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정환_번역가, 한국외대 루마니아어과 강사 및 동유럽발칸연구소 연구원. 1968년생. 저서『한국-동유럽 구비문학 비교연구』(공저), 역서『동유럽 사람들은 삶을 어떻게 노래했을까, 동유럽 사람들은 삶을 어떻게 이야기했을까』(공역), 『천상병 시선집』(루마니아어譯) 등
‘고통스런 가을의 시인',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겨울의 시인', ‘무더위와 부패로 방치된 시체를 노래한 시인', ‘신경증을 자극하는 봄의 시인'으로도 불리는 제오르제 바코비아(1881~1957)는 그가 태어난 지방의 한 작은 도시에서 존재에 대한 절망을 느끼며, 주옥과 같은 다섯 권의 시집을 우리에게 남겼다. 프랑스, 벨기에 상징파와 데카당스 시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시인은 시적 자아가 실현된 표현의 세계를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그를 루마니아 최고의 상징시인으로 만들었다. 시의 주된 무대는 지방의 소도시로부터 출발된다. 쓸쓸한 공원, 황혼의 도시, 군대의 팡파르, 도살장, 주저앉을 듯한 초라한 카페와 선술집, 타락한 현실의 세계, 부조리한 몸짓을 하며 의미 없이 방랑하는 사람들이 그의 작은 도시를 지배하고 있다. 상징의 울타리를 넘어 심지어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보여주기도 하는 그의 시는 멜랑콜리와 허무적 우울로 시작되어 죽음과 절망의 강박관념으로 치닫는다. 루마니아 문학사에 있어 그 어느 시인도 시도해보지 못한 현실화된 비극의 무대 속에서 그는 때로는 ‘상징의 숲'을 빌려, 때로는 색채의 마술로 새로운 시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납으로 된 관(棺)과 꽃 그리고 월계수관으로 치장된 한 공동묘지의 납골당을 방문하면서 받았던 젊은 시절의 깊은 인상은 후에 그의 대표작 「납」이라는 시로 나타난다.
“납으로 된 관들이 깊이 잠들어 있다 납으로 된 꽃들과 수의도 역시 납골당 속에 홀로 서 있다 그리고 바람이 분다 (……) 납으로 된 나의 사랑이 돌아누워 자고 있다 납으로 된 꽃들 위에서 그리고 나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 납으로 된 날개들이 축 쳐져 있다.”
시 「납」은 시간의 사색을 요구하는 상징적 서술체의 시이다. 정서와 의지의 차원(납으로 된 나의 사랑), 그리고 좌절된 동경(납으로 된 날개)으로부터 암시되는 시적 자아는 모든 것의 정지와 소멸을 의미하는 ‘홀로 서 있다'와 ‘돌아누워 자고 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납은 쇄도하는 죽음보다도 더 잔혹한 전체적 피폐함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시의 소품들 외에도 시인은 색채의 암시를 빌려 시적 영혼의 상태를 전달하기도 한다. 시인의 팔레트에 투박하게 짜여진 물감은 시인이 의도한 다양한 내면의 상태를 훌륭하게 대변해주는데, 이러한 색채들은 격렬함에 대한 강도를 배가시켜 때때로 환상적이고 환각적인 시인의 세계를 표출해낸다. 독창적인 시 예술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적 인공물로서 가치를 지닌 바코비아의 색채는 희미한 멜랑콜리의 음조와 다양한 황혼의 색채로부터 받은 기괴한 인상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진화되어 궁극적으로는 물질세계의 항구적인 소멸을 추구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자주색, 검은색, 흰색, 붉은 색은 병적 강박관념의 수단으로서 사물을 공격하며, 모든 풍경을 얼룩지게 만든다. 흰색은 검은색에 대한 적대적 색채라기보다는 오히려 검은색이 가지는 절대적 부정, 소멸의 심연과도 같은 이미지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보색잔상(補色殘像)의 경우를 보여주는 이 두 색은 서로 합쳐 물질세계의 절대적 소멸을 보여주는 ‘납'의 색인 회색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흰색, 회색, 검은색은 무채색의 스펙트럼이며, 허무와 침묵 그리고 종말의 색을 대신하기도 한다. 붉은색은 피를 환기시키는 죽음의 격정이자 생명을 자연으로부터 일탈시키는 매개체가 되며, 자주색은 소외와 방황의 상태, 환각을 암시하는 색, 그리고 노란색은 술에 취한 채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절망의 얼굴을 가진 계절 가을을 위해 존재하는 색이다. 청각적, 시각적, 유기체적 느낌과 인상을 모두 갖춘 그의 시에 나타난 교감의 방식은 시어들이 암시하는 기호의 형태와 각각의 개체들이 지닌 색채의 뉘앙스를 기저로 하는데, 이러한 색채의 극대화 속에서 시인은 루마니아 문학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 창작의 세계를 탐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