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1

딸아이는 발레리나가 되겠단다. 여섯 살배기 여자아이다운 꿈이다. 하지만 몸매나 환경을 보건데 십중팔구 이루지 못하겠지. 아니 그전에 다른 꿈으로 바뀌겠지. 젊은 작가로서의 주장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름의 이런저런 의견과 주장이 넘치지만 발레리나가 되겠다는 계집애와 다를 바 없는지 모른다.

특히 이번 지면은 젊은 작가로서 자신의 문학에 대해 언급하는 자리이지만, 사실 나의 문학은 아직 스스로 옹호할 만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젊은 작가들과 상대적으로 평가한다면 분명히 나름의 가치와 특성을 갖고 있다고 얼마든지 자부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나는 아직 젊은 작가이다. 작가에겐 늘 방금 완결지은 자기 작품이 최고 작품처럼 여겨지듯이, 얼마간 시간이 흘러간 뒤의 자기 작품만큼 형편없어 보이는 것도 없다. 이미 출간한 책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평론가나 독자 몫이다. 오독까지도 그들 몫이다. 내게 지금 급한 것은, 그저 겸허히 최선을 다해 자기갱신의 창작생활에 열중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다만 현재 위치를 파악해보기 위한 일반적 점검에 지나지 않는다.

2

나는, 70년대를 산업화, 80년대는 민주화 운동, 90년대는 사회주의 세계권 붕괴 그리고 2000년대를 자본주의 세계화의 시대로 규정지은 구중서 선생의 시대 규정에 그대로 동감한다. 나는 진작부터 우리 세대 작가들을 ‘세계화’라고 하는 화두와 싸우고 있는 작가들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화’가 그리 간단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게 ‘세계화’라고 하는 사건은, 10년 단위의 시대 구분이기보다는 적어도 우리 근대사 100년 혹은 서구 근대사 400년 중에서 한두 번쯤 있었던 질적 변화에 상응하는 매우 거대한 변화로 느껴진다. 산업화, 민주화, 사회주의 붕괴 등과 같은 사건들이 시간 단위의 변화라면 세계화는 계절단위의 변화에 해당한다 할까. 때문에 변화 현상도 가히 전방위적이다. 우선 경제 구조가 국가 중심의 자본주의에서 다국적 기업 중심의 자본주의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때문에 국가 이데올로기 역시 해체되고 있으며 이는 가부장제 가족주의 해체로도 이어진다. 권위주의의 해체나 페미니즘의 유행 등도 이에 따른 결과이다. 나아가 자본주의가 세계화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대타적(對他的)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농경문화나 사회주의문화와 같은 외부 거점들이 사라졌음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제 자본주의 바깥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내면화’를 의미한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사유할 수밖에 없으며, 자본주의 매커니즘 속에서 자본주의의 균열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또한 세계화는 영화와 디지털방송, 인터넷과 모바일 등 주류 매체의 격변과 함께 실행되고 있다.

이처럼 ‘세계화’는 국제 질서, 경제 구조, 이념 문제, 가족 제도와 일상, 인간의 내면, 그리고 매체에 이르기까지의 다각도의 변화를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매우 거대한 그리고 근본적인 변화이다. 또한 아직은 진행 중이어서 그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아마도 이제 겨우 시작된 뿌연 안개 속의 변화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경우 IMF사태와 이후의 어려움이 보여주듯, 매우 힘겹고 그리고 타의에 의한 변화이기도 하다.

3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지금은 단지 고작 10년, 20년 전의 앞 세대 소설가와 지금 활동하는 소설가와의 차이점을 논해야 할 시점이 아니라, 한문소설과 판소리계소설을 비교하듯 혹은 신소설과 근대소설을 비교하듯, 새로운 소설사 혹은 서사 장르의 출현에 대해 논해야 하는 시기이다. 지금의 젊은 소설가들은 앞 세대 작가와 변별되는 자기 개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만으로는 자기 의미를 결코 찾지 못할 것이다. 어떤 좋은 소설을 쓰려고 하기 이전에, 내가 왜 하필 ‘소설’이라는 변방 장르에 갇혀 글을 쓰려 하지 하는 소설에 대한 근원적 자의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주변 젊은 작가들과 자주 이런 고민을 교환한 바 있다.

‘섬세하고 충일한 일상성을 담아내는 허구’라고 하는 소설 장르 고유의 영역은, 이제 텔레비전․영화․인터넷 문화 질적 양적 변화로 인해 소설만의 고유 영역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대중들은 굳이 소설이 아니어도 ‘진실을 내재한 허구적 서사’를 다양하게 만끽할 수 있다. 각종 영상물과 인터넷 정보는 질과 양과 다양함과 깊이에 있어서까지 문학을 압도하고 있다. 요즘 영상 세대들은 소설이나 시집을 좀체 안 읽는다며 걱정하는 어른들이 종종 계신데 나는 그런, 시대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어르신이야말로 문득 걱정스럽다. 젊은이들이 결코 예전 세대보다 책을 적게 읽지 않을 뿐더러, 책 이외에도 얼마든지 유익한 정보와 지혜를 배울 매체들이 부지기수다. 소설은 문화의 변방으로 밀려났을 뿐 아니라, 출판계에서도 이제 ‘소수’이다. 심지어 전공 관련자들조차 잘 읽지 않는다.

4

그런데도 소설은 계속 존재해야 하는가. 나는 왜 굳이 ‘소설’을 쓰고 있는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동안 연마한 게 글쓰기 밖에 없으니, 라고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으로는 길을 찾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기존의 문단 관습으로는, 지금의 난관을 뚫지 못하리라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세계화에 걸맞은 응전이 필요하다.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시대 흐름이다. 우선 세계화 문제를 풍요롭게 드러내는 소설이 나와야 할 것이다. 세계화 현상이 전방위적이기 때문에, 작품 형태도 다양할 것이다. 20:80과 같은 폐해들, 무한경쟁의 생리, 자본주의적 욕망의 내면화, 가부장제 해체와 페미니즘, 거대 소비사회의 문제, 변방 주변국으로서의 고통에 천착하는 작품들이 좀더 많이 나올 것이다. 다음으로, 소설도 이제 다른 매체와의 평등한 경쟁을 통해 새로운 자기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 소설만이 담아낼 수 있는, 그것이 가령 판타지이든 매직리얼리즘이든 미니멀리즘이든, 새로운 서사 문법의 실험이나 상상력의 과감한 확장 등이 필요하다. 이 같은 요구의 초기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이들이, 나 자신을 비롯한 요즘의 젊은 작가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세계화에 걸맞은 스케일의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 지금 문단을 이끌고 있는 중단편 중심의 관행, 색깔 없는 늙고 획일적이고 고루한 심사방법의 각종 문학상 제도의 난립, 자사 출판사의 상업적 실적을 고려한 비평이나 권위적 지도비평 등은 모두 지양되어 마땅하다. 이 같은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는 얼마나 더 지속될 작정인가. 이래서야 어디 스케일 있는 다양하고 자유로운 실험적 서사의 탐색이 가능할까. 아울러 문학이 대중과 너무 멀어지고 있다. 대중에 대한 겸허하고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요즘 우리의 본격문학이 대중과 멀어지고 있는 것을, ‘고급/저급’의 이분법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한심한 착각이다. 단지 대중의 현재 고민과 정서를 반영하지 못하여 본격문학이 그들에게서 소외되고 있는 현상임을 절급하게 인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점은 내가 느끼는 개인적 불만일 수도 있는데, ‘사회성’과 ‘무거움’을 너무 단순하게 강요하는 낡은 습성이 문단에 여전히 만연해 있다. 가령, 자본주의 논리는 이제 개인의 일상적 욕망과 무의식까지도 침투하여 코드화하고 관리한다. 지금 문학은 사회정치적 비판의식보다도 우리 자신의 미시적 일상과 욕망까지 다시금 들여다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사회성과 엄숙성의 강요는 내가 보기엔 모두 70～80년대의 유산이다. 그때는 사회 문제를 문학이 직접적으로 감당해야 했다. 군사독재의 폭압이 극심한 시기에 대부분의 영역이, 가령 영화 신문 텔레비전 인문사회 분야 쪽까지도 사회 현실을 외면해 버렸고 오직 문학만이 선두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이 점에 대해 선배 문인들께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이제 정치사회적 의식은 저항담론이라기보다 상식이다. 영화,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에서도 건강한 정치사회적 이념들이 꽃피고 있다. 소설에서까지 그러한 건강하고 건전하고 도덕적이고 바른 소재와 결론을 선보여야 할까. 그것이 제대로 된 문제의식이란 말인가. 적어도 예술 영역에서는 건전한 진보주의자들보다는 자유로운 진보주의자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단순하고 뻔한 문화사회학적 건전성에 매몰되어, 소설 속에서 직설적으로 사회학적 인식이나 건강한 전망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 작품을 상업적인 혹은 가벼운 혹은 실패한 서사로 매도하는지. ‘건강한 사회학적 주제’에 대한 편향, ‘중단편’에 대한 편향, ‘고전적 소설 작법’에 대한 편향, ‘계몽적 지사적 엄숙주의’에 대한 편향이 너무 심대한 것은 아닌지. 원 이렇게 고루한 양반들이 어떻게 문학을 하겠다는 건가, TV 시사다큐나 볼 일이지, 싶을 때가 있다. 건전한 정신엔 우둔의 악취가 풍긴다, 는 쿤데라의 말로 위안 삼을 때가 종종 있다.

5

지금까지 불만을 털어놓는 어투로 우리 소설이 처한 현실을 말했지만, 그런데 말해놓고 나니 다름 아닌 내가, 그리고 우리 젊은 작가들이 가야 할 길이다. 모두들 문제에 공감해도 그러나 아무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것이 모든 시대의 기성세대 모습이다. 더구나 문학사는 언제나 젊은 작가들이 스스로의 작품으로 바꿔 가는 길밖에 없었다.

나의 미약한 역량이 이 같은 요구를 얼마나 성취할 수 있을까.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켜고 앉으면 한 글자 한 글자가 막막해지면서, 건너야 할 길은 4차선 아스팔트길인데 더듬이는 겨우 작은 돌멩이 하나를 조심스럽고도 분주히 더듬고 있는 벌레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소설을 찾아 힘겹게 헤매고 있을 등단 혹은 미등단의 젊은 작가들에게 진심으로 동병상련의 애정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