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 문화예술계에는 문학을 포함한 순수음악, 미술 등 ‘기초예술 살리기’가 주요 의제로 거론됐다. 한국예술인총연합(예총),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등 국내 주요 문화예술단체들이 지난 4월 2일 대학로에서 ‘기초예술살리기 범문화예술인 연대’를 출범시키면서 그동안 논의돼온 ‘기초예술 살리기’ 운동을 본격화했다.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은 여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지난 4월 12일 주요 정책현안을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보고하면서 ‘문화예술 활성화’를 올해 중점사업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이를 위해 ▲문학잡지에 게재되는 원고료를 정부가 지원 ▲문예진흥원을 민간자율의 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 ▲지역문화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문화예술위원회를 올해 시범 운영키로 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다.
특히 이 장관은 2008년까지 문학잡지에 게재되는 작가들의 원고료를 시는 편당 20만원, 산문은 원고지 1장당 3만원씩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문예진흥기금을 통해 문예지를 구입해 무료로 배포해 왔지만 이는 작가들에게 직접적 도움이 못됐다는 것이 개별 작가에 대한 원고료 지원 정책의 추진 배경이다.
이 정책에 따라 내년부터 문예진흥기금과 통합복권 수익금 등에서 15억원 정도의 예산을 확보, 전국에서 발행되는 문예지 10여종을 선정해 시는 편당 10만원, 소설은 원고지 1장당 1만원씩 작가들에게 지원하며, 단계적으로 고료를 높여나가게 된다.
정부의 이런 정책추진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단의 서글픈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문화관광부가 지난 2월말 발표한 ‘2003년 문화예술인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문학 미술 사진 음악 국악 무용 연극 영화 대중예술 등 10개 분야 예술인 1천9백47명 가운데 창작활동과 관련한 월평균 수입이 전혀 없다는 예술인이 30.9%, 10만 원 이하라고 응답한 사람이 13.7%였다.
이런 상황에 비춰볼 때 작가에 대한 정부의 원고료 지원은 ‘생계비’ 지원이라고 봐야 한다. 이런 종류의 원고료 지원정책은 과거 독재정권 시절이라면 작가의 생명줄을 틀어쥐는 ‘통제 수단’으로 악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시대가 바뀌었고, 문화관광부의 지원정책에 정치적 의도가 깔린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인문학의 위기’가 운위될 때마다 해당 지식인들은 “위기가 아니었을 때도 있었냐”며 자위한다. 그러나 작금의 문단 현실은 김영승의 시 제목처럼 ‘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에 가깝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문단의 상황이 아무리 열악하다 해도 작가들의 창작열정이 사라지지 않는 것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90년대를 이끌었던 여성작가들의 활동은 다소 주춤한 형편이지만 여전히 여성작가들의 활동이 눈에 띈다.
「뱀장어 스튜」로 2002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았던 권지예(44)는 첫 장편소설로 자전적 성장 스토리를 담은 『아름다운 지옥』(문학사상사, 전 2권)을 내놓았다.
1970년대 서울의 청량리 인근 서민동네인 전농동이 배경이다. 열두 살 소녀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소설은 작가의 말마따나 “스무 살이 되기까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대통령의 죽음”에 이어 신군부가 들어선 80년대 초 어지러운 시국상황 속에서 성년을 맞기까지 과정을 담고 있다.
전혜성(44)이 내놓은 첫 소설집 『소기호씨 부부의 집나들이』(문학동네)는 이념 붕괴와 가족 해체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십대들의 초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첫 소설집에 대해 작가는 “어둡고 출구 없는 상황에 맞닥뜨린 사람들이 여기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자아를 지켜내는지 그리고자 했다”면서 “표제작의 주인공 소기호씨는 가부장적 권위가 해체된 시기에 가정의 안팎에서 시련을 겪는 우리 시대의 보편적 남성상으로,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쉽게 뿌리 뽑히는 요즘 남자들의 불안정한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중편소설 「할머니의 평화」로 1996년 제 3회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고 등단한 서성란(37)은 첫 소설집 『방에 관한 기억』(문이당)을 발표했다.
수록작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삶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절제된 언어로 차분하게 그렸는데, 표제작은 회사를 그만둔 뒤 종교에 빠져 가족을 가난으로 내모는 무능력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렸다.
강영숙(38)이 올봄에 내놓은 두 번째 소설집 『날마다 축제』(창비)는 도시사회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인간들의 일그러진 형상과 황폐한 삶을 음영 짙은 흑백필름을 현상하듯 기괴한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지난해 4월부터 제주도에 머물고 있는 윤대녕(43)은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 이후 5년 만에 네 번째 소설집 『누가 걸어간다』(문학동네)를 냈다.
작가는 “서울에서 머물던 지난 몇 년 간 책 읽고 글 쓰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문학적 딜레마에 빠져 중단편을 쓸 수 없었다. 장편소설은 대중과 직접 만나야 하고 직업적으로 써야 하기 때문에 문학을 한다는 느낌이 안들 때가 많다”면서 “작가는 적어도 1년에 3편정도 중단편을 써야 문학적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순수작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서정성 짙은 문체로 주목받아온 이응준(34)은 세 번째 소설집 『무정한 짐승의 연애』(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두 번째 소설집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신작 소설집은 동물적 속성에서 비롯된 원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봄기운이 퍼지면서 시인들이 겨우내 묵혀두었던 시들을 엮어 잇따라 세상에 내놓았다.
공광규(44) 시인은 『지독한 불륜』 이후 8년 만에 발표한 신작 시집 『소주병』(실천문학사)에 후기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사십대의 처절한 자기고백을 담았다.
유홍준(42) 시인은 첫 시집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실천문학사)을 통해 불행했던 가족사를 중심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탐색한 시편들을 선보였고, 이영수(41) 시인은 단절의 이미지를 통해 세계와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편들을 수록한 두 번째 시집 『고양이 속의 아이를 부탁해』, 김윤환(41) 시인은 삶의 진정성을 탐구한 시편들로 엮은 첫 시집 『그릇에 대한 기억』을 펴냈다.
문혜진(28) 시인의 첫 시집 『질 나쁜 연애』(민음사)는 여성의 몸과 성(性)에 대한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차 있다. ‘쇳덩이’로 상징되는 현대 도시문명에 유린당하는 ‘불모의 땅’으로서 여성의 운명에 대해 거칠고 참담한 목소리로 노래한 「날것에게 몸을 내어주다」 등 1998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고 등단한 이후 써온 62편의 시를 시집에 실었다.
지난 3월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처리과정에서 민예총,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은 “대다수 국민의 뜻을 저버린 국회 수구 세력의 폭거”라거나 “참여민주주의를 살해한 정치적 폭력이자 대국민 배신행위”라며 반대 성명으로 냈다. 탄핵발의에 참여한 민주당 김영환(시인) 전 의원은 제명 압박을 받다가 결국 작가회의를 스스로 떠나기도 했다.
한편 작가 황석영(61)은 올봄 민예총의 신임 회장으로 취임한 뒤 2년간 영국에 체류하기 위해 4월 19일 한국을 떠났다. 시인이자 소설가 김형수(45)는 민족문학작가회의에 신설된 사무총장을 맡아 남북작가대회를 추진하고 북한 룡천참사 돕기 위한 범문화예술인모임을 결성하는 등 활동폭을 넓히고 있다. 시인 신세훈(63)은 제23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으로 재선됐고, 시인 김종해(63)는 한국시인협회 제34대 회장으로 선임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