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계 미국 문학의 모델에서 다문화적 통찰의 중심으로- 한국계 미국문학: 그 시작에서 오늘까지
글 / 박진임_평론가, 평택대 국제학부 교수. 1964년생. 역서 『아시아계 미국문학의 길잡이』 등
I. 세계화 시대의 한국 문학의 범위
베네딕트 앤더슨의 유명한 저서, 『상상의 공동체』가 발간된 이후 국가는 실체라기보다는 담론으로 형성된 허구적 구성체라는 견해가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세계화라는 이름의 ‘국경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국문학, 또는 한국 문학의 테두리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답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인이 한국인의 고유한 사상과 감정을 한국어로 표현한 문학”이라는 기존의 국문학 정의는 더 이상 유효한 것 같지 않다.
국문학계에서는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씌어졌지만 한국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거나 한국적인 소재를 취하여 한국인의 경험을 그려내는 작품들에 대하여 ‘재외 동포 문학’, ‘재외 한인 문학’ 등의 이름으로 포용하려는 시도들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한민족 문화권의 문학’이라는 이름도 등장하여 한국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다양한 문학들을 한국 문학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반면, 영미 문학계에서는 앞서 언급한 작가와 작품들을 ‘한국계 미국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루고 있다. 즉, 영어로 씌어져 있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문학작품의 국적은 미국임을 분명히 하면서 단지 한국인을 선조로 하거나 한국 문화 전통을 수용한다거나 하여 한국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어 있음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국문학계와 영문학계에서 서로 다른 명명을 하고 있지만 동의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 문학 작품의 창작자가 어떤 형태로든 이산(diaspora)을 경험한 존재들이고, 한국인을 조상으로 한다는 점이 그 첫 번째이다. 둘째는 설정된 범주에서 제외되는 작품은 한국어로 창작되어 번역된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즉 번역된 한국 문학은 철저히 한국 문학으로 본다는 것이다. 논자는 이러한 태도 또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어 멀지 않은 장래에 번역 텍스트를 중심으로 하여 문학의 국적 문제는 다시 논의의 대상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본다. 어떤 언어로 창작했느냐는 문제 또한 모호한 지대를 남기고 있어 ‘언어’ 역시 문학의 국적 문제를 결정하는 본격적인 변별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가들의 존재 때문이다. 김용익이나 안정효와 같은 이중국어 구사자들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 문제는 지면 관계상 단지 언급하는 데에 그치기로 한다.
이러한 문제점의 잠재를 인정하는 자리에서 위에 든 대로 ‘이산’의 경험을 통하여 한국 국경 밖에서 외국어, 그중에서도 특히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한 한국계 미국인 또는 재미 동포 작가를 ‘한국계 미국작가’ 라는 이름하에 소개하기로 한다.
II. 한국계 미국 작가의 계보학
한국계 미국 문학이 기여한 바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월터 류(Walter Lew)는 한국계 미국 문학이 영어로 번역된 한국 문학작품보다도 훨씬 효과적으로 서구 독자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려주는 기능을 담당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예로서 강용흘의 『초당 The Grass Roof』이 20개 국어로 번역된 점을 든다. 초기 한국계 미국 작가로는 류일한, 강용흘, 김난영 등을 들 수 있다. 초기 한국계 미국 문학의 대표적인 주제로서는 ‘미국 문화에의 적응문제 acculturation’, ‘세대간의 간극 generational stratification’, ‘자아에 대한 추구 quest for self-identity’ 등을 들 수 있다. 류일한의 글은 자전적인 것으로서 전통적인 문학으로 보기 힘든 점이 있으나 강용흘의 경우는 훌륭한 문체와 문학적인 감수성을 보여 주고 있어 한국계 미국 문학의 한 전범이 된다. 더 나아가 강용흘은 한국계에 한정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하게 아시아계 미국 문학의 한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필리핀에서 이주해 온 칼로스 불로선(Carlos Bulosan)은 자신의 자전적 소설, 『미국은 내 가슴에 America in In my Heart』에서 “강용흘이 그렇게 좋은 작품을 썼는데 나라고 그처럼 되지 못하라는 법이 있는가”하고 실명으로 강용흘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강용흘은 아시아계 이민 금지법이 발효되기 불과 3년 전인 1921년에 단돈 4달러를 들고 미국에 단신으로 이주해 온 경우이다. 그는 초기에는 한국어와 일본어로 작품 쓰기를 시작했다가 이후 1928년 경 부터 웨슬리대학 출신의 명문가 여성인 아내, 프랜시스 킬리(Francis Keeley)의 도움을 받으며 영어로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1931년에 『초당』을 발표하고 1937년에는 『동양 사람 서양에 가다 East Goes West』를 발표하였다. 일레인 김(Elaine Kim)은 강용흘의 작품이 “아시아계 미국 문학의 새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강용흘은 이민자로서도 또한 소수 인종 미국 작가로서도 드물게 보는 성공적인 인물이었다.
미국명 ‘리처드 김’인 김은국은 『순교자 The Martyred』 『심판자 The Innocent』 『빼앗긴 이름 Lost Names』 등의 작품을 남기며 한국계 미국작가로서의 위상을 분명히 하였으나 이후에는 논픽션으로 기울었다가 더 이상 창작 활동을 하지 않은 경우이다. 그는 주로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썼다. 아이오와대학의 문예창작 석사학위 작품이었던 『순교자』는 한국전쟁을, 『심판자』는 5․16 군사쿠데타를, 그리고 『빼앗긴 이름』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한 글로리아 한(Gloria Hahn)이라는 이름도 사용한 김난영(Ronyoung Kim)은 192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에 사망했다. 그의 『토담 Clay Walls』는 그가 암 선고를 받고 쓰기 시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초기 이민 세대의 고난과 역경, 그리고 여전히 식민지국가였던 조국에 대한 애착을 그리고 있으며 동시에 급속히 미국화 되어가는 자녀 세대에 대한 묘사도 담고 있다.
김용익은 1920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하여 한국, 일본, 미국에서 수학하고 한국과 미국에서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 언어로 창작활동을 한 작가이다. 김용익의 대표작인 『푸른 씨앗 Blue in the seed』은 1964년 미국의 리틀 브라운(Little Brown)사에서 출간되었다. 이후 이 작품은 1966년 독일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덴마크 교과서에 게재되었다. 1967년에는 ‘오스트리아 정부 청소년 명예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의 한글판은 같은 제목으로 1991년 샘터사에서 간행되었다. 김용익은 한국적인 소재를 모티프로 하여 한국의 풍습이나 문화를 충실하게 재현해내는 문학 작품을 남겼다. 그런 면에서 그는 독일어로 창작 활동을 한 이미륵에 비견된다 할 수 있다. 『꽃신』 또한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데 사라져가는 전통의 아름다움과 장인 정신을 고집하는 주인공, 그리고 전쟁의 황폐 속에서 전통이 파괴되는 모습들을 서정적이고도 압축적으로 그리고 있다.
위에 든 작가들이 초기 이민자들의 삶의 모습을 그리거나 한국적인 문화를 서구에 소개하는 작품들을 주로 창작한 반면 1950년대 이후 출생한 작가들의 작품 세계는 보다 다양하다. 이들에 이르면 주제와 기법 등이 훨씬 다양해짐을 볼 수 있다. 캐시 송(Cathy Song)은 1955년 하와이에서 출생한 이민 1세대의 후손이다. 그의 시집인 『사진 신부 Picture Bride』는 1983년에 출간되었는데 그는 이 시집으로 624명의 다른 경쟁자를 제치고 ‘예일 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e)의 그림을 연상시킬 만큼 시각적인 요소가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주로 다루는 소재는 가족, 세대, 여성의 목소리, 성의 복합성 등이다. 1957년생인 김명미는 1991년 첫 시집 『깃발 아래 Under the Flag』를 간행했다. 그의 시는 한국어와 영어라는 두 언어 사이에서 분열된 자아를 형상화하고 있다.
『딕테 Dictee』(1982)의 저자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김성곤 교수의 해설이 적절하다. “차학경은 『딕테』에서 식민지 시대 한국의 비참한 상황을 한국여성의 운명과, 한국이민의 애환, 그리고 모국어를 박탈당한 작가의 문제와 연결시켜 탁월한 문학작품을 산출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한국의 식민지 역사와, 한국인들이 당한 억압과 침묵과 고통을 미국사회 속 이민자 - 즉 자기 자신 - 의 상황과 병치시키고 있는 차학경의 『딕테』는 그 자체가 곧 작가와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뛰어난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차학경이 『딕테』에서 영어, 프랑스어, 한국어를 뒤섞고, 수많은 사진과 삽화들을 삽입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차학경의 소설은 구술역사, 기호학, 음성학, 샤머니즘, 여성적 글쓰기, 한국근대사 등이 복합서사와 다매체(사진, 그림, 편지, 회상 등)를 통해 잘 어우러지면서 탈식민주의와 다문화주의 시대에 어울리는 문학적 성과를 성취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미국대학에서 크게 각광받고 있다.”
혼혈 작가인 하인츠 인수 펭클은 1996년에 발표한 처녀작 『나의 유령 형님의 기억 Memories of My Ghost Brother』에서 60년대 부평의 미군기지에서 성장한 혼혈아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그 밖에도 소설가 이창래(Chang-Rae Lee), 게리 박(Gary Park), 패티 김(Patti Kim), 미라 스타우트(Mira Stout), 돈 리(Don Lee), 노라 옥자 켈러(Nora Okja Keller), 수잔 최(Susna Choi), 타이 박(Ty Park), 헤리 리(Hellie Lee), 수키 김(Suki Kim) 등을 들 수 있다. 헤리 리는 『쌀이 있는 조용한 삶 Still Life with Rice』를 썼고 패티 김은 『릴라이블 이라는 이름의 택시』를 썼다.
활약이 가장 돋보이는 작가는 미국의 권위 있는 ‘헤밍웨이상’ 등을 휩쓴 이창래일 것이다. 이창래나 게리 박은 그들이 ‘한국계 미국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미국이 다문화주의를 강조하게 됨에 따라 그 혜택으로 소수 인종 작가가 부상하고 있다는 편견, 즉 작품 외적 이유로 평가된다는 견해에 대한 반발로 이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앵글로 색슨계 백인 미국인은 그냥 ‘미국인’이고 다른 민족성의 미국인은 ‘민족성을 표시하는 한정사를 동반하는 미국인’이 되어야 하는 인종적 편견에 대한 저항일 수도 있다. 사실 이 작가들의 문체나 문학적 완성도는 미국 문단의 주류를 형성할 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래의 『원어민 Native Speaker』의 경우, 한국계 미국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주변인의 분열된 정체성을 그린 것이 사실이고 『제스처 인생 A gesture Life』 또한 아시아의 역사가 소재로 활용된 것이 사실이다. 게리 박의 문학 또한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자인 한국 이민 1세대에 대한 이해가 그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가족 Aloft』은 ‘한국계’라는 한정사 없이 ‘미국 작가’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이창래의 희망에 부응하듯 비 아시아계 미국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바야흐로 한국계 미국 문학은 이제 전성기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며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2개 국어 이상을 구사하는 한국 작가들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다문화적인 통찰력은 이제 구호로서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국경 없는 세계’의 도래를 앞당길 것이다. 한국 문학의 범주와 위상을 세계문학의 틀 안에서 재고해 보아야 할 시대가 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