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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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다룬 『아리랑』을 펼치면 리영희 선생이 쓴 「『아리랑』과 나」라는 글이 나온다. 이 글에는 1959년 가을, 합동통신사 외신부 기자로서 미국무성 후원으로 노스웨스턴대학 대학원 신문학과에서 6개월 연수 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도쿄에서 『아리랑』 일본어판을 만난 일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이 글에는 이렇게 구한 『아리랑』이 아직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0년대 김지하, 김정남 등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읽히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소개돼 있다. 그러다가 『아리랑』은 1980년대가 되어서야 다시 리영희 선생에게 돌아왔다. 『아리랑』을 돌려준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시 『토지』 후반부를 세상에 내놓고 있던 박경리 선생. 리영희 선생은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후 언젠가 우연한 기회에 박경리 씨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작품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특히, 중국과 만주에서의 전투적인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아리랑』은 고결한 낭만주의적 인텔리 혁명가 장지락 선생이 이 땅에서 다하지 못한 유지의 일단을 대신 이룬 셈이다.”

  내가 대학교 때 읽었던 『아리랑』을 다시 읽은 것은 작년의 일이었다. 그 때 나는 1930년대 간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쓸 작정으로 책을 찾아 읽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리영희 선생의 이 글을 읽게 됐다. 맨 처음에는 ‘그저 박경리 선생은 숨어서 읽었던 『아리랑』을 나는 이처럼 자유롭게 읽고 있구나’ 정도의 감흥이었다. 그리고 그 얼마 뒤. 나는 볕이 잘 드는 도서관 2층에 앉아서 1930년을 전후해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조선인들의 짤막한 생애를 읽었다. 역사책에, 혹은 인명사전에 나오는 그들의, 겨우 반 페이지 정도로 요약되는 생애를 복사해 노트에 붙여나갔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었다. “함흥 경흥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1908년 부모를 따라 길림성 화룡현 상천평으로 이주했다…… 1937년 10월 12일 화천현 납자산에서 제8군 제1사 내부의 배반자에게 살해당했다” 혹은 “함북 성진에서 소작농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33년 4월 민생당원으로 지목되어 현위 서기직에서 해임되고 11월 군중대회에서 총살당했다” 같은 문장들.

  그 문장들은 내가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제8군 제1사 내부의 배반자에게 살해당했다’나 ‘민생단원으로 지목되어 군중대회에서 총살당했다’라고 쓸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상상해야만 하는 셈이었다. 그 때, 나는 지하로 몰래 돌아다니는 『아리랑』을 구해 읽는 박경리 선생을 떠올렸다. 소설가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은 절대로 소설로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면 억지로라도 상상해야만 한다. 상상되지 않는다면 상상할 수 있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만 한다. 그제야 나는 소설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가 생각해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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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한 때는 이상의 아내였던 김향안 여사가 돌아가셨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 뉴스를 들으면서 내가 느낀 아쉬움은 상당했다. 나는 김향안 여사를 만나서 이상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지 못하고 『꾿빠이 이상』을 쓴 게 가장 안타깝다. 물론 내가 이상에 대한 논문을 쓰는 게 아니라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내가 아쉬움을 느낀 까닭은 『꾿빠이 이상』의 작가에게 자신이 창작한 소설 세계에서 영원히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이 남아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건 21세기에 소설을 창작하는 소설가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다. 이 점이 이전 시대와는 엄연히 다른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소설이 다루는 현실의 전반적인 상황을 모두 파악한다는 뜻이다. 이 전반적인 상황이란 김향안 여사가 회고하는 이상의 생애에 대한 정보나 간도 내 민생단 사건의 전말과 같은 학문적 성과를 포함해 소설의 창작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국면을 다 포함한다. 소설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문장인데, 정확한 문장은 정보에서도 나오지만, 경험에서도 나온다. 예컨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삼나무에서 푸드득 날아오르는 저녁바람 속 까마귀가 크도다, 하는 노래가 있지만, 여기 창에서 내려다보이는 삼나무숲 앞에는 오늘도 잠자리떼가 흐르고 있다. 저녁이 깊어지면서 잠자리들의 흐름도 다급하게 속력을 내는 것 같았다.”

  이런 문장을 쓰려면 소설가는 먼저 그 풍경을 바라봐야만 한다. 문장이 상투적으로 바뀌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고 상상할 수 있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문장이 정확하지 않고 상투적으로 바뀌면 소설의 상상력은 필연적으로 상투적이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위해서 소설가는 자신조차도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것들,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 예상할 수 없었던 것들을 봐야만 한다. 하지만 수많은 선배 소설가들을 둔 입장에서 이 일은 여간 어렵지 않다. 일상사의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봐야만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소설이 다루지 못한 시간과 공간을 간신히 찾을 수 있다.

  내게는 자료에 의존하지 말고 자유롭게 소설을 써보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그건 자연인인 내가 경험한 세계 안에서 소설을 써보라고 말하는 일이다. 나는 1987년 이전까지는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사회구성원이 하나의 강렬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 때, 작가는 그들을 대신해 자신의 경험을 보편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1987년 이후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사람이다. 내 경험은 독자들과 단 한 번만 공유될 수 있다. 그 독자층도 같은 세대로 제한된다. 단 한 번, 같은 세대로 제한되는 독자를 대상으로 한 소설이란 회고록이다. 나는 이미 그런 소설을 한 번 썼다. 이제는 자연인인 나의 경험 세계 안에서 중언부언하는 회고록을 쓸 생각이 아니라면 상투적이지 않은 문장을 찾기 위해 자료와 경험을 쌓아가야만 한다. 이건 결국 타인의 세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지금의 소설가가 늘 눈앞에 있는 것들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지금은 소설의 시간과 공간에 관련한 모든 자료를 읽고 항상 새롭게 세상의 모든 일들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인간이란 과연 어디까지 해석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으로 늘 지금의 학문적 성과를 담은 서적을 읽은 뒤에야 비로소 줄거리를 잡고 인물을 창조하고 소설을 쓸 수 있다. 이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다. 소설가로서 나는 나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야만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게 바로 새로운 소설이다. 우리 시대에 새로운 소설을 쓴다는 건 갈수록 어려워지는 형편이다. 소설 이전에 먼저 새로운 지식과 경험으로 무장한 소설가를 만들어야만 한다. 새로운 소설은 새로운 소설가가 쓰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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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롤리타』를 펼쳤다가 첫 문장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그 동안 왜 몰랐을까, 하고 머리를 툭툭 쳤다. 정말 대단한 문장이다. 이런 소설이 있는 한, 소설가로서 나는 온 마음을 다해 힘껏 노력해서 세계를 바라봐야 한다. 어떤 소설가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문장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려는 무모한 짓을 계속해야만 하는 처지다. 눈을 부릅뜨고 책을 뒤져보고 귀를 쫑긋 세워 앞에 앉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영 안 되면 실제로 비슷한 상황에 나를 몰아붙인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뷰나 강연회 같은 곳에서 몇십만 부씩 팔리는 소설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나는 가장 당황한다. 예로 드는 소설은 늘 바뀌게 마련인데, 요즘은 『나무』나 『냉정과 열정 사이』 같은 소설을 잘 거론한다. 사실 나는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인간이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무엇일까’에서부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는 조선인 직원이 몇 명이나 있었으며 월급은 얼마나 받았을까’까지 궁금증은 다양하다. 그러므로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난감하기만 하다. 그런 게 궁금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나도 『냉정과 열정 사이』 같은 소설은 좋아해서 연변에 올 때 가방에 넣어서 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저 ‘대단히 잘 팔리는 소설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도의, 그 순간 바로 떠오르는 생각을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질문은 빨리 넘어가는 게 좋다.

  물론 나도 수십만 부씩 팔리는 소설을 쓰고 싶다. 하지만 남들도 뻔히 아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독자들의 욕구를 파악해서 수십만 부씩 팔리는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나는 소설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꼭 한 번 쓰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소설가가 된 사람이 아니다. 내 얘기를 소설로 쓴 적도 있지만, 지금은 소설이란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어떤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소설이 이런 의미인 이상, 독자의 욕구를 파악해 수십만 부씩 판다는 건 소설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소설 창작의 모든 국면에서 뻔히 아는 방식을 피하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해서 소설을 쓰는데, 백 명이면 아흔아홉 명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수십만 부씩 팔릴 수 있는 소설을 쓰는 일을 하고 싶을 리는 없다.

  고전소설을 쓴 작가들은 지금 봐도 깜짝 놀랄 정도의 서사와 묘사와 어휘를 사용하고도 수백만 부씩 팔고 있는데, 왜 나라고 그 일을 꿈꾸지 못할까? 이루지 못할 꿈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런 꿈을 꿀 수는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인간은 할 수 있는 일만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늘 확인하고 싶다.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군, 이라는 생각이 드는 일은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수십만 부씩 팔리는 소설은 절대로 쓸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잡아끈다. 소설의 모든 국면에서 새로우면서 독자들과 평론가들에게 오독되지 않아 수십만 부씩 팔리는 소설. 정말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다들 문학은 죽었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나는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내 소설이 지향하는 바는, 정말 여기까지다. 이게 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