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독성과 의미 보존의 문제- 獨譯 『Sündhafte Sehnsucht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글 / 김용민_연세대 독문과 교수. 1957년생. 저서 『독일 환경 생태시』 등
황지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1998)가 김미혜, 실비아 브래젤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김미혜, 실비아 브래젤 팀은 1996년에 황동규의 『풍장』을 번역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98년에는 이강백의 『영월행 일기』와 오정희의 『바람의 넋』을, 2001년에는 김수영의 시선집 『구름의 파수병』에 이르기까지 시, 소설, 희곡을 넘나들며 한국 현대문학을 독일에 알리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한국문학을 여러 편 불어로 옮긴 최윤, 파트릭 모뤼스 팀과 견줄만하다.
김미혜, 실비아 브래젤 팀은 시 번역에서 특히 진가를 발휘한다. 이번에 나온 황지우 시집 역시 유려한 문체와 응축된 시적 언어가 조화를 이루어 전혀 번역투가 느껴지지 않는다. 시 번역에서 종종 나타나는 어색한 표현이나 산문투의 문체가 아닌 그야 말로 시적 표현으로 가득한 한 권의 깔끔한 시집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런 매끄러움의 다른 한 편에는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독일어로 초벌 번역한 시를 시답게 만들려다보니 원작에서 자꾸 멀어져버렸다. 내가 알기로 이 문제는 그녀의 번역관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이미지나 비유, 시어가 독일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아야 잘 읽힐 수 있다며 원작을 대폭 수정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이번에 나온 황지우 시집에서도 브래젤의 번역관이 충실히 반영되어 어떤 경우는 개작이라 할 정도로 원작의 비유나 이미지가 많이 바뀐 게 여기저기 눈에 띈다.
가벼운 변형을 보자.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 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놓은 날 / 잠시 세상 그만두고 /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가 원본이고 이것을 독일어로 이렇게 옮겨 놓았다. “An dem Tag, wo die Kirschblüten wie Puffreis aufplatzen / die Luft vom Weiß geschwängert ist / wäre es gut dem Alltag ein Weilchen zu entsagen / darunter hinzugehen mit einem Hauch Seelenfrieden 벚꽃이 팝콘처럼 터지고 / 공중에 흰색 가득한 날 / 잠시 일상을 벗어나 / 한줄기 영혼의 평화 얻어 그 아래로 가면 좋으리.”
번역본에서도 원작의 핵심 메시지야 잘 전달이 되었지만 “펑!”하는 의성어와 “꽃팝”같은 중요한 시어를 빼버림으로써 이미지가 변형되었고, “휴가”를 “영혼의 평화”로 해석하여 번역하고 있다. 위 시구를 독일어 자체로만 본다면 유려하고 매끄럽지만, 꼭 이렇게 번역해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벚꽃 아래로 휴가가는 것과 그 아래에서 영혼의 평화를 얻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지 않을까? 이런 태도는 소소한 것이지만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라는 시 제목을 ｢불교적 사고유희 Buddhistisches Gedankenspiel｣로 바꾸고, 시어 중에서 “넙치”를 “가자미 Scholle”로, “자전거”를 “오토바이 Moped”로 변형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번역이 창작이 아닐진대 원작자의 이미지나 어휘는 최대한 그대로 옮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너무 독일시의 문법이나 가독성만을 따라가다 보면 원작의 이미지와, 심지어는 그 의미마저도 뒤틀어지는 경우가 나오기 때문이다. 몇몇 부분은 그런 우려가 들게 한다.
｢성 5월｣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원본은 “죽어서 받은 거룩함도 살아 있는 날의 우연성, 덧없음, / 어처구니 없음에 잠깐 일어난 정전기 같다 할까”이다. 이것을 독일어로는 “죽은 후에야 죽음을 복권시키는 성스러운 명예는, 내게는 무상함만을 불러오는 우연처럼 여겨진다. / 그들의 영웅적 행위는 예기치 않게 하늘에서 번쩍이고는 사라져간 번개와 같았다”로 옮겨 놓았다. 물론 독일식 시적 표현으로 다듬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변형이었다고는 하나 이 정도면 다른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는 또한 “명함”을 “입장권 Eintrittskarte”으로 잘못 번역한 부분도 있다. 다른 시의 경우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영화 ｢Il Postino｣를 제목으로 썼는데 이를 ｢Il Fostino｣로 옮기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제목이라고 엉뚱한 주를 달아 놓았다)
시집을 읽어나가면 이렇듯 이미지와 내용을 변형시킨 부분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독일어판만을 읽는다면 그 자체로 훌륭한 시들이지만, 한국어 원본을 읽고 다시 읽으면 많은 경우 다른 시처럼 읽힌다.
원전에 충실한 직역이냐 세련된 의역이냐의 문제는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아마도 해결책은 두 극단이 서로 맞붙은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것이지도 모르겠다. 가장 좋은 번역은 직역에 가깝되 문향이 그윽한 수준 높은 글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브래젤이 한국어 원본을 해독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인 공역자가 초벌 번역해 놓은 것을 원전을 읽지 않은 채 독일시의 문법과 전통에 맞게 아름답게 수정하다 보니까 윤문과, 많은 경우 각색이 되어버린 것이다. 풍부한 어휘력과 뛰어난 표현력을 지닌 브래젤이 한국시를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면 훨씬 나은 번역이 가능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까지 한국문학의 독일어 번역에 참여한 독일인들은 한국어를 모르기에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한국문학 해외 소개의 새로운 단계를 위해서는 원어와 번역어 모두를 훌륭히 구사할 수 있는 공역자를 찾아 체계적 지원을 해야할 것이다.
※ 『Sündhafte Sehnsucht』는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독일의 아베라(Abera)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