는 협소한 국토와 빈곤한 자원으로 열강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을 극복하지 못해 “움츠러든” 자세로 대외 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자주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고 있는데, 이는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 정치권력의 구조와 양태에 대해서는 헨더슨과 대동소이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대원군이 프랑스 등과 교섭을 가지려고 시도했고 국제정세에 아주 캄캄했던 것은 아니지만, 권력 투쟁 때문에 눈을 밖으로 돌릴 여유가 없었다는 지적은 나도 대체로 공감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의 얘기는 이쯤하고 문화의 핵론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사회집단의 기질(氣質), 습성, 정서적 반응 그리고 사고방식 등과 관련된 얘기이다.

  융크는 집단적 잠재의식이란 개념을 제시했는데.

  거칠게 말해 만사를 성적 억압과 그의 표출로 환원시킨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보다는 융크 편이 권력과 사회를 설명하는 데는 더 도움이 될 법도 하다.

  나는 세종로에서 펼쳐진 촛불시위 광경을 보고 대뜸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부여란에 있는 기록을 연상했다.

  “정월에 지내는 제천(祭天)행사는 국중대회(國中大會)하여 밤낮으로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迎鼓)라 하였다.”

  유명한 구절인데, 다음처럼 계속된다.

  “이때에 형옥(刑獄)을 중지하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삼국지 말고도 여러 사서(史書)에 비슷한 기술이 나온다. 대개, 중화인의 눈으로 보아 비문화적인 풍습이라 다소 경멸하는 투이다. 중국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시베리아의 대초원에 산재했던 기마․유목민족의 주류를 일괄하여 흉노(匈奴)라고 불렀다. 서양사에서는 훈족이라고 함은 다 아는 일이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그 후예들이었다.

  집단적 열광은 군중 심리의 작용에서 나타난다. 농경사회에서는 풍년이 들어 경축을 하더라도 마을 단위로 농악이나 울리고 조촐한 잔치를 즐기는 것이 보통이다. 대집단으로 열광하는 것은 징기스칸이 여러 종족들을 모아놓고 전쟁의 승리 등을 축하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기마․유목민 집단의 행태(行態)라 할 수 있다.

  훌륭한 지도자가 초지가 풍성하고, 물이 맑은 축복된 땅에 인도하고, 말, 소, 사슴 등의 먹을 것을 넉넉히 사냥했을 때, 성원들은 열광하고, 지도자에 대한 찬양의 열기가 높아지는 당연한 일이다.

  공통의 정서를 주고받으면서, 나와 내 가족의 존재를 확인하고 안심한다. 가까운데 적의 위협이 있을 경우는 열광의 도가 더욱 높아진다.

  나는 여기서도 우리 민족의 유전자가 살아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시대적으로 나누어보면, 기마․유목민족적인 기질은 적어도 고려 중엽까지는 살아 있었는데, 조선 개국 이후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권력에 의한 강제로, 안으로 숨어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고의 침략에 대한 고려 군부의 끈질긴 항쟁을 보면 기마민족적인 용기와 굳건한 의지를 알 수 있다. 몽고의 세계 정복 과정에서, 고려처럼 애먹인 나라는 없었다. 그래서 고려 왕실을 회유하여 인적․물적 자원을 지배․수탈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려 군부는 기마민족의 약점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가고, 다시 제주도로 옮기면서 저항한 과정이 그것을 말해준다.

  여담이지만 조선 왕조에서도 기마의 유습(遺習)이 남아 있었다.

  군정의 벼슬아치들이 익혀야할 기예(技藝)가운데, 승마와 활쏘기가 들어 있었고, 향촌에서도 활쏘고, 술마시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또 사찰은 추방하고 중은 천시하게 됐지만, 암자와 무당집은 여전히 번성하고 사대부집 안방에서도 푸닥거리를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사랑에서 시를 읊고 고담준론(高談峻論)을 즐기는 동안, 안에서는 치성을 올리고 굿판을 벌였다. 시베리아 초원과 숲속의 셔먼이 살아 있었다. 사랑방이 묵인을 했던 것이다.

  조광조의 비극은 이런 민간신앙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고나 할까.

  허긴 의젓한 사대부들도 역점(易占)을 거의 생활화하다시피 했다. 이데올로기만으로는 허전하고 불안했던 것이고, 인간의 삶이란 대의명분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고백한 셈이다.

  아침에 조정에 나가기 전에 점을 치고, 불길한 괘나 나오면 행차하지 않았다. 언제 예기치 않은 화를 당할지 알 수 없는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 살았기에 운명의 속삭임을 미리 듣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도 사주와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하긴 농경민은 하늘의 섭리를 충실히 따르고, 부지런히 일하면 그만이다. 그런저런 민간신앙은 기마․유목집단에 더 아쉬운 일이다. 셔먼은 신령의 힘을 빌려, 갈 방향과 일진을 예언한다. 해방 후 나온 일본의 고대사학자 에카미 나미오(江上波夫)의 저서 『기마민족의 일본정복설』은 내게도 하나의 충격이요, 개안(開眼)이었다.

  사냥감을 많이 잡고 못 잡고는 운이 좌우하지만, 용감한 행동이 있어야 한다. 기운 세고 용감한 젊은이가 자원조달을 위한 귀중한 인력임은 자명한 일이다.

  사냥감을 구하지 못하는 노약자는, 집단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고려장으로 보내버리는 것이 공동체의 생존에 필요 조건으로 된다.

  농경사회에서도 고려장이 없지는 않았지만, 자원을 포획하여 생존하는 집단보다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에스키모족은 바다개의 가죽을 이빨로 씹어, 옷가지를 만드는데, 이가 빠진 노인은 생산성이 전혀 없기에 고려장을 했다고 한다.

  그들이 하필 비인간적이라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조선왕조시대엔 서너 차례 대규모의 민란에서 억압된 ‘에너지’가 터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도덕지상의 이념에 세뇌된 - 이를 권력은 감화, 선화(宣化)라고 했다 - 백성들은 비교적 잘 순치되어 후기까지 큰 혼란은 겪지 않았다.

  그러나 농경적 질서가 무너진 것은 한말과 해방 후였다.

  그 혼란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진정되었고, 5․16 군사혁명 이후 쑥 들어갔다.

  박정희 정권의 18년은 교묘한 두 갈래의 리더십을 썼다. 한편으로 농경사회의 근면과 협동을 강조하면서 향촌간의 경쟁심리를 자극하여 새마을 운동의 에너지를 확산시키고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다른 한편 공업생산 분야에 대해서는 기마민족적 진취성, 기동성, 모험심 등을 고무하여 주마가편(走馬加鞭)격으로 기업인과 노동자들을 부추겼다. 이 무렵을 부정, 비난하는 사람들은 노동 탄압을 강조하지만, 그랬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동남아로 중동으로 아프리카의 오지까지 기업일꾼들은 기마군단처럼 세계를 누비며 돈을 벌었다. 문호를 개방해서 해외의 자본을 끌어들여, 자본 형성의 밑천으로 삼았다.

  이건 기마민족의 장점을 살린 것이다.

  그는 우리 민족의 문화의 핵인 기마집단적 요소와 농경집단적 요소를 구사하게 하여 이른바 엽전의식을 없앴고,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제 경제사회 구조는 변하고 생산양식도 크게 바뀌었다. 조용하고 부지런한 일꾼보다, 좀 튀고 시끄럽더라도 신기한 재간을 부리는 일꾼이 생산성과 이익을 높이는 사회가 됐다.

  기마․유목민족적인 기질과 습성이 사회의 요구에 맞는 시대가 됐고, 시키는 일이나 꼬박꼬박하는 얌전한 사람은 점점 쓸모가 없게 되었다. 기는 사람 위에 뛰는 사람이 있고, 그 위에 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반면의 교사 격이지만, 요새 보도되는 갖가지 사기행각들의 지능적인 수법을 보면 가히 천재적이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흉내도 못 낼 사례들이 적지 않다.

  먹이감을 잡는데 활을 쏘건, 덫을 놓건, 독약을 놓건 잡는 자가 으뜸인 셈이다. 땅을 갈고, 씨를 심어, 마냥 기다리는 농사 따위는 어리석은 사람의 몫이다.

바야흐로 고대 기마민족의 장기가 되살아 난 것이다. IT혁명의 물결은 해일처럼 전 세계에 넘실거리고 있다.

  인터넷의 보급이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는데, 일본은 기본적으로 농경민족이었고, 그런 기질을 몇 차례 대외침략 등을 빼고는 꾸준히 유지해왔다. 한국 사람이 이제 새문명의 조류를 먼저 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대 변화에 물결을 탄 데는 매우 민첩한데, 정치와 권력관계에 있어서는 조선 왕조시대에서 뚜렷하게 개혁된 것이 없다. 되려 퇴보한 면이 있다. 왕권과 엘리트 집단간의 긴장과 균형은 아예 없으며, 임금에 대한 싫은 소리, 바른 소리, 더구나 간하는 소리는 귀를 씻어도 들을 수 없다.

  민주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소란과 혼란은 불가피하지만, 공동체가 와해될 지경으로 지리멸렬이 돼서는 곤란하다. 더구나, 북한 김정일 집단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딴 나라들과는 형편이 다르다.

  우리사회가 기마․유목민족적 장점을 마음놓고 발휘할 수 있는 호기(好機)를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데 기마 민족은 소집단의 단결은 쉬웠지만 대집단의 통합에는 서툴렀다. 몽고․원(元)의 대제국도 불과 수십 년에 갈기갈기 찢기고, 통치권력은 무너졌다. 하긴 원이 그만큼 된 것은 외국인 인재를 받아들여 국가 경영에 활용했기 때문이고, 민족 단위만 고집하는 폐쇄성에서 벗어난 요새말로 글로벌국가였기 때문이다.

  한말의 지식인(유생)들은 오랑캐와 상대하지 말고 중화문화를 신봉하는데 고집을 피우다가, 나라를 망치는 토양을 제공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주의는 우선과 허구에 빠지기 쉽다. 그런 리더십은 권위를 상실하고 통합의 힘을 쓰지 못한다.

  근래 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전략의 기초를 외면하고 요새 중국을 ‘섬기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대당전쟁에 승리한 신라의 삼국통일과, 고구려의 줄기찬 대수․대당 전쟁을 회상하며 착잡한 심정을 가눌 수 없다.

  또 명분론에 얽매여 몸을 가누지 못한 한말의 정치를 돌아보며, 역사는 역시 되풀이 되는가라는 반문을 하고 싶다. 기마․유목민족은 관념론을 아예 상대하지 않았고, 외향성(外向性)과 실용주의가 삶의 원리였다. 우리 문화의 핵이, 5백년간의 관념주의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것이 당면한 정치론의 주제가 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