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빌딩과 이순신 장군 동상 사이로 넓게 뚫린 길 세종로를 경복궁 쪽으로 달리다 보면 대개 광화문 앞에서 차를 멈추게 된다. 적선동 방향 좌회전을 기다리는 운전자의 눈앞에 정면으로 우람하게 솟아오른 돌산이 보인다. 인왕산이다. 이 지점에 올 때마다 나는 인왕산에 정신이 팔려 화살표 신호가 나타난 것을 보지 못한다. 뒷 차가 경적을 울릴 때야 깜짝 놀라 가속 페달을 밟는다. 간혹 교통정체로 인하여 도로 한 가운데 오랫동안 정차하는 경우, 으레 짜증이 나게 마련이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쩌다 청와대 손님의 행차 때문에 이 지점에 서 있게 되면, 나는 오히려 행복해지기도 한다. 인왕산의 앞모습을 이렇게 정면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기 때문이다.
하기는 이 곳 말고도 또 있다. 동십자각에서 삼청동 길로 접어드는 삼거리의 경복궁 출입문으로 들어가 국립박물관 쪽으로 근정전 앞뜰을 가로질러 걸어가면, 인왕산의 장엄한 모습에 압도당한다. 특히 해질 녘의 스카이라인이 일품이다.
또 하나의 비밀을 말해도 될까. 삼청동 길가의 건물들 위층에 있는 카페나 층계참 창문으로 바라보아도 인왕산, 북악산, 경복궁의 일부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서울의 사대문 안에서 아마 가장 전망 좋은 장소들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곳에서 지난 봄에 두 차례 시를 사랑하는 모임에 초대받았는데, 나는 옛날에 쓴 시 「인왕산」을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때 그 가슴에 호랑이를 기르고 / 한양 도읍 오백 년 산자락에 펼치고 / 서울의 슬픔과 기쁨 / 소꿉장난처럼 내려다보던 / 장엄한 인왕산/ 아득한 할아버지의 고향 / 어린 날 올라가고 싶었던 / 헌칠한 미끄럼 바위(…)”
실제로 나는 인왕산 아래서 태어나 통인동의 한 오래된 기와집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대청마루 뒷문을 가득 채운 인왕산을 나는 10년 동안 바라보며 자랐다. 매우 병약했으므로, 산에 올라가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안개가 짙게 끼어 산이 보이지 않을 때는 공연히 마음이 불안해지기도 했다. 6·25 때는 미군 무스탕 전투기가 인왕산 중턱까지 저공비행을 하며 인민군의 대공진지를 폭격했다. 인민군의 폭사 장면도 더러 보았고, 마침내 우리집마저 함포사격으로 대청이 폭삭 주저앉았다. 유년 시절에 인왕산은 내 동경의 대상이었고, 소년 시절에는 전쟁의 현장이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산에 자주 올라갔다. 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아침마다 올라가서 계곡의 찬물에 목욕을 하기도 했다. 이 산을 떠난 지 어느새 40여년이 지났지만, 산을 좋아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1975년 문학 계간지 『문학과지성』 여름호에 발표한 나의 데뷔작 4편 가운데 하나가 산을 소재로 쓴 시 「영산(靈山)」이었다. 이 작품에서 나는 당시의 시류와 달리 난삽한 메타포의 빈번한 사용이나 구문의 자의적 파괴를 되도록 피하고, 지금 이곳의 현실을 진솔한 언어로 그려 보고자 시도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성공하기 힘들다. 운 좋게 독자의 공감을 얻어 수용된다 해도, 그 작품에 대한 모범답안 같은 해석은 불가능하다. 「영산」의 경우, 이 산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또는 있다가 없다가 하기도 한다. 무미건조할 만큼 의도적인 산문으로 서술된 「영산」이 지극히 애매모호한 형상을 보여 주는데도, 동양이나 서양의 독자가 똑같이 이 시에 주목하는 까닭은 바로 이 쉬운 시의 다의성 때문일 것이다. 꿈과 삶, 이상과 현실, 자아와 세계, 신비와 범속, 자연과 인공, 문학과 사회…… 그 어느 것을 여기에 대입해도 성립되는 보편적 존재의 원형을 형상화했다고 할까. 이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정작 육안으로 볼 수 없고, 등산화를 신고 올라 갈 수 없는 이 산의 유무(有無)는 나의 시학(詩學)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영산」은 나의 시집 여러 곳에서 ‘크낙산’으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흔히 창작을 허구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시의 경우도 텍스트 전체가 서정적 자아의 직접적인 고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도 픽션이 가능하다. 그러나 허구는 그냥 무엇을 생판 꾸며대는 것이 아니라, 삶과 현실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크낙산’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독자에게 물론 ‘인왕산’을 가리킬 수는 없다. 하지만 인왕산을 바라보면, 돌아가신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르고, 돌아갈 수 없는 유년시절이 생각나고, 그 산이 변함없이 그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용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