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평생 밭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물 위에 밭을 만들었다. 여름이면 거짓말처럼 밤새 떠내려가던 밭. 굵은 빗방울이 기와지붕 위로 잰 걸음질치면 헛기침으로 아버지, 근심을 감추신다. 둑 아래, 물 위의 밭에서 파란 채소들 꼼짝없이 젖는다. 모기장 안에서 돌아눕는 식구들 마음도 흠씬 젖는다. 밤 새 아버지 밭 떠내려가신다. 한 삽, 두 삽, 아버지 땀방울 같은 모래며 잔자갈들이 물에 씻겨 내려간다. 다 자란 아욱이며 근대들이 뿌리째 뽑혀 황토 빛 격류에 쓸려내려 간다. 그러면 나는 벌써 몸이 노곤해진다. 아아, 여름방학인데 놀지도 못 하게 됐잖아. 하루 종일 하는 삽질은 정말 지겹다. 동무들은 강까지 떼지어 걸어가 배가 혼인 색으로 빛나는 칠어며 간다리를 꿰어 올릴 낚시를 여울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릴 텐데 나는 뭐람. 낭창낭창한 낚시대 대신 뭉툭한 삽자루를 쥐고 물에, 모래에, 자갈에 꼭 붙잡혀 며칠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폭우가 지나간 여름 하늘은 쪽빛. 개울물은 삽날로 퍼서 그냥 마셔도 될 만큼 맑다. 물 속 모래며 자갈을 퍼 올리느라 거울처럼 잘 닦여진 삽날엔 가끔 흰 구름이 지나간다. 송사리들이 털도 안 난 내 장딴지를 무슨 먹을 걸로 봤는지 자꾸 맴돌며 주둥이 질을 해댄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해 쨍쨍한 정오 무렵 두어 시간을 빼곤 계속 삽질이다. 아버지, 이까짓 밭 안 만들면 어때요. 비만 오면 물에 씻겨 내려가는 밭 같은 건 차라리 없는 게 나아요. 그럼 근대랑 아욱이랑 호박은 어디서 나오냐. 남들처럼 사먹으면 되잖아요. 돈은 누가 그냥 주냐. 이쯤에서 부자간의 대화는 물위의 풀잎처럼 슬며시 떠내려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하늘은 파랗다. 그 하늘이 눈부시게 내려앉은 물속에 은빛 삽날을 밀어 넣고 모래와 잔자갈을 퍼 올려 개울둑 쪽으로 힘껏 던진다. 그렇게 첫째 날 저녁이 되면 둑에 잇대어진 밭은 어느덧 반쯤 꼴을 갖춘다. 물 위의 밭은 그렇게 한 사나흘, 땀방울과 불평과 가까이 맴도는 송사리며 잠자리랑 함께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열흘 쯤 뒤라도 상류에 폭우가 지나가면 그곳에 밭은 거짓말처럼 또 흔적도 없다. 그 아버지만한 나이가 되어 아이와 함께 밭을 일군다. 고속철도 부근의 공지. 젖은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빙그레 웃으며,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처럼 물위의 밭은 아니네요. 마사토가 절반쯤인 박토지만 여기다 호박구덩이도 파고, 근대랑 아욱이랑 들깨도 심을 겁니다. 아버지 때는 일 할 자리 구하기가 그렇게 힘들었지만, 지금은 하루 이틀만 나가 벌면, 여기서 나올 채소를 몽땅 사 들일 수도 있답니다. 그래도 놀고 있는 땅을 발견했으니 힘써 밭을 만들 겁니다. 제 땅은 아니지만 거름도 만들고 저 아래 골짜기 샘에서 물을 길어다 고추모종도 할 거예요. 이쯤에서 저쪽, 불만스런 표정으로 괭이질 하는 중인 아들 녀석을 쳐다본다. 때가 되면 저 아이도 제 밭을 만들겠지요. 남자가 왜 밭을 만들어야 하는가는 그 때 알아도 늦지 않겠지요. 그런데요 아버지, 저 아이가 어른이 되면 버젓이 등기가 난 한 뙈기 밭을 가질 수 있을까요. 세상의 아버지들은 밭을 만든다. 내 아버지는 슬픔의 밭을 가지셨다. 아니다. 아니다. 토란잎 몇 장이면 다 덮어버릴 듯 했던 그 물 위의 밭, 폭우에 몇 번이고 떠내려가던 그 밭을 통해 기쁨의 저녁은 노을빛처럼 왔다. 빙 둘러 앉아 숟갈 젓갈 달각대던 커다랗고 둥근 상의 저녁, 호박 숭숭한 수제비며 아욱, 근대 달큰하던 된장국의 저녁은 그렇게 왔다. 아버지의 밭이 대지에 속했다면, 등기부에 버젓이 등재되었다면, 밤새 물에 씻겨 내려가는 슬픔은 맛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물 위의 그 밭을 통해 아버지는 내게 땀방울처럼 맑은 삶을 가르쳐주셨다. 하늘이 물에 씻겨 내려 보내기도 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그 위에 다시 밭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말하자면 삶의 헛수고를 넘어서는 차원을 애써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때가 되면, 아버지의 밭은 마음속에, 거기 그렇게 처음처럼 있다. 그 아버지의 밭에서는 무엇이 자라나는가. 호박벌 붕붕대는 아침과 아욱 된장국 달큰한 저녁, 그리고 다시 밭을 일굴 아이가 자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