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한국 근대 문학사에 큰 흐름을 형성했던 식민기 사실주의 문학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고, 이를 통해 서구 사실주의 논의의 형식주의 경향이 갖는 한계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1970년대 이후 서구 평단은 언어의 주된 기능을 “사실의 반영”이 아닌 “사실의 창조”로 재정립하는 후기 구조주의, 해체학 등의 이론들이 주도하고 있다. 언어의 구성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문학의 사회적 영향을 강조하는 동시에, 언어 제일주의라 할 만한 풍조를 낳아 문학 연구에서 새로운 형식주의를 대두시켰다. 전반적인 문학 연구의 대상이 작품 자체를 넘어 사회적 행위로서의 문학으로 확장되는 와중에도, 유독 사실주의 논쟁에 있어서는 “객관적 묘사의 문학”으로서의 형식적 특성이 강조되는 추세다. 그러나 그 같은 관점에서는 정치 혹은 문화적으로 식민·반식민 상태에 놓여있는 사회에서 왜 사실주의가 문학의 주류로 나타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식민기 한국의 문학 담론에서 “사실주의”란, 언문일치 문체의 완성이라는 과제와는 별도로, 1924년 경 나타나기 시작한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진 문학을 지칭한다. 본고는 기존 논의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벗어나, 한국 근대 사실주의 문학을 러시아 혁명 이후 1920~30년대에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던 좌파 성향 진보문학의 식민지적 한 변형으로 파악한다. 3·1 운동 이후 급속히 확산되어 가던 사회주의의 영향 하에 발생한 염상섭과 카프 계열 작가들의 사실주의 문학은, 일본 자연주의 소설과 대정(大正) 문화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1920년대 초 문학으로부터 분화되었으나, 또한 그 개인주의 성향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사회성이 강했던 사실주의 문학은 1920년대 신간회로 이어지는 민족운동 부흥기에 한국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다(“사실주의”라는 용어는 1900년대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 비평에 쓰이기는 1920년대 후반부터였고, 당시의 평론에서 1920년대 중반에 나타난 유물론적 세계관을 지닌 문학에까지 소급 적용되었다). 1930년대 민족운동 단체들이 모두 해산된 이후, 사실주의 문학 전통은 김남천을 비롯한 구 카프 계열 작가들과 채만식 등의 동반자 작가군, 그리고 박화성, 강경애, 백신애 등 계급 문제와 관련하여 여성 해방을 주장한 여류 작가들에 의해 보다 다양한 지류를 형성하며 1930년대 말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가장 유력한 제국주의 비판 담론으로 식민지 한국 지식인들에게 널리 수용되었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 페미니즘 등과 결합, 다양한 사상적 입지를 가능케 하는 열린 담론의 장을 형성했다. 따라서 사실주의 작가들은 유물론적 세계관과 계급 갈등의 인식을 공유하되, 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각기 다른 관점에서 식민 현실을 재현했다. 형식에 있어서도 그들은 새로운 문학 형식의 이입, 독자층의 변화, 문화 생산의 장의 변천, 그리고 스스로의 사상적 발전에 따라 패러디, 역사 소설, 의식의 흐름 기법 등 다채로운 서사 형식을 시도했다. 본고는 한국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넓은 스펙트럼을 제시하기 위해, 본문을 다음과 같이 구성하고 결문에서는 요약과 더불어 근대 사실주의 문학이 1970~90년대 한국 문단을 풍미했던 사실주의 비평 담론에 미친 영향을 논의한다.
서문 : 사실주의와 식민지 문학의 근대성
1장 : 진보적 민족주의와 염상섭의 민족 공동체 상상력
2장 : 혁명 없는 혁명 문학? 한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식민지적 특수성
3장 : 김남천의 실험적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의 경계
4장 : 강경애의 식민지 여성 해방 문학
결문 : 해방 이후 문학사에서의 근대 사실주의 문학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는 혁명기의 강한 사회 의식이 문학에 반영되면서 일어난 문학 사조였고, 20세기 초 한국,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위세를 보였던 사실주의는 예술의 제도적 자율성을 초월하려는 식민지 지식인들의 사회 참여 의지가 반영된 저항 문학이었다. 한국 사실주의 문학의 사례는, 서구 문학 전통을 넘어선 전 세계 문학 사조로서의 사실주의를 논의하는 마당에서는 “모사(模寫)적 재현”이라는 형식적 특성보다도 “공동체의 가치 추구“라는 사상적 성향이 보다 주요한 공통 분모가 됨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