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이 교차한 동랑(東朗) 유치진(柳致眞)의 예순아홉 해 삶은 사회적인 공헌과 명망이 높았던 사람일수록 정치적 염결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던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단적으로 표상하고 있다. 동랑이 없는 한국 현대 희곡사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바로 그만큼의 비중을 가지고 일제에 협력할 것을 요구, 혹은 강요받았고 동랑은 당시 대부분의 지도층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다. 일제 말의 강팍한 상황에 눈 감은 채 그 잘못을 오로지 동랑 개인의 것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가 되겠지만 대표적인 친일반민족 인사 이용구를 찬양한 「북진대」를 비롯한 「흑룡강」, 「대추나무」 등의 친일희곡과 다수의 친일 성향 칼럼을 발표하고 일제 말의 대표적인 친일극단인 현대극장 발족에 앞장 선 그의 행적을 순전히 상황 논리만으로 이해하기에는 주저함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친일 행각을 이유로 그가 연극계에 끼친 공적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문학적 업적 때문에 그의 친일을 눈감아주자는 주장만큼이나 공정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1930년대의 극예술연구회 창립을 시작으로 해방 후 극예술협회 창립, 초대 국립극장장 역임, 드라마센터와 산하의 한국연극아카데미 건립, 한국연극아카데미의 서울예대로의 확대 발전으로 이어지는 그의 연극 인생은 그 자체가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그대로의 한국 현대 연극사였고 그의 넓은 품 안에서 이해랑, 함세덕, 차범석, 임영웅, 오태석, 장민호, 김동원, 백성희 등 한국 연극계의 주역들이 보살핌을 받았다.
유치진은 1905년 경남 통영에서 한의사였던 부친 유준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잘 알려진 대로 시인 유치환이 그의 친동생이다. 3·1 운동 직후 도일하여 도야마(豊山)중학과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연극 운동에 뛰어들었다. 「토막」 「소」 「자명고」 「원술랑」 「나도 인간이 되련다」 「한강은 흐른다」 등 아직까지도 한국 희곡계의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들을 다수 남겼고 1974년 고혈압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고향 통영은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예향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시인 김춘수 김상옥, 소설가 박경리,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등이 유치진과 동향이다. 시인 김지하 최하림, 소설가 박화성, 극작가 김우진 차범석 등이 태어나고 소설가 김은국 최인훈, 평론가 김현, 화가 김환기 등이 성장기를 보낸 호남의 라이벌 도시 목포에 비견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