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뷔토르(1926~ )는 알랭 로브-그리예와 함께 누보로망의 기수 역할을 한 작가로서 현재까지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형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문제들을 천착해 나간 누보로망의 대표적 작가로서 시작했던 뷔토르는, 첫 소설 『밀랑의 통로』(1954) 이후 백이십여 권에 이르는 책을 출판하였으며, 그 장르도 초기의 소설뿐 아니라 시, 비평적 에세이 등 문학, 음악, 미술, 여행, 전기 등 글쓰기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장편소설 『변경』(1957)은 ‘르노도상’의 수상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로부터도 호응을 받으며 누보로망을 대중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것은 이 소설이 전통적 심리 분석 소설의 틀을 차용하면서 새로운 형식적 기법들을 실험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당시 발표된 누보로망 소설들의 난해한 독서에 비해 다소 용이하게 접근하면서 새로운 독서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21시간 35분이라는 기차 여행 동안 ‘당신’이라 불리는 주인공의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을 통해 인지되는 현재의 모든 것에 대한 언급, 또 그것들이 실마리가 되어 회상되는 이십여 년에 걸친 ‘당신’의 과거, 그리고 이 여행의 결과로 다가올 ‘당신’의 장밋빛 미래를 그려보느라 오락가락 하는 ‘당신’의 머리속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파리에 사는 한 중년 남자가 아내와 자식들과의 가정생활에서 느낀 불만과 환멸을, 또 자신을 점차 타락시키고 소모시킬 뿐인 직업에 대한 자기 소외를 보상하고자 여행을 떠났다. 즉 로마에 있는 젊은 연인을 파리로 데려와 새로운 인생을, 로마의 사랑을 재현하고자 하는 꿈을 실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비르길리우스의 신화적 영웅 아이네아스가 로마의 영광을 탄생시켰던 행적과도 비견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행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총체적인 내적 탐색의 결과, 최초의 결심을 포기하고 만다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뒤엉켜 있는 ‘당신’의 일상적 삶의 혼돈이 한올 한올 풀려져 나감에 따라, ‘당신’이 자신의 진면목을 깨달아 가는 그 과정으로, 바로 서술 과정 그 자체이다. 제목에 의해 예고된 이 ‘변경’이라는 주제는 소설의 서술 과정에서 생기는 결과물일 뿐이다. ‘당신’이라는 2인칭의 사용,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인식의 과정을 드러내기 위한 현재 시제의 사용, 사물이나 인물에 대한 미세한 묘사들, 독자에게 마치 퍼즐 게임을 제안하듯 과거와 미래의 다양한 시간대를 오가는 시간의 사용, 다양한 나이와 직업과 계층을 보여주는 승객들과 그들의 소유물을 중심으로 ‘당신’이 꾸며보는 허구의 이야기, 즉 소설 창작의 매커니즘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허구의 이야기 또한 바로 ‘당신’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하는 계기로 쓰인다. 뷔토르는 소설이란 구구절절 모든 것을 집어넣을 수 있는 그 ‘통합능력’을 통해 현대인의 복잡한 내적, 외적 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바로 그 총체적 현실 파악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인식의 도구’라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고대 영웅 신화의 환상을 꿈꾸던 현대의 소시민이 환상에서 깨어나 자기 현실의 인식에 도달하는 ‘변경’이란 주제를 소설의 기법 자체를 통해 그려 보이고 있는 이 소설은, 고대의 영웅적 시대로부터 현대의 소시민의 시대로 변경된 우리 현실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드러내는 소설이자, 서사시에서 소설로 변경되는 장르 자체에 대한 소설이다. 따라서 이 소설 자체는 ‘과거의 책’으로부터 ‘오늘의 책’이 탄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미래의 책’이 제시된다. 즉 과거 책에 대한 비평 작업에 근거해 새로운 형태의 창작이 이루어진다는 변증법적 역동성은 이제 독자를 통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뷔토르가 제안하는 ‘독자의 글쓰기’로의 초대인 것이다.
이렇듯 이 소설은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통해 전통소설의 인물과 이야기 중심에서 벗어나 어떻게 서술 자체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지를 보여주었던 것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삶을 신화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해보고자 하는 내용적 측면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소설 그 자체의 매커니즘과 의미를 반성하고 있으며 독자의 글쓰기로 연결시킨다는 점 등으로, 누보로망의 특징들을 잘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자, 뷔토르의 문학적 핵심 문제들이 집약적으로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