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구모룡_평론가,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1959년생. 평론집 『문학과 근대성의 경험』 『제유의 시학』 등
시인 김성식(金盛式, 1942～2002)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재작년 타계하기까지 그는 줄곧 우리 문학에서 하위양식에 속하는 해양시를 써왔다. 그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0년 말 승선 중에 투고한 시 ｢淸津港｣이『조선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난 이후이다. 1977년 첫 시집 『淸津港』을 출간한 이래 2000년 하선하기까지 4권의 시집을 발간하는 동안 그는 한결같이 시작과 항해를 병행하였다.
김성식의 시를 두고 ‘본격적인 해양시의 효시’라 자리매김한 이는 전봉건이다. 해양시가 근대적 표상으로 바다가 형상화된 것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말할 것도 없이 한국 해양시의 효시는 최남선의 ｢海에게서 少年에게｣이다. 이 시에서 바다는 육지의 끝에 있는 물의 영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내륙의 시점에서 보이는 완상 대상도 아니다. 이는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표상시스템에 투영되어 발견된 풍경’이다. 이처럼 근대적 표상공간으로 발견된 바다 풍경은 김기림 등의 모더니스트들의 시에서 근대적 세계를 나타내는 기표로 동원된다. 가령 김기림의 ｢파랑 港口｣는 항구를 매개로 근대세계의 지리학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근대 지정지리학으로 바다 혹은 해양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전봉건은 해양 체험의 관점에서 김성식의 시를 본격적인 해양시의 효시라 규정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해양시의 중심은 해양 체험을 형상화한 시에 있다. 김성식의 시적 원천은 근대해양이다. 그런데 근대세계로서의 해양과 시적 대상으로서의 해양은 상호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해양은 오디세우스의 모험에서 보았듯이 근대의 목표에 도달하게 하는 토대인 동시에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 이러한 이중성은 곧 시와 근대의 이중성에 상응한다. 김성식의 해양시도 이러한 이중성에서 산출된다. 그는 그의 시쓰기를 일러 “바다보다 큰 허무 속에 잠겨 있는 절망을 길어 올리는 것”이라 하였다.
첫 시집 『淸津港』에 가장 먼저 실려 있는 시는 ｢出港｣ 연작 2편이다. 편집 의도에 따라 배치되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이들의 주된 내용은 아침 이미지와 바다 이미지에 기댄 출항의 건강함이다. 이러한 건강함은 미지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대에서 유발된다. 만일 삶의 현실적 조건에 의해 피할 수 없게 된 출항이라면 비애와 원망이 주조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시의 출항에서 삶의 곤고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밖으로 펼쳐진 세계를 향한 갈망이 강렬하다.
앵커를 올려라 닻을 감아 / 五六島 너머 水平線을 / 불끈 들어 일어서는 / 太陽쪽으로 / 윈드라스 레바를 힘껏 눌러 눌러 / 무거운 닻줄 감아 / 떠나자 船首를 돌려 떠나 / 거리의 창문마다 무늬진 햇살 / 골목길 개구쟁이 입술에서 / 묻어 나온 알사탕의 꿈 / 아내의 행주치마에 젖어 있던 / 짭짤한 생활을 뒤에 두고 / 거침없이 소리치며 흔들리는 / 물결 따라 / 여기 / 솟아오른 시뻘건 불덩어리를 / 선창 가득 실어 / 에메랄드 삶아 뿌려 논 / 카리브 / 전설이 녹아 소금이 된 / 地中海 / 달이 흘린 눈물로 / 파르르 떨고 있는 / 赤道를 향해 / 청동빛 팔뚝을 걷어 / 꿈틀대는 푸른 힘줄을 / 햇빛에 구워 또 구워 / 힘의 大洋을 힘을 내세워 / 펄펄 살아 뛰는 / 바다를 잡으러 / 풀무질 쳐 뜨거워진 / 가슴의 근육 / 狂風에 내 맡기러 / 메인 마스트에 소리치던 / 出港旗가 부풀기 전에 / 닻을 감아라 앵커를 올려 / 물살 헤쳐 / 돋아나는 太陽을 향해 / 윈드라스 레바를 / 힘차게 잡아 / 잡아 당겨라 (｢出港 Ⅱ｣)
이처럼 이 시에서 보이는 출항은 낭만적이다. 지금-이곳의 현실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의식의 지향이 강렬하다. 달리 아침의 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을 이러한 의식지향은 안과 밖의 이분법에서 밖에 가치를 부여하는 시점을 보인다. 그래서 현실의 인연과 생활을 ‘거침없이’ 뒤로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바다는 시적 화자의 일상과 생활의 안온함을 포기하게 하는 견인력을 지녔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이러한 바다의 힘에 이끌려 가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이끌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잡겠다는 의지가 있다. 이 시에서 이러한 의지의 원천은 다만 미지 세계 혹은 대양이 이끄는 힘으로 표현된다. 이를 좀더 구체화하면 시적 화자가 삶의 본래 터전보다 바깥의 세계에 가치를 두는 상상적 지리학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