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현종   © 운영자

1.
평화를 위하여 시는 우리에게 “잘 듣기 listen well”를 권한다. 잘 듣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러나 평화를 위해서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하고 그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그의 한 단상에서 “올바른 생각이란 잘 듣고 하나의 행동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다 Sound thinking is to listen well and choose one course of action”이라고 했는데, 이 말의 핵심은 물론 잘 듣는다는데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잘 들어야 올바로 생각할 수 있고 올바로 생각해야 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개인에서부터 수많은 이익/이념집단들을 거쳐 국가권력에 이르기까지 올바로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지 않아 평화가 깨지고 비참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니, 올바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는 중요한 출발점인 그 경청 - 잘 듣기 - 은 의외로 중요한 마음의 움직임임을 알 수 있다.
2.
잘 듣는다는 것은 정치적인 함의에서부터 예술창조과정 그리고 어떤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치지 않는 데가 없는 태도인데, 우선 정치적/사회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잘 듣기는 나와 남(이 한 쌍의 말은 예컨대 집단, 민족, 국가 따위의 모든 단위/종류의 이해 당사자들을 대표한다)이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가 피해를 최소화하는 능력이다. 일방주의는 결국 양쪽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며 사태를 그르친다. 평화가 깨지는 것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마음이 살아 있다는 것이며, 살아 있는 마음이 민감하게, 마음을 다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반대로 잘 듣지 못한다는 것은 마음이 무디어져 있다는 것, 죽어 있다는 걸 뜻하며 따라서 그 사람은 산송장이라는 말이다.
한 사회의 공공생활이나 전 지구적 차원의 공공생활에서 개인이나 집단이나 국가들이 다른 사람/집단/국가에 “지나치게” 피해를 줄 때,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무딘 마음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일 터인데,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느낌과 판단의 마비의 정도가 점점 더 심해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나는 지울 수 없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겠으나 가령 내가 일하고 있는 캠퍼스에는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질주한다. 학생들이 타고 질주하고 학생들이 밥을 시켜먹느라고 음식점 오토바이들이 음식점 깃발을 달고 질주하며 또 직원들이 타고 다닌다. 걸어서 10~15분이면 어디나 갈 수 있는 거리이다. 자동차 매연의 2백 몇십 배 되는 독성을 내뿜는다는 오토바이 매연은 숨을 쉴 수 없게 하고 그 소음은 귀가 찢어지게 커서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학생들에게 스스로 오토바이 안타기 운동과 밥 시켜먹지 않기 운동을 좀 펼치자고 호소하고 종용하지만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자기네 귀에는 그 소음이 들리지 않고 그 냄새가 맡아지지 않고 남에게 참을 수 없는 피해를 준다는 느낌이 없기 때문에 타고 질주할 것이다. 자기의 편익만을 위해 행동할 때 그 행동은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집단들과 국가들 사이에서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폭력은 폭력을 부르며 폭력의 악순환은 계속된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과 폭력은 끊이지 않았지만, 그 살상과 파괴의 비참함을 보면서 인류가 저지르는 어리석음과 비극을 스스로 보도록 선명하고 힘있게 표현하는 문화적인 노력 또한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전후해서 런던, 로마,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등지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전시위 - 침묵하던 다수의 외침을 전쟁을 수행하는 이른바 국가지도자들이 ‘잘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 와 같은 빛나는 민심(民心)의 집단적인 표현이라든지 간디나 톨스토이, 버트런드 러셀 같은 두드러진 개인들의 말과 글과 행동 그리고 문학, 영화, 음악, 미술 등의 예술작품과 공연 및 충격적인 보도사진 등이 있다. 그리고 항상 그렇지만, 예술은 느리고 간접적이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항구적으로 인성(人性)에 작용해서 평화를 비롯한 인류의 선의와 그 꿈에 눈을 뜨도록 미의지(美意志)에 힘을 모아왔다고 할 수 있으며 시 역시 마찬가지이다.

3.
시의 목소리는, 폭탄 터지는 소리와 상품 광고와 자동화된 기계들의 소리 따위에 묻혀 잘 들리지 않지만, 그래도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얘기하는 평화를 위해서는, 그것이 우리의 열망인 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 자본, 자원, 종교 따위를 위해 점점 더 호전적/배타적/광신적으로 되어가는 현대세계에서 시(예술)는 그러한 것들과 대조되는 가치와 태도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시’라는 말은 실은 호전/배타/광신의 반대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는 “나”가 타자와 전체에게로 확대되고 나와 나 아닌 것,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는 에로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가령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서 보듯이 다른 것들과 한 몸이어서 마지않는 크나큰 동화(同化)의 세계.
또 시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의 무디어진 마음에 생기를 불어 넣고 타성적이고 자동화된 의식에 충격을 주어 사물에 대한 느낌을 예민하게 하고 세계의 새로움에 놀라게 하면서 감정의 진정성과 인식의 경이 속에 있게 한다.
아시다시피 시인을 견자(見者, voyant)라고 한 시인이 있지만, 뿐만 아니라 시인은 또한 “듣는 사람”이기도 하다. 마음 안팎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하면 시를 쓰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를 볼 때도 시인은 그걸 볼 뿐만 아니라 또한 나무를 들어야 한다. 슬픔과 비참의 현장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만사(萬事)와 만물을 보면서 동시에 들어야 그 실상(實相)에 다가갈 수 있다.
위에 쓴 얘기들의 예증이 되는 작품은 많겠으나 나는 여기서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의 작품을 읽어볼까 한다. “나는 희망에 관해 말하려고 한다 I Am Going to Talk about Hope”의 전반부이다.
나는 세사르 바예호로서 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이제 창조하는 인간으로서 괴로워하지 않으며, 한 인간으로서도, 심지어 살아있는 존재로서 괴로워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천주교 신자나 회교도로서 또는 무신론자로서 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오늘 나는 그냥 아프다. 내 이름이 세사르 바예호가 아니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걸 느낄 것이다. 내가 예술가가 아니어도 역시 그걸 느낄 것이다. 한 인간이 아니더라도, 심지어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더라도, 무신론자가 아니고 회교도가 아니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걸 느낄 것이다. 오늘 나는 저 깊은 데서부터 아프다. 오늘 나는 그냥 아프다.
내 아픔은 설명할 길이 없다. 내 아픔은 너무 깊어서 원인이 있은 적이 없고, 원인이 있을 필요도 없다. 그 원인이 무엇일 수 있었을까? 그다지도 중대한 나머지 그 원인이기를 그친 그런 것이 어디 있을까? 그 원인은 무(無)이며, 무도 그 원인이 아닐 수 있다. 왜 이 아픔은 순전히 그 스스로 태어난 것일까? 내 고통은 북풍에서 오고 남풍에서도 온다. 어떤 희귀조(稀貴鳥)가 바람을 배서 낳는 저 자웅동체의 알들처럼. 내 신부가 죽었다고 해도 내 고통은 여전하리라. 말을 바꿔서, 인생이 달랐다고 하더라도 내 고통은 똑같을 것이다. 오늘 나는 저 높은 데서부터 아프다. 오늘 나는 그냥 아프다.
이 작품에 대해서 나는 군말을 덧붙이고 싶지 않지만 이 작품 앞에서는 그 동기가 수상한 아픔들은 순식간에 퇴색하는 걸 보며, 그 앎이 처절하리만치 철저하고 그 진정성이 유례 없이 가차 없는 것이어서 그 어떤 수식어도 허용하지 않는 고통을 만난다(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전쟁과 테러의 위협 아래 있는 세계에서 그 아픔의 울림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릴케의 시 한 구절과 아메리카 인디언 시인인 해롤드 리틀버드의 시 한 구절을 읽으면서 내 이야기를 마치려고 한다.

우리가 이길 때 그건 작은 일들로 그러한 것이며`
그리고 승리 바로 그것이 우리를 작게 만든다.
When we win its with small things
and triumph itself make us small.
- Rilke

시간을 잴 시계는 없다
우리의 노래하는 가슴의 고통 외에는.
There are no clocks to measure time
but the beating of our singing heart.
- Harold Littlebird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