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그때는 봄이었다.

통일로에도 봄은 무르익고 길섶마다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지만, 그 꽃길을 달리던 차 안은 바깥 날씨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싸늘히 얼어 있었다.

스물여섯의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들. 만나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으면서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그래서 우리를 더욱 얼게 했던 ‘남북작가회의 예비회담’이 열리는 날. 우리는 이렇게 판문점을 찾아 통일로를 가고 있었다.

구파발부터 길목마다 지켜선 검문소. 헌병들이 차 앞에 걸친 ‘남북작가회의예비회담’ 펼침막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는 검문소를 하나 둘 별일없이 지나치면서 차안은 조금씩 누그러지고 얼었던 얼굴도 풀려 더러는 담배를 피워 물고 잡담도 나눌 무렵 고갯길을 치달아오르던 차가 갑자기 멈춰 선다.

전경 한 무리가 고갯길에 늘어서 있다. 노란 개나리의 밝은 꽃울타리를 가린 시커먼 방패들, 전경들의 방패가 봄 햇살을 받고 번쩍이는 꼴이 길섶의 울타리꽃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임진각쯤에서 진을 치고 있으리라고 짐작한 전경이 너무 엉뚱한 데서 불쑥 나타난다. 이렇게 되면 나가서 싸우는 도리밖에 없겠는데……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마련해 뒀나보다. 옛날에는 여우가 나와 길을 막고 서서 “고개를 넘어가려면 간 떼어놓고 가라”고 해해거렸다는 문산의 여우고개. 오늘은 전경들이 늘어서서 “너희들 북으로 더 가려면 간 떼어놓고 가라”며 히죽거리는구나.

그런다고 간을 떼어 줄 수 있나. 한번 겨뤄보자고 우우 일어나 문 쪽으로 몰리는데 문짝의 바깥 손잡이에 경찰봉을 걸어 문을 못 열게 한다. 차안에 가둬 둔 채 통째로 먹겠다는 속셈인가.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들을 버스 안에 가둔 채 마포경찰서로 끌고와 유치장에 처넣는다.

1989년 3월 27일에 있었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봄나들이였다.

그 무렵도 우리는 젊었지만 처음 거리로 나선 1974년은 더 젊었다.

젊었기에 우리는 두려움을 몰랐다. 유신독재의 탄압에 우리는 붓대를 꺾고 거리로 나와 자유실천을 외쳤고, 서넛만 모여도 잡아넣는다는 긴급조치의 위세에 맞서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했다. 30년이 넘은 옛 일이다. 이제 칠십대 원로시인으로 받드는 고은, 신경림이 사십 고개를 넘어서고, 육십대의 박태순, 현기영, 백낙청 들은 삼십대 청년이던 때.

이 땅에서 글을 쓰는 문인이라면 민족문학이 지켰던 문학정신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30년, 40년에 걸친 모멸의 시대를 거쳐 이제야 비로소 민주화세력은 안정된 정치세력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1989년 우리의 봄나들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통일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우리가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에 ‘남북작가회담’의 펼침막을 거둘 수 없다.

우리 민족문학작가는 언제나 남들보다 몇 걸음 앞서서 걸어왔다.

80년대에 너무도 치열하게 싸웠던, 그래서 시달림도 크게 받았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결성된 해가 1983년이었고, 1986년의 ‘5․3인천시위’와 1987년의 ‘6․10큰싸움’으로 민주화의 신새벽을 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결성이 1985년인 것과 견주어보면 1974년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은 민족사의 맨 앞줄을 지키는 문학정신과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우리 문학인들이 앞장섰던 민주화운동은 한 그루 큰키나무가 자라듯 천천히 커갔다. 민통련에 이르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한 틀로 묶은 문익환 목사도 시인이었다. 오늘의 작가정신의 바탕이 민주화운동이었다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한 틀로 본 정신도 작가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1989년 봄에 북녘의 작가들을 만나러 판문점으로 가던 작가들이 자실운동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실천한 그 사람들이었던 사실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민족문학정신은 하나의 흐름이다. 독재권력의 민주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은 혹독했지만 이 흐름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온 땅의 물이 바다로 흘러들듯 우리의 뜻은 쉼없이 민중 속으로 스며들어 민주통일이라는 한 그루 나무가 땅속 깊이 뿌리 내리는 일을 도왔음을 자랑삼아야 한다.

5․3인천시위와 6․10큰싸움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되살려 선거를 통해 군사정권을 몰아내었고 오늘의 ‘참여정부’라는 큰 나무로 일어서기까지 말이다. 되돌아보면 오늘에 이른 성장 과정은 살점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지는 수난의 연속이었지만 이 수난과정을 거쳐서 자란 나무이기에 민주세력의 승리는 너무도 자랑스럽지 않은가.

온 겨레가 월드컵에서 보인 열정은 세계 여기저기에 ‘한류’라는 큰 흐름을 만들고, 많은 나라가 한국을 알려고 한글을 배우려는 ‘한글교육 붐’을 불러일으켰다. 나라 안으로는 영화 ‘실미도’와 ‘태극기를 휘날리며’에 1천만 관객이 몰려들어 남과 북은 하나이며 ‘겨레도 하나’라는 사실을 똑똑히 일깨워 주었다.

며칠 전 북녘 룡천에서 터진 철도사고에 쏟아지는 온 겨레의 뜨거운 마음, 이 마음은 탄핵정국을 촛불집회로 비판하고 총선을 통해 탄핵세력을 몰아낸 힘으로 드러낸 바 있지 않은가.

우리 민족문학작가들은 오늘도 가고 있다.

1989년 봄 ‘남북작가회의 예비회담’의 펼침막을 들고 나섰던 길을 오늘까지 쉬지 않고 걸어왔기에 2003년 8월 15일 남북작가의 만남이 평양 릉라도에서 이뤄질 수 있었고, 이 봄이 가기 전에 ‘남북작가회담’도 열리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