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박윤규_시인, 동화작가. 1963년생. 동화 『버들붕어 하킴』 『산왕 부루』 『주목나무 공주』 『내 이름엔 별이 있다』 등
바다가 환히 보이는 대밭입니다.
나는 몸을 산비둘기만하게 움츠린 채 대밭에 내려앉았습니다. 하지만 대나무들은 나를 볼 수 없을 겁니다. 대나무들은 백 년에 한번 꽃을 피우는데, 꽃을 피워야만 내 모습을 볼 수 있거든요. 물론 이들 대나무 가운데서 누군가가 큰 깨달음을 얻어야만 모두들 꽃을 피울 수 있답니다. 대나무들은 저마다 뿌리와 뿌리가 연결되어 있어 한 나무처럼 꽃을 피우기도 하고 한꺼번에 죽기도 하거든요.
아참, 내 소개를 안 했군요.
나는 봉황이랍니다. 하늘나라와 세상을 마음대로 오가는 새들의 임금이지요. 우리들 봉황은 벽오동에 둥지를 짓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살아요. 오색찬란한 날개는 집을 덮을 만큼 크지만, 참새처럼 작게 움츠릴 수도 있지요.
내가 나타나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만 가득하답니다. 큰 깨달음이 이루어진 곳이나, 어진 군자가 정치를 잘하여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곳에만 나타나거든요.
오늘 나는 큰 기대를 품고 대밭에 왔습니다. 이 대밭 옆에는 조그만 절이 있는데, 이 곳의 스님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군요. 그리고 스님들을 본받아 이 대밭의 대나무들도 열심히 공부했다니, 기대가 클 수밖에요.
그럼, 대나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까요.
“우리는 거의 백 년을 살았습니다. 이제 꽃을 피울 때가 되었지요. 이 땅의 삶을 찬란하게 마감하고 더 차원 높은 삶을 찾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꽃을 피우려면 누군가 먼저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모두 백 년 동안 공부한 대로 얘기해 보세요.”
검은빛을 띤 대나무가 말했습니다.
대나무들이 웅성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선뜻 먼저 입을 열지 않네요. 공부가 남보다 못하거나 헛되다는 말을 들을까봐 두려워하는 눈치로군요.
아, 누군가 가지를 흔들며 말을 시작합니다. 연둣빛 대나무로군요.
“대나무는 모든 나무 중에서 으뜸입니다. 그 이유는 요리를 해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 가운데서 요리를 해먹을 수 있는 건 우리밖에 없습니다. 살이 단단해지기 전에 잘라서 구워 먹기도 하고, 삶아서 무쳐 먹기도 하지요. 이런 죽순 요리를 먹어 본 사람들은 소나 돼지나 양 요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곳에 뿌리박고 사는 식물임에도 동물보다 위대합니다. 사람들이 대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많은 대나무들이 가지를 흔들어 환호성을 지릅니다.
이때 보랏빛을 띤 대나무가 빈정거리는 투로 참견하는군요.
“유치하게 먹을거리 타령이나 하다니, 순 헛공부를 했군요. 대나무는 무엇보다도 쓰임새가 많습니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워서 뭐든 만들기가 좋거든요. 지팡이, 광주리, 필통, 붓, 대자리, 궤짝, 죽부인, 부채, 빗자루 등등 못 만드는 게 없습니다. 대나무처럼 세상살이에 도움을 주는 나무는 없지요. 그러니 사람들이 대나무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많은 대나무들이 옳다며 가지를 흔드는군요. 하지만 연둣빛 대나무 때보다는 소리가 작네요.
다음은 초록빛 대나무가 주장을 펼칩니다.
“백 년을 공부하고도 세상살이에만 매달려 있다니 참 한심하군요. 대꽃을 피우려면 예술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대나무를 사군자 가운데 하나로 치며 좋아하는 것도 예술성 때문입니다. 세상이 눈으로 하얗게 덮힌 겨울에도 우린 푸른 절개를 지킵니다. 또 바람에 술렁이는 대밭 위로 보름달이 떠 있으면 얼마나 운치가 좋습니까. 사람들은 이럴 때 시를 쓰고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대나무의 몸통 가운데 가장 어여쁘고 단단한 부분을 잘라내서 피리를 만듭니다. 그 소리가 울려퍼지면 사람과 학이 어우러져 춤을 춥니다. 백 년 동안이나 공부를 했다면 적어도 이러한 멋과 아름다움 정도는 알아야지요.” (중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