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76년 예과시절 등록금을 마련하던 중 돈이 모자라게 되자, 나는 그 핑계에 기대어 덜컹 휴학계를 내고 궁벽한 시골에 숨었다. 사전과 시집 열 몇 권과 빈 공책 열 권이 가진 짐이었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이 문학청년은 집에는 알리지 않고, 문학으로 세상을 읽어보겠다는 꿈만 꾸었다. 출분이지 가출이 아니다, 라는 선언을 당당하게 남겨두었다. 사전을 읽었다. 사전 표제어의 순우리말들, 언젠가 써먹어야 되겠다는 불순함에 남획된 말들이 공책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시 시 10편 베끼기. 김춘수와 김수영, 황동규와 정현종, 오규원과 고은의 시들이 매일 문청이 베껴먹던 양식이었다. 그리고 습작. 잠자기 전에 쓰는 일기는 화려한 만연체, 언젠가 공개될 것에 대비한 공들인 산문이었다. 그러한 일을 오래 견디면 시인이 되지 않겠느냐고 자문하면서, 외로움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보다 먼저 시인을 꿈꾸는 이 불순한 문학청년은 아직 철들지 않았던 것. 스스로도 확신이 가지 않아서, 명시와 내 시를 냉혹하게 비교하고 습작을 아궁이에 불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불타는 시를 바라보면 눈이 매워서라도 어찌 눈물이 나오지 않으랴. 편모슬하의 장남인 내 형편으로 문학은 사치가 아닐까. 이곳에 오기 전 이미 두 동생은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어머니마저 내 문학을 장남의 취미로 이해하셨다. 허지만 보따리는 쉽게 싸지질 않았다. 이명이 들렸다. 몇 권의 공책에 써 둔 습작시들이 나를 붙들거나, 내 문학 수업을 기꺼이 환송해 준 글친구들의 질책이 두려웠다. 무엇보다 문학 외에 내 재능이 다다른 곳은 어디란 말인가라는 질문에 숨이 막혔다. 다시 보따리를 풀고 확신 없는 일을, 스스로에 취해서 몇 달을 보냈다. 우선 내가 좋은 시라고 생각하던 시들을 제치고, 민음사에서 나온 ‘오늘의 시인총서’ 시리즈를 모두 베끼기로 했다. 이틀쯤 공들이면 시집 한 권을 다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사전을 읽는 작업도 더 꼼꼼하게 챙겼다. 밤에는 그날 베낀 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시를 외우다가, 문득 공부가 너무 부족하구나 가슴을 때리는 서늘함에 전율했다. 아무리 사전을 읽어도 그것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시를 베껴보아도 소갈머리없는 이 문학청년에게 삶은 그 비밀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것. 어쩔 수 없이 다시 도시로 온 나는 시립도서관에 박혔다. 그곳은 신간서적은 없지만, 막 번역되어서 나오기 시작한 한글대장경이 있었다. 글친구 하나와 같이 매일 그곳에 들려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속을 헤매다가, 저녁에 다시 그 친구와 같이 읽은 것을 이야기하는데 서로 바닥이 뻔하게 보여, 또는 서로 바닥을 뻔하게 보여주는 것이 싫어져서 한 달 남짓 버티다가 그짓도 작파하고 도망치듯 다시 시골로 가버렸다. 구한말의 화가 허소치가 고종 앞에서 어명으로 그린 춘화도란, 외딴 집의 섬돌 위에 그려진 남녀의 신발이란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때다. 억지로 갈겨쓴 몇 편의 시를 매일신문의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피 토하듯 시간을 보냈지만 피로와 허무의 늪을 무르팍으로 기어가듯 건너온 느낌이었다. 결국 내 재능은 문학이 아니라 문학의 향유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다가왔다. 그리하여 쓸쓸한 1977년이 막을 내리려는데 정말 생각지 않게 신춘문예 당선 전보가 왔다. 그것은 심한 아이러니가 아니었던가. 겨우 몇 개월의 용맹정진을 통해, 재능 없음을 깨닫고 막 문학을 포기하려는 자에게, 다시 문학 외에 매달릴 것이 무엇 있느냐면서 등을 떠미는 그 신춘문예 전보는 비극일 뿐이다. 뮤즈는 나를 실험하고 있었던 것. 조금 더 두고 보겠다. 열심히 자기를 받들면 내 나라의 신민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싹수가 보이지 않으면 조금 떼어준 그 재능마저 몽땅 박탈하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미 자신의 재능이 박탈당했던 이 문학청년은 시를 읽거나 쓰지 않음으로써 뮤즈와 싸우고 있었다. 그 사이 힘겹게 대학을 졸업하여 겨우 생활인으로서 버티기 시작했지만 시를 생각하면 창에 찔리거나 칼에 베이는 서늘함이 다가왔다. 83년이 되어서야 문예지를 읽을 수 있었다. 나의 제대로 된 습작 시절은 그러니까 83년부터 『세계의문학』으로 재등단하기까지의 3년여의 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