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철 _ 평론가, 연세대 국문과 교수. 1951년생. 평론집 『국문학을넘어서』 『문학 속의 파시즘』 『바로잡은 “무정”』 등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감각이 한껏 열려 있는 10대와 20대. 그 시절에 즐겨 들었던 음악이나 깊이 심취했던 책의 구절들은 나이가 들어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70년대 학생 시절 유행하던 팝송이 큰 소리로 흘러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요컨대 ‘흘러간 팝송’을 여섯 장이나 되는 CD에 담아 ‘단돈 만원’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걸핏하면 싸구려 물건을 ‘충동구매’하는 버릇 때문에 늘 식구들의 지청구를 면치 못하는 신세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시 그 충동에 몸을 맡겼다. 연구실의 작은 오디오에 걸어 놓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흥얼 속으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누구나 그런 경우가 있겠지만, 자신만의 특별한 추억들을 상기시키는 어떤 노래들에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회상에 잠겨 보는 것도 그런대로 쏠쏠한 재미였다.
그런데 놀랍고도 흥미로운 사실은, 주로 70년대에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행하던 1백여 곡이 넘는 이 팝송들의 거의 대부분이 내가 그 일부 혹은 전부를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내 귀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들을 때 옛집에 돌아 온 듯한, 혹은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갑고도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해 주는 내 청각의 깊은 기억들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래했다는 깨달음 앞에서 뭔가 난처함을 느꼈던 것은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내 문화적 감각의 상당 부분의 기원이 ‘이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 아무래도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은 없다. 연구년으로 미국에 작년 일 년간 머물고 있을 때였다. 몇십 년 전에 방영되던 인기 드라마를 여전히 틀어주는 TV 채널에서, <보난자 Bonanza>, <전투 Combat>, <아이 러브 루시 I love Lucy> 등등의 흑백 영화들을 접하는 순간, 까맣게 잊었던 정다웠던 친구를 길 가다가 만난 듯한 놀라움과 반가움을 느꼈다. 그 영화들은 내 눈 앞에 나의 어린 시절을 순식간에 끌어당겨다 놓는 것이었다. 미국식 생활과 풍요에 대한 한없는 선망과 동경으로 가득 찼던 제 삼세계 ‘할리우드 키드’의 한 전형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은 그 반가움이 일단 가라앉고 난 뒤의 일이었다.
이런 사례들은 아주 많다. 서양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너무나도 눈에 익은 명화들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작품들을 즐긴다기보다는 기억 저편에 가라앉은 학생 시절 ‘미술 교과서’ 안의 사진들을 환기하고 있는 나 자신을 깨닫곤 한다. 물론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문화적 감각들의 기원은 미국이나 유럽만이 아니다. 도시든 농촌이든 한국에서는 이제 겨우 삼사십 년 안쪽의 옛집들이나 골목길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예전에 보던 그런 골목길 풍경이나 소도시의 거리들은 일본에 가면 지금도 심심치 않게 만난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풍경들의 기원은 알고 보면 일본이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그 풍경들을 마주칠 때 느끼는 낯익은 반가움 또한 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의 문화적 소양의 ‘서양적’ 혹은 ‘외래적’ 기원을 특별히 한탄하거나 비감해 할 필요는 없다. 기원이란 언제나 불투명한 것이며, 기원의 순결성이나 단일성에 대한 집착 또한 무의미하고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몇 년 전에 FM 라디오의 국악 프로에서 우연히 고(故) 김월하 씨의 시창(詩唱) <관산융마(關山戎馬)>를 듣다가, 마치 차가운 물이 머리 위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고 그 이후 틈만 나면 즐겨듣는 곡목의 하나로 삼았거니와, 그것은 이 노래가 이른바 ‘우리 것’이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 문화적 감각의 서양적 기원에 대한 보상 심리의 결과였던 것도 아니었다. 한때 유행했던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라는 광고 카피의 비논리성과 반문화적 선동성을 나는 극히 혐오하거니와, 위의 <관산융마>의 경우에도 그 기원이나 유래와는 상관없이(아마도 굳이 정색하고 기원을 따지자면 그것은 ‘중국’ 쪽일 것이다), 그 소리의 유현(幽玄)함이 사람을 뒤흔드는 바는 가령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그것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임을 나는 자신한다.
내 안에 있는 다양한 정체성과 혼종성(混種性)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아’를 인식하는 시선이 열린다. 기원의 순수성과 단일성에 대한 무지에 가득 찬 집착과 강박이 타자에 대한 폭력과 억압을 낳고 문화의 저열화를 초래한 사례는 예나 지금이나 숱하게 많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리어왕의 이 비통한 절규는 확고한 주체의 단일성에 대한 신념이 산산이 깨져나가는 사태에 직면한 인간이 내뱉는 최초의 성찰의 언어일 것이다. 이 사태 앞에서 나는, 그리고 당신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른바 ‘문화’와 ‘예술’이 응답해야 할 곳은 바로 그곳이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