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송기원_소설가. 1947년생. 소설 『또 하나의 나』 『인도로 간 예수』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 『사람의 향기』 등
얼마 전에 한 후배작가로부터 새로 펴낸 장편소설 한 권을 기증받았다. 우체부에게서 건네받은 후배의 책을 펼쳐들고, 책의 표지에서부터 차례를 걸쳐 본문까지 쓰윽, 일견하여 훑어보던 어느 순간, 나는 무심코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보다 가까이 책을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불현듯 후배의 책에서 무슨 향기가 나는 듯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분명히 환상일 것이었지만, 은은한 향기를 두 코로 맡고 있는 듯한 여전한 기분은 한동안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천지사방에 꽃들이 지천으로 만발하는 계절이어서 마침내 나는 기어이 책에서마저 무슨 향기를 맡았던 것일까.
그렇게 책에서 무슨 향기가 나는 듯한 기분에 빠져들자, 다음 순간에는 갑자기 가슴 한켠에 오려내는 듯 생생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 생생한 통증은 이내 한 가닥 비애가 되어 몸 전체로 퍼져갔다. 그쯤 되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책을 덮어놓고, 저만큼 멀리에서 환상처럼 지펴오르는 후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해 전 후배작가는 뒤늦은 결혼을 하자마자 오랜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부인과 함께 강원도 원주 부근의 산골마을로 이사를 갔었다. 아름다운 부인 또한 후배처럼 소설을 쓰는 작가로 이를테면 부부작가인 셈이었는데, 게다가 이들 부부는 이왕에 서울생활을 청산하는 김에 애오라기 글을 쓰기 위하여 다른 직업마저 아예 때려치우고, 이른바 전업작가가 된 셈이기도 했다.
이 전업작가가 된 부부가 초대하는 바람에 한 번 이들이 사는 산골 집에 들른 적이 있다. 그러자 후배작가는 나를 위해 백 평 남짓한 텃밭에서 상추면 쑥갓 따위 푸성귀를 따오며 빙긋이 웃었다.
“이곳에 와서 틈틈이 농사를 짓다 보니까, 전혀 돈이 들지 않아요.”
후배작가의 웃음에 나 또한 빙긋이 웃었다.
“어차피 돈 안 쓰면서 살려고 이 산골짜기로 들어온 것이 아니었던가?”
나의 웃음에 후배는 이번에는 겸연쩍은 듯한 웃음으로 맞받았다.
“그런 셈인가요?”
후배가 너무 쉽게 겸연쩍어 하자, 나 또한 덩달아서 너무 쉽게 겸연쩍어지는 기분이었다.
후배나 나나 애오라지 전업작가가 되어 글만을 쓰면서 살아내기에는 지금은 너무 험하고 캄캄한 시절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캄캄한 시절에 전업작가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하고 황당하며 엉뚱한 짓이 된다는 것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후배는 자신은 물론 부인마저도 그렇듯 무모하고 황당하며 엉뚱한 길로 내몬 것이었다.
후배가 보내준 장편소설 표지를 들추다 말고, 내가 새삼스럽게 통증을 느끼고, 통증에 이어 한 가닥 비애감에 온몸을 떤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장편소설 한 권을 펴내기 위하여 후배 부부가 살아내었을 무슨 인고의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 쓰라리게 여겨졌기 때문이리라.
도대체 출판사에서 지금 소설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되는 시절인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개똥보다도 더 하찮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아니면 버리지도 그렇다고 덥썩 껴안지도 못한 무슨 애물단지가 되어, 출판사를 애먹이는 존재가 바로 소설이 아닌가.
모르기는 해도 이번에 펴낸 후배의 장편소설 또한 그런 애물단지의 경우를 겪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어렵사리 세상에 빛을 본 것이리라. 그렇게 어렵사리 세상에 나온 이 책이 후배에게 벌어준 돈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요즈음 소설 한 권 펴내는데 대개 첫 판에 3천부를 찍으면 출판사로써는 작가에게 크게 마음 쓰는 셈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온 3천부 첫 판은 방송사나 신문사 같은 매스미디어들이 떠들어주거나 아니면 무슨 상업성의 바람을 타는 경우 이외에는 더 이상 팔리는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식이라면 후배는 이번에 펴낸 장편소설 한 권으로 대략 2백40만 원 정도에 이르는 돈을 번 셈이다. 만일 이번 장편소설이 전작장편이라면, 그리고 집필기간이 2년 남짓한 기간이었다면, 후배는 전업작가가 되어 2년 남짓 버티는 동안에, 한 달에 10만원 정도의 순수입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돈이 안드는 산골짜기로 들어갔다고 해도 요즈음같은 세상에 10만원으로 한 달을 살아내기란 후배로써는 살과 뼈를 깎는 삶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