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시작된다. 비밀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시작되기 전 단서가 붙는 것이다. 너니까 하는 말인데, 정말이지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와 같은. J군의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듯 단서가 먼저였다. 녀석은 “형 시간 있어요?”란 말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녀석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딘가 초췌해 보이는 얼굴. 녀석을 찬찬히 보고 나니 그 이유가 입술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의 입술 자리에는 붉고 오동통한 평소의 녀석 입술 대신 바짝 마르고 부서지기까지 한 낙엽 하나 매달려 있었다. 거친 것 뿐 아니었고 아랫입술은 기괴하게 부어 있었으며 입가에는 피딱지도 엉겨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날밤을 꼬박 샜을 때 생긴다는 상처. 그래선지 녀석은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고민이 있구나. 순간 나는 그리 직감했다.
“정말 시간 있어요? 아니다. 얘기 안 하는 게 좋겠어. 아, 정말 괴로워 죽겠어요.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냥 얘기할까? 들어 줄래요? 휴, 아니에요. 아무래도 말하지 못하겠어. 진짜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요. 형 슬퍼요. 몹시나. 저 새들은 행복할까요?”
녀석은 그렇게 북을 쳤고 이어 장구를 쳤다. 마치 오래 전부터 다중인격을 지니고 있었던 양 혼자 물었고 또 스스로 대꾸했다. 그런 식으로 도합 3개비의 담배를 태운 다음 녀석은 현관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녀석이, 또 그런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진 나는 순식간에 다시 자란다는 보장만 있다면 머리칼을 몽땅 쥐어뜯고픈 심정이었다. 별안간 목이 마를 지경이었으니.
평소 같았으면 뒤통수를 대차게 후렸을 테지만 나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마른침을 삼킨 다음 침착하게 녀석의 눈동자를 바라봤을 뿐이었다. 현관을 통과한 5월의 햇살이 녀석의 눈동자에 멎었기 때문인가. 뭔가 반짝 빛나는 것이, 녀석은 또 눈물을 흘리려는 모양이었다. 그 날 오후 녀석의 표정은 그렇듯 초조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랬다. 그러니 나로선 참아야 했다. 정말이지 답답했지만 녀석의 뒤통수를 노려볼 수밖에,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방법이 없습니다. 길어야 삼 개월입니다. 의사로부터 그런 말을 듣지 않고서야 절대 지을 수 없는 표정. 녀석의 그런 얼굴을 보고 있자니 치밀어 올랐던 답답함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담배를 태우는 내내 녀석은 한 쪽 다리를 경련하듯 떨어댔고 그 횟수에 비례해 내 마음도 차분해지는 중이었다. 녀석은 무척 슬퍼 보였고, 분명, 우울한 이야기로구나, 나는 다시 직감할 수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족히 80kg은 넘어 보이는 거구인 J군. 하지만 얼굴 생김이며 머리 스타일이 워낙에 어린애 같은 까닭에 몸집으로 치면야 바윗돌처럼 느껴져야 했지만 실제 그렇지는 않았다. 뭐랄까, 얼굴 생김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목소리도 나긋하고 성격 역시 소녀다운 구석이 있었으니 곧잘 눈물을 보이기도 하지 않나. 때문에 나는 녀석을 볼 때마다 바윗돌 같은 것은 상상치 못했다. 거대한 두부 같다는 느낌(아마도 그것이 정확한 느낌일 것이다), 나로선 그런 느낌이 전부였다. 내 대학 후배인 J군. 녀석은 그렇게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녀석이었다.
“혜선이 누나랑 헤어졌어요.”
급기야 터져 나온 녀석의 한마디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되려 안심했다. 시원한 음료수를 들이킨 것만 같았다. 고작 그거였단 말이더냐.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래 알았다 말이지. 심도 있는 대화로다가 문제를 풀어보자꾸나. 형이 다 들어줄게. 연이은 생각이 그렇듯 일사천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서였다. 그래서 나는 녀석에게 경쾌하게 물을 수 있었다.
“왜 니가 싫어졌다더냐?”
“아뇨.”
“그럼, 나이며 사회적 위치며, 그런 것들 따져봤을 때, 영 갑갑하다디? 그러니까 말이다 사랑하지만 우린 어울리지 않아요 같은, 유행가 후렴을 사정없이 읊는 뭐 그런 거더냐?”
“아니에요.”
“그럼 뭔데?”
“몰라요.”
“왜 몰라 임마!”
“말을 안하니까요.”
그렇게 대답한 다음 녀석은 고개를 푹 숙였다. 녀석의 옹크린 등을 보고 있노라니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난 두부가 떠올랐다.
J군에게 문제의 혜선 누나를 소개시켜 준 장본인은 같은 과 4학년의 P양이었다. P양은 평소 2학년인 J군을 막내 남동생 대하듯 아껴 줬다. 참말 누이처럼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도 많아서 서로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실제 둘은 꽤 친해진 듯 보였다. 한데 후에 P양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애초에 J군은 혜선 누나의 짝이 아니었다고 했다. P양은 그저 사랑하던 애인과 헤어지고 난 후 상심과 무료함에 빠져 있는 자신의 친구(문제의 혜선 누나다)에게 기분전환의 묘약을 선사하고팠을 뿐이었다고 했다. P양은 내게 실로 오랜만인 친구와의 조우 자리에 J군을 데리고 나가기로 했을 뿐 다른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강조했다. 평소 P양의 행실로 보자면 아마도 산책길에 개 한 마리 끌고 나가는 기분으로 그랬을 것이 뻔했다. 착하고 귀엽고 예쁘장한 개 한 마리는 어여쁜 남동생 뭐 그런 것 아니겠나. 역시나 두부처럼 말랑말랑한 J군을 보고 있노라면 애완견이 그렇듯 누구든 기분 좋아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한데 말이다, J군은 그것이 이를테면 소개팅 같은 것인 줄 알고 바짝 긴장했고 그것이 문제의 시작이 된 것 아닌가. 게다가 아뿔싸, 혜진 누나란 사람도 전화번호까지 건네며 그와 유사한 분위기를 이끌었으니 종국엔 바싹 마른 들판에 바람은 솔솔 부는데 그 위에 기름 붓고 불 댕긴 꼴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애초부터 알고 있었던 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 다음 그 모두를 녀석에게 일러주리라 마음먹었다. 솔직히 내 첫 느낌은 애초부터 ‘내 그럴 줄 알았어’였다.
“실은 그런 거였다. 난 그럴 줄 알았어. 원래 말이다 좀 사귀던 연인과 헤어지면 말이다 속이 허해지거든. 두 끼 굶고 삽질하는 느낌. 배도 고프고 자기 자신도 애처로워지고 그런 거지. 걘 그랬을 거야. 그냥 허한 마음 달래려 했던 건데 네 놈이 심각하게 나오니까 부담이 목구멍까지 찼을 테고 아아 저 어린 녀석에게 더 이상 상처 주면 내가 천벌을 받겠구나 끝내 그런 생각 드니까 미안하다 헤어지자 그런 거 아니겠니. 그러니까 어쩌겠냐.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무슨 섭섭한 말씀을요, 절대로 아닙니다 누님, 저도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었어요, 우리 좋은 추억을 저 높이 하늘나라까지 싸고 가 보아요, 뭐 이렇게 덤덤하게 나가란 말씀이시지. 형 생각은 그렇다. 그게 답이야.”
유쾌하자고 한 얘기였는데, 물론 한편으로는 냉정한 정답이기도 했지만서도, 어찌됐든 그랬더니 녀석은 눈에 심지를 켜고는 나를 노려봤다. 단박에라도 달려들 기세로.
“형이 뭘 알아요?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린 말이죠 진짜 사랑했다구요.”
곧 원점이 되고 말았다. 진짜 사랑했다는데 이를 어쩌겠는가. 나는 나도 모르게 차렷 자세로 한참을 서 있기만 했다. 그런 다음 녀석의 손을 잡았는데, 녀석이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알아요 형. 진짜 처음엔 그렇게 만났어요. 그런 다음 한참 잊고 있었죠. 그런데 전화가 왔어요. 전화를 먼저 건 쪽도 혜선 누나였다구요. 그 누나 회사 다니는 건 형도 알죠? 가끔씩 힘들다면서 절 부르더라구요. 그럴 때마다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그랬죠. 그렇게 두 달쯤 지났나, 우리 한 번 진지하게 만나보자는 말, 그 놈의 말도 실은 누나가 먼저 했다구요. 저도 싫진 않았으니까 그러자 했죠. 시작은 그랬어요.”
그랬다. 밥 먹고 술 마시다가 손도 잡아보고 그러다 보니 전화 통화량 늘게 되고 뭐하고 있었어? 자기 생각하고 있었어, 아이 참 나도 그랬는데, 하면서 까르르 웃다가 뭐 그런 식으로 누구나 애인 되는 거 아닌가. 녀석과 그 혜선 누나란 친구는 이 땅 일천만 연인들이 그렇듯 그 알콩달콩한 길을 참말 걸은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냐.
“그럼 뭐가 문제야?”
“억울해요.”
“못 잊어서?”
“아뇨, 잊었어요. 잘 가라지.”
“그럼 뭐가 억울한데.”
“키스 했거든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나쁜 놈! 키스했다고 억울하다니 선배를 놀리려는 참인가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뽀뽀를 한 게 어째서 억울한 일인지 내겐 설명이 필요했다. 그에 대해 녀석은 이렇게 대꾸했다.
“그건 이를테면 칼에 찔린 것과 같으니까요.”
그날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어느덧 둘의 아지트가 되어버린 홍대 앞 카페 홀(the Hole). 파티션이 테이블마다 야무지게 쳐 있는 그곳은 갓 1백 일을 넘긴 풋내기 연인의 역사적 장소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두 눈을 감은 혜선 누나. 순박한 J군의 말랑말랑한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려놓더니 덥썩 입술을 깨물었다. 흠칫 놀란 J군 첫 반응 행동은 양 손을 어디다 놓아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멍한 기분으로, 조금은 막막하고 애매모호한 그 기분도 잠시, 이내 이어지는 다양한 액션들. 그렇게 이것이 뽀뽀로구나 하던 사이 혜선 누나의 혀는 사전 포고도 없이 침묵한 채 녀석의 입 안으로(물론 하얀 앞니를 살짝 스치면서) 쏙 들어왔고 급기야 J군은 가슴팍에까지 힘을 콱 자세 그대로 경직되고 말았다. 그리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세레나데. 아아, 이번엔 키스로구나. 대부분의 키스 초보자들이 그렇듯 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것에 열중했다. 카페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첫 키스인데 신경이나 쓰일쏘냐. 그렇게 30분, 아니 1시간. 입을 떼고 보니 2시간이 지났던 것이었다. 탱탱했던 태양이 훌쩍 사라져 버렸다나 어쨌다나.
“입술에 쥐 안 나디? 두 시간이라니.”
“그냥 얼얼할 정도였어요.”
“두 시간 동안, 그러니까, 이렇게 앉아 있었을 거 아냐. 체위가 나오냐? 두 시간 분량의?”
“지금 생각해보니 좀 쪽팔리긴 해요. 카페에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내 듣기에는 한없이 웃긴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녀석은 연신 진지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보니 옛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내 경험에 정직히 비춰보자면 첫 뽀뽀 초기 단계를 살짝 넘으면 그러니까 입맞춤의 그 오묘한 매력을 알게 되면 말이다 매 순간 그것이 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헌데 혜선 누나로 치자면 애인과 헤어졌으니 적당한 상대가 필요했겠지. 그도 아니라면 훗날을 위해, 키스란 것은 팔뚝에 대고 암만 연습해 봐야 느는 것이 아니므로 모종의 실습재료가 필요했던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혜선 누나란 친구 너무한 것 아닌가.’
하나 나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이제와 어찌됐든 여린 내 후배는 이상한 이유로 22년간 지켜온 입술을 빼앗긴 셈이었으니 그런 말이 뭐 필요하랴. 녀석을 다독이는 것이 우선이었다.
혜선 누나는 그 장구한 입맞춤을 마치고 나서 “미안해 갈게”라 말했다 하는데 순박한 J군의 귀에는 그 말이 마치 “자 이정도로 해줬으니 이제 헤어져!”처럼 들렸다 했다. 그랬다. J군으로 치면 필시 웃을 일이 아니었다. 나라도 그랬겠지.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조급해진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순간 녀석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칼에 찔린 것 같아서, 너무 아파서 움직이질 못했어요.”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질리도록 입맞춤을 한 다음 훌쩍 달아난 것일까. 가여운 내 후배에게 그리 얼토당토 않은 첫 키스의 기억을 남긴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내 생각이야 어떻든 J군의 가슴팍에는 또 입술 어딘가에는 여전히 피가 솟구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녀석은 조금도 나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나는,
“입술로 사랑하는 여자였나 보다. 자신의 모든 걸 네게 주고 떠나고 싶었던 게지 아마. 아름답구나. 그리 생각하고 잊어라.”
라고만 했다. 한데 녀석은 또 그 혜선 누나 걱정 먼저 하는 것 아닌가.
“첫 키스는 너무 아파요. 혜선 누나도 첫 키스였을 텐데 얼마나 아플까요.”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글쎄다 그리 잘 한다면 필시 처음은 아닐 게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그래 아플 거다. 그 칼은 양날로 되어 있거든. 키스.”
라고만 대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의 J군은 눈을 감았다. 나는 J군의 곁에서 썩썩 입맛을 다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