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한구_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1945년생. 저서 『역사주의와 역사철학』 『지식의 성장』 등
내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만난 것은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난 후 잠시 쉬는 기간이었다. 그 안에는 감동적인 두 개의 메시지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의 삶은 자아를 찾아 실현하는 자아실현의 과정이라는 메시지였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추구하는 신은 선과 악, 밝음과 어두움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메시지였다.
『데미안』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내가 살아 갈 어떤 운명 같은 길을 어렴풋이 본 듯했다. “모든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이며, 길을 가고자 하는 시도이며, 오솔길의 암시이다. 일찍이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각자가 할 수 있는 대로 어떤 사람은 우둔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현명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당시 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대한 의문으로 철학을 전공하려고 마음먹고 있으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의 정체성 문제로 방황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때 우리의 삶 자체가 자아를 찾아 실현하는 과정이라는 메시지는 깊은 감동으로 와 닿았던 것이다.
지금도 일상의 일들에 쫓겨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때, 나는 가끔 자아를 찾아 실현해야 할 나의 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것은 아닌지,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인지, 의미 없는 사소한 일들에 매달려 내가 가야할 길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이러다가 내가 끝내 사람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나 물고기나 도마뱀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닐지, 반문하곤 한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어릴 때부터 새를 좋아했다. 작은 참새로부터 까치, 까마귀, 독수리 모두 좋아했다. 나는 이들의 귀여운 모습뿐만 아니라, 하늘을 나는 이들의 비상을 특히 좋아했다. 나는 가끔 꿈속에서 한 마리 새가 되어 미지의 넓은 세계를 향해 나르곤 했다.
그렇지만 나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온다는 것이 암시하는 바를, 그리고 아프락사스를 향해 날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데미안』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Abraxas)이다”
새가 알을 깨고 탄생한다는 것, 태어나려는 자는 이와 같이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는 것을 공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프락사스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신이자 악마이며,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모두 자기 안에 내포하고 있는 절대자였다. 이것은 분명 기독교의 신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불교 집안에서 자라온 나는 기독교의 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위의 친구들이 온통 기독교인으로 둘러싸인 상황이었지만, 그리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세상살이에도 아주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형태의 어떤 것이었다. 나는 그 희미한 모습을 절대자 아프락사스에서 보았던 것이다.
반쪽의 세계만을 대변하는 신이 완전한 신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 나에게는 너무나 자명했다. 절대자는 선과 악, 미와 추, 참과 거짓, 시와 비,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하며, 모든 것 속에 내재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일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일 수 없었다. 우파니샤드와 스피노자의 범신론, 그리고 융의 심리학을 섭렵한 후에야 나는 아프락사스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으며, 나와 우주의 전일적 합일에서 자아가 완성된다는 교설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고, 마침내 범신론자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