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영희   © 운영자

■ 장 _ 드디어 만났군요. 감격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당신은 늘 나의 의식의 언저리에 있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백경 Moby-Dick』(1851)을 읽고 당신을 만났고, 그리고 후에는 당신에 대해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물론 지금도 거의 매학기 당신을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있지요.

■ 에 _ 저도 만나니 반갑습니다. 가능하면 인터뷰에 응하지 않습니다만, 한국의 멜빌 학자라니 호기심이 일더군요.
■ 장 _ 『백경』은 당신에 관한 이야기지만, 1인칭 화자인 이쉬마엘이라는 선원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를 Ishmeal 이라고 불러 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이쉬마엘이라고 불러 달라는 말은 자기의 진짜 이름은 숨기는 것 같지요? 그의 진짜 이름을 아시나요?
■ 에 _ 아, 그 애송이 친구 말씀이군요. 그의 진짜 이름 모릅니다. 사실 나는 한 번도 배에서 그와 개인적으로 맞닥뜨린 적도 없고, 더욱이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진짜 이름이 로버트이든 데이비드이든, 그는 자기를 ‘이쉬마엘’로 불러 달라고 했고, ‘이쉬마엘’은 성경에서 방랑자의 이름이지요.
■ 장 _ 그렇군요. 그는 가족도 없고 가까운 친지도 없는 것 같으니 방랑자인 셈이지요. 당신이 백경과 사흘간의 사투 끝에 ‘피쿼드 호’의 선원들과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질 때 이쉬마엘, 단 한 명만 살아남아서 당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방랑자 이쉬마엘은 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살 충동까지 느끼다가 바다로 떠납니다. 포경선 ‘피쿼드’호를 타고 당신의 그 화산 같은 분노에 동참하게 되지요. 당신은 잘린 다리를 고래뼈 의족에 지탱한 채 복수심에 불타 광인처럼 백경을 쫓는데……
■ 에 _ 잠깐. 지금 장 선생이 복수심이라고 했지만 분명히 해 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내 다리를 물어뜯어간 그 흰 고래놈에 대한 개인적 복수심 때문에 그 놈은 좇는 것이 아닙니다.
■ 장 _ 그럼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그 거대한 흰 고래를 좇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 에 _ 그것은 나의 인간적인 도전입니다. 나는 신에 대해 분노합니다. 그 기막힌 불공평함에 대해서. 신은 비겁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우리를 꼭두각시처럼 갖고 놉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대로 순명하면서 살지만, 난 그렇게 하기를 거부합니다. 싸우다 죽는다 해도 나는 일어나 싸웁니다.

▲ 영화 '모비딕'    © 운영자

■ 장 _ 하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 전혀 승산 없는 싸움이 아닙니까.
■ 에 _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싸움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말합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은 마분지 가면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속에는 알 수 없는, 그렇지만 분명히 계획적인 어떤 힘이 그 무심한 가면 뒤에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그 벽안에 갇힌 수인들인데, 그 벽을 쳐부수지 않고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흰 고래는 나를 밀어붙이는 바로 그 벽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증오하는 것이다. 내게 신성모독이라고 얘기하지 말라. 날 모욕한다면 태양이라도 쳐부수겠다! 진리에는 한계가 없다.”
■ 장 _ 그렇지요. 『백경』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36장에서 당신은 선원들을 모아놓고 당신이 백경을 좇는 이유를 그렇게 천명하고 있지요. 이 장면을 가르칠 때 저는 가끔 우리 학생들에게 나는 당신의 말을 인용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에이헤브의 봉기는 운명에 대한 도전이다. 하시라도 우리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는 운명을 그대로 저항 없이 받아들이지 말라. 운명에 도전하라.’
■ 에 _ 바로 그겁니다. 나는 운명의 힘에 주눅 들려서 그대로 주저앉아서 지리멸렬하게 타협과 복종만 하면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경멸합니다.
■ 장 _ 정말 사는 게 가끔 너무 공허합니다. 가면극의 엑스트라 같은 인간, 아름답지만 변화무쌍한 탈을 쓴 기만적인 자연, 그 가면 뒤에서 오로지 인간의 파멸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정체모를 힘에 대한 당신의 도전은 바로 당신을 창조한 허만 멜빌의 도전이기도 하였지요.
■ 에 _ 그렇습니다. 그도 무척 외로운 사람이었지요. 영혼의 방랑자였다고나 할까요.
■ 장 _ 제가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 갈 수 있다면 1850년 가을의 어느 날 매사추세츠 주의 피츠필드에 열린 피크닉에 가 보고 싶습니다.
■ 에 _ 그건 왜지요.
■ 장 _ 그때 이미 허만 멜빌은 『백경』을 탈고한 상태였지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읽는 『백경』과는 판이했습니다. 단순히 태평양에 출몰하는 흰 고래를 잡는 모험소설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다가 멜빌이 어느 가을날 그 피크닉에 참석하게 되고, 거기서 『주홍글씨』의 저자 나타니엘 호손을 만납니다. 둘은 함께 대화를 나누고, 멜빌은 호손에게서 아주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멜빌은 그것을 ‘어둠의 힘 Power of Blackness’이라고 일컬었지요. 그리고 돌아와서 『백경』을 완전히 개작,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책으로 다시 썼습니다.

▲ 『백경』의 작가 허먼 엘빌  © 운영자

■ 에 _ 하하…… 멜빌이 그날 호손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훨씬 더 많은 독자를 만날 뻔 했었군요. 그래서 멜빌은 『백경』을 호손에게 헌정했군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방에 거울만 달린 미로처럼 잔혹한 혼돈이요 감옥이고, 그 감옥의 벽을 허무는 것이 내 삶과 사랑, 열정을 바친 꿈이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나를 창조한 멜빌의 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
■ 장 _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호손의 말을 빌리자면 멜빌은 항상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해 회의하고 골똘하게 몰두해 있었고, 그 닿을 수 없는 세계를 향해 끝없이 발돋움했다”라고 했거든요.
■ 에 _ 그렇지요. 멜빌은 나를 창조함으로써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어떤 힘, 인간을 비웃고 얽매고, 그보다 더욱 두렵게는 인간에게 무관심한 듯한 그 모호한 존재를 감추고 있는 벽을 허물고자 했다는 겁이다.
■ 장 _ 네, 하지만 몇몇 비평가는 당신은 진리의 ‘seeker’가 아니라 ‘finder’였다고 말합니다. 즉,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진리는 이것이다’, 라고 결정해 놓고 단지 그것을 증명하려고만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 에 _ 내게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 장 _ 그러시군요. 그래서 당신은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의 노예근성을 비웃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마분지 가면’의 벽을 향해 분연히 일어난 영웅이었습니다. 그 점을 십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드리기 좀 뭣합니다만, 당신의 그 현상을 넘어선 추상만을 고집하는 이상주의, 인간의 한계성을 거부한 절대를 향한 집요한 추구, 신에 대한 복종 내지 타협보다는 도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애마저 저버리는 당신의 그 편집광은 당신이 자유를 주려던 이 세상에 오히려 파괴와 죽음을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 에 _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이쉬마엘의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그는 책에서 자신이 ‘피쿼드호’를 타기 전 칼 위에 몸을 던지고 싶은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는 나의 거대한 추구를 목격하고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백경』에서 자신의 경험을 술회할 때 그는 이미 마음의 평정을 찾고 심리적인 안정을 얻은 듯 합니다. 누군가의 치열한 투쟁을 보는 것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새롭게 삶의 의미를 찾는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요. 설사 그 투쟁이 실패로 끝났다 해도 말입니다.
■ 장 _ 글쎄요. 이쉬마엘이 당신의 투쟁에서 위안을 얻었다고 단정 짓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그보다는 당신의 선원 중에 퀴켁을 기억하십니까.
■ 에 _ 기억합니다. 그가 내 배에 타기 전에 그는 태평양 어느 섬의 야만 부족의 왕자였지요. 포경 기술도 아주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장 _ 그는 자기의 부족을 좀더 잘 다스리기 위해 문명을 배우기 위해 미국 땅으로 와서 당신의 배를 탔습니다. 그는 비록 이교도인이고 야만인이지만, 자신의 부족에 좀더 사랑의 길을 전파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사람입니다. 피쿼드호를 타기 전에 여관집에서 방이 부족해서 이쉬마엘은 퀴켁과 동침하게 됩니다. 퀴켁의 낯선 모습에 이쉬마엘은 처음엔 공포를 느끼지만 퀴켁이 초면인 그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나누고 위로하는 모습에서 ‘내 마음은 녹아들었다’라는 말을 하고 있지요. 그리고 퀴켁과 단짝 친구가 되고 결국 이쉬마엘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퀴켁이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대비해 만들어 놓았던 관을 타고 파도를 넘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퀴켁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시하고 있는 겁니다.
■ 에 _ 사랑…… 사랑은 인간에게 사치스러운 단어가 아닌지요. 감옥의 죄수에게 물어 보십시오. 사랑을 택하겠는가, 자유를 택하겠는가. 자유 없는 사랑은 무의미합니다.
■ 장 _ 그럴까요. 그런 당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당신에게도 가족이 있지요.
■ 에 _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에입니다. 늦게 결혼해서 젊은 아내와 아직 어린 아들아이가 있습니다. 그들을 낸터킷에 두고 떠났습니다.
■ 장 _ 『백경』에서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바로 「교향곡」이라는 장(章)입니다. 당신이 마침내 흰 고래를 만나기 바로 전에 완벽한 화음을 갖춘 교향곡처럼 하늘과 바다, 태양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아름답고 화창한 날, 당신은 가족을 생각하며 회환에 차서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 흘리는 에이헤브…… 사람들이 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군요.
■ 에 _ 단지 한 순간이었지요. 그리고 나는 다시 내 의지에 상관없이 내 몸을 움직이는 어떤 힘, 나를 영혼의 난장이로 만들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그 힘에 분노하지 않았습니까.

▲ 『백경』의 에이헤브 선장       © 운영자

■ 장 _ 하지만 당신의 광적인 분노는 단지 파괴만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결국 이쉬마엘이 피쿼드호에서 배운 것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맞잡는 손이야말로 그 어떤 추상적 진리보다 더 위대하고 궁극적 구원에 이르는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이쉬마엘은 퀴켁이라는 친구와의 진정한 우정을 통해 다시 세상과의 다리를 놓습니다. 찾을 수 없는 답을 찾고자 고뇌하는 당신의 추구는 영웅적이지만 무모하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애까지 저버리는 당신의 그 광적인 추구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지요.
■ 에 _ 너무 감상적이시군요. 나를 창조한 멜빌은 ‘슬픔을 아는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다’라고 했지요. 삶의 깊이를 느껴 보십시오. 거기에는 슬픔과 고뇌가 있을 뿐입니다.
■ 장 _ 멜빌은 자신이 읽던 책에 ‘나는 머리만 있는 주피터보다는 마음만 있는 바보가 되겠다’고 적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자유 없는 사랑은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사랑 없는 자유는 또 무슨 의미가 있나요.
■ 에 _ 사랑 없는 자유, 그렇군요…… 내 영혼의 자유를 위해서 미처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사랑 없는 자유도 없고, 자유 없는 사랑도 없는 게 아닐까요. 결국은 사랑이 자유를 만드는 거니까요. 우리 인간의 영원한 화두인 것 같습니다……
■ 장 _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삶에 주눅 들어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 제 마음 속에 있는 당신은 제게 큰 힘입니다. 당신을 알게 된 것은 제 인생의 큰 행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