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우연이었을까. 꽃눈이 만발한 봄날 동구능, 사능을 지나 덕소에 이르는 샛길을 몇 번 어슬렁거린 적이 있다. 사능을 지나면서 문득 소용돌이치던 해방공간 몇 년을 불안과 우울, 참회와 비탄으로 회한에 젖어 살았을 이광수의 내면을 반추했다. 한때 나는 그를 격렬하게 부정한 적이 있지만, 최근 몇 년간, 그리고 지금은, 그의 변명과 거역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친일까지를 포함하여, 더 깊이 있는 독서의 대상으로 회귀하고 있다(그러나 이광수의 친일이 정당했다는 뜻은 아니며, 나아가 다른 친일, 가짜일지도 모르는 삶 따로, 글 따로인 수상한 문인들을 이해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여전히 친일부역자, 유신 찬양과 기생, 5공․6공의 정치적 쇼에 부역한 들쥐 같은 문인들을 잘 알고 있으며 혐오한다. 그들의 많은 수는 여전히 팔색조의 가면을 쓰고 수상한 창작활동과 심지어 원로라는 이름으로 활개하기도 한다. 오호! 여전히 가엾고 가난한 한국문단!). 왜 그 길이 생각난 것인지 모르지만, 며칠 전에도 무작정 집을 나서 수락산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가 예의 그 길로 들어선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일이 있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그것이 친교나 호기심보다는 뿌리깊은 내 그림자의 무엇으로 휘장을 드리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지금 한 분의 작가를 찾아가야 될 처지가 되었다. 문제는 내가 그 분과 그 분의 문학을 잘 알지 못한다는 데도 있었지만, 만남에 대한 그 어색함과 낯섬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곤혹스러움이 더 큰 것이었다고 말해야 아마 옳을 것이다. 최근 이광수 전집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천천히, 곱씹듯 읽으면서 느낀 복잡한 심경이 그런 나의 내면과 관련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긴 하지만 이광수와 그의 문학이 잠자고 있던 내 밑바닥의 앙금들을 요동치게 하면서 마침내는 한국 문학장과 작가들을 다시 상기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여튼 결례를 무릅쓰고 나는 전자우편을 통해 그 어색함을 대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유현종 선생은 최근 소설 관련협회나 특히 고구려 관계 문제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분주하신 듯했다. 주목할 것은 이제부터야말로 ‘자신만의’ 작품을 쓰겠다는 강렬한 의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내게도 몇 생각을 하게 했다. 곧바로 나는 동학을 소재로 한 장편 『들불』로 잘 알려져 있는 선생에게, 선생의 그 문학적 재능과 열정을 여러 연재소설로 혹시 탕진한(?) 것이 아쉽지는 않은지를 묻고 싶은 생각이 목울대까지 올라왔으나 차마 그것을 말머리로 꺼낼 수는 없었다. 과거에 유 선생의 신문연재소설을 가끔 읽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내 이미지 속에 선생은 끊임없이 쓰는 작가였지만, 그것만큼의 보람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최인호를 떠올렸다. 외람되게도 재능의 탕진은 작가적 회한을 낳겠지만, 한 사람의 독자에게도 똑같은 감정을 잉태하게 한다.

  선생의 문학적 편력을 들춰보면 작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선생은 중2 때 부친의 직장 관계로 전주에서 익산(이리) 마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집주인 아주머니가 건네준 채만식의 「옥랑사」 등의 소설책을 받게 된다. 후일 안 것이지만 그 분이 채만식의 미망인이며, 그 집이 채만식이 살다 임종한 집이라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 영향은 운명처럼 선생의 삶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길이 되었을 터이다.

  그것은 선생을 한국문학과 문단의 중심지였으며 우스개 소리로 ‘문학기능공 양성소’라 불렸던 서라벌예대 문창과로 자연스럽게 이끄는 촉매가 되게 한다. 선생이 그 울타리 안에 들어갔을 때는 천승세, 김민부, 박종승 등이 이미 등단한 상태였고 송상옥, 김주영, 백인빈 등 기라성 같은 예비 작가들이 또한 포진하고 있었다. 그때 선생이 맞닥뜨린 그 공간과 시간의 흔적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한국 현대문학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말하자면 선생이 1972년 야심적으로 한국 문학장에 던진 『들불』은 그런 문학적 자장의 한 개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적이며 민중적인 메시지, 전라도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을 그 행간을 흐르는 강한 판소리 사설조의 리듬 의식은 선생을 여타의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변별하게 만드는 주요한 키워드가 된다. 선생은 그 문제의식을 소위 역사소설이라고 말하는 『연개소문』이나 『고선지』 등의 신문연재에 무려 30년 가까이 할애했다. 나는 이 국면에서 어떤 판단도 유보하기로 했다. 그 대신 ‘이제야 나는 연재소설에서 해방되어 쓰고 싶은 소설만 쓰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육십이 넘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요즘은 행복하다. 인기가 없어도 돈을 벌지 못해도 쓰고 싶은 소설만 쓰니 행복한 것이다. 최근에 쓴 『두고 온 헌사』나 『줄서기』 혹은 단편 「햄릿의 고백」등이 그런 작품이다. 늦었지만 진정한 내 독자들을 위해 멋진 작품을 남기겠노라 약속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선생의 회한어린 언술의 행간 속에서 글을 읽을 독자의 해석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더 지배했다. 내가 보기에도 『두고 온 헌사』의 글 마디들 속에는 작가의 진정성이 스며있는 듯 했다. 베트남을 소재로 하고 있는 그 소설은 문학의 뿌리깊은 주제인 비극적 운명에 처한 한 인간의 처연하면서도 고단한 삶에 관한 기록과 관계한다.

  최근 선생은 글쓰기에 대해 어떤 신념을 강하게 가지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글을 쓸 시간과 에너지가 별로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어떤 자각에서 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경우에서 나온 신념이라고 하더라도 그 진정성을 선생 나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임에 분명하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선생은 노신의『아큐정전 阿Q正傳』같은 풍자소설을 한편 쓰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 작품을 전범으로 삼을만한 모델로 제시했다. 나는 다시 선생이 소시적 살았던 채만식의 집과의 운명적 인연을 생각했다. 약간 비스듬히 눌러쓴 중절모와 어색한 미소 속에 담겨있을 한 때 부르주아로서의 채만식과, 비참했던 말년을 연결지어 보고자 애를 써보았다. 그렇게 노력을 하면 그럴수록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군산 미두항을 거닐거나, 왜색의 근대적 풍경으로 서서히 단장돼 가던, 분냄새와 살냄새가 진동을 하는 시정 거리를 관찰하며 그 특유의 입담으로 그 현실을 시니컬하게 기록했던 채만식의 문학적 진실이 되살아났다. 그는 식민지 조선의 풍경을 가장 풍자적으로 그려낸 일급의 작가였던 것이다. 나는 노신 보다 채만식으로부터 선생이 감당해야 할 풍자정신의 그 젖줄을 이어받아야 하지 않을까를 주문해 보려다가 그만 멈추어 버렸다. 어떤 경우에도 작가는 스스로의 작가이며, 작가의 길이 고독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