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지역을 지나다 보면 으레 “베트남 처녀와 결혼 하세요”나 이와 비슷한 말이 들어 있는 현수막 광고를 보게 된다. 농촌 총각 네 명 중 한 명이 외국인 여성과 결혼한다는 최근의 소식을 보면 이제 단일민족이라는 전통적인 한국인의 개념이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또한 대도시 주변에서 하층 노동자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하는 여러 목소리를 듣는 것이 낯선 것이 더 이상 아님을 생각해보면 농촌 지역 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외국인들은 우리 사회의 내부에 깊이 들어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외국인은 이제 합법적인 체류 신분을 갖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60만을 넘어서고 있으며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외국인의 존재를 고려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서 살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이나 일본, 중국 뿐 아니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 나가서 살고 있으며 이들 역시 한국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서 일본이나 중국,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국적을 갖고 있지만 과거에 조상이 한국에서 왔기 때문에 일정한 정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재일교포, 조선족, 고려인 등도 한국 사회나 한국인의 문제를 고려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농촌에 거주하는 베트남 출신의 여성, 파키스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조선족이나 고려인 등 이들 모두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사회의 주류는 아니면서도 한국 사회의 위상을 새롭게 하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문제를 고려하게 하는 것이 바로 디아스포라(Diaspora) 문제이다. 이 글에서 나는 이산(離散)이나 이주민(移住民) 등으로 옮길 수 있는 디아스포라의 집단의 문제를 이의 역사를 중심으로 개괄적으로 논의하려 한다.
1. 디아스포라의 역사
디아스포라(diaspora의 영어식 발음은 [daǽspərə]이지만 대개 한국어로 ‘디아스포라’라고 쓰고 있기 때문에 이글에서도 이를 따른다)는 그리이스어의 diasperien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은 ‘넘어서는’이란 뜻의 dia와 ‘흩어 뿌리다’란 뜻의 sperien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디아스포라란 경계를 넘어서 흩어진, 말하자면 추방이나 이주 등의 이유로 고향에서 떨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원전 3세기 경 바빌로니아의 포로로 잡혀서 고향땅인 팔레스타인을 떠나 알렉산드리아에 살게 된 유태인 집단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어지기 시작했던 이 말은 조국을 갖지 못한 채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태인 집단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었다. 유태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유지하면서 유태인 공동체를 상당한 정도 유지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박해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이유로 이산의 삶을 살고 있는 유태인 집단을 의미하는 디아스포라는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유배인 집단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유태인들을 염두에 둔 디아스포라가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의 유태인 유배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가 지배적이 된 현대에서 디아스포라를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집단은 흑인 디아스포라이다. 인디언 원주민을 거의 멸종 단계에 이르게 하면서 아메리카 식민지를 확보한 서구인들은 식민지 농장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16세기부터 노예무역의 형태로 약 1200만 명 정도의 아프리카 흑인을 남북 아메리카와 서인도 제도에 옮겨 심는다. 이들 흑인 노예들과 그 후손들은 19세기 중엽 노예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식민주의 과정을 거치는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 서구인들을 위하여 희생되며 19세기 중엽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아프리카로 돌아가지 못하고 아메리카 각 지역에 남아서 고향 잃은 집단으로서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형성한다. 흑인 디아스포라는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남아메리카에서 북아메리카로, 서인도 제도에서 영국 등 유럽으로, 농업지역에서 공업지역인 도시로, 또 경우에 따라서는 아메리카에서 다시 원래 고향인 아프리카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동하게 되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흩어진 공동체로서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19세기 중엽까지 노예무역에 의하여 식민주의적 자본주의가 유지되면서 확대되고 있었다면 노예제 폐지 이후에 나타난 디아스포라는 아시아 사람들에게 주로 해당된다. 노예제 폐지로 인하여 흑인 노예 노동력의 확보가 어려워지자 서구 식민지 경영자는 이제 한국의 노동자까지 포함하여 주로 인도와 중국인들을 노예 노동과 거의 다름없는 계약노동(indentured labor)의 형태로 아메리카 식민지와 남아프리카 식민지에 이주시킨다. 주로 19세기 후엽부터 20세기 초까지 진행된 아시아인의 이주 역사에서 이들 계약노동자들은 법적인 면에서는 자유인이지만 정치, 경제, 문화의 면에서 서구의 식민지에서 억압받는 하층민 집단을 형성하면서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한다. 이들과 이들의 후손 역시 흑인 디아스포라와 마찬가지로 고향 잃은 채 유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디아스포라 현상을 고려할 때 중요 집단이 된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디아스포라 현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의 분화와 주로 관련된다. 20세기 중엽에 식민주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식된 이후 과거 피식민인들은 성공의 기회를 찾아서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 등 식민주의의 중심지로 이주한다. 그러나 인종주의와 언어의 장벽 등으로 인하여 이들 이주민들은 백인 주류 집단이 기피하는 직종에 종사하게 됨으로써 사회의 주변부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디아스포라 현상은 서구뿐 아니라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된다. 일본에 이주하여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는 타이, 필리핀, 한국의 여성들은 대다수 일본인과 구분되는 집단을 형성하며 이주인의 삶을 살아간다.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 대규모로 나타나기 시작한 이주 노동자나, 필리핀이나 러시아 여성들이 종사하는 직종이 한국의 주류 집단이 기피하는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사회 구조에서 중상층 구조를 받들어 유지하는 하층구조를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지구화로 요약되는 20세기 말에 가속화된 인구, 자본, 문화, 이데올로기의 유동을 고려하면 고향 상실을 의미하는 디아스포라는 이제 전방위적, 전계층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현상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 된다고 볼 수 있다.
2. 민족국가 체제에 도전하는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 집단은 근본적으로 경계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 상실이 디아스포라 집단을 규정하는 일차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디아스포라 집단은 고향으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 집단을 더 이상 디아스포라 집단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아스포라 집단은 고향에 대해 일정한 정도 소속감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타향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에서 고향과 타향의 중간 지대에, 즉 경계에, 머무르고 있는 집단이다. 여기에서 고향이란 현대적 의미에서는 19세기 이후 체계화된 민족국가가 되며 타향 역시 현재 그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다른 민족국가이다. 따라서 디아스포라는 어떤 면에서는 이중의 민족 정체성 -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계 이민자의 경우 그의 정체성은 한국적 정체성과 미국적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셈이 된다 - 을 갖는다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어느 한쪽에 전적으로 소속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민족국가적 정체성이 없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경계인의 정체성을 염두에 두면 20세기 후반 이후 민족국가의 균열과 해체를 논의하는 초민족 또는 지구화 담론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요소가 디아스포라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교통과 미디어의 발달로 인구, 자본, 문화, 정보, 이데올로기 등의 영역에서 교류가 가속화되어 있는 현재 전통적 의미에서 민족국가는 그 장악력을 상당한 정도 상실하고 있다. 초민족 담론이 민족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자본과 노동의 흐름을 중심으로 논의하면서 이에 나타나는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의 규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디아스포라 담론은 여전히 인간 집단의 유동과 그에 따르는 새로운 정체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의 디아스포라에 대한 논의가 고난받는 유배자 집단의 삶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면 초민족 담론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디아스포라 담론은 그들이 갖고 있는 이질적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억압적 체제로서의 민족국가 체제에 문제를 제기하는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디아스포라 집단은 그들이 속한 민족국가의 가치에 동화되기를 거부한다. 또한 동시에 그들이 원초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 조상이 속해 있던 지역의 민족국가적 가치에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디아스포라 집단 자신들이 고향에서 쫓겨났다는 의미에서 탈영토화된 존재들이라면 이제 이들 이질적 집단은 현재 자신들이 일정한 간극이 있는 상태로 속해 있는 지배적 민족국가 체제를 적극적으로 탈영토화 시키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탈영토화는 궁극적으로 민족국가 체제 아래의 정체성에 변화를 강요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게 한다는 점에서 재영토화를 촉구하는 작용이 된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대표적인 디아스포라 집단은 최하층 노동자 집단을 형성하는 이주노동자, 성매매 시장에서 착취를 당하는 러시아 여성, 자본주의 체제를 동경하였으나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탈북자, 한국의 하층 농민과 결혼한 동남아시아의 여성들일 것이다. 이들은 한국이라는 민족국가 체제의 한 부분을 형성하면서도 그 민족국가 체제가 강요하는 표준화된 정체성을 수용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정체성은 이제 한국 사회 내부로 들어온 이들이 갖는 이질성으로 말미암아 변화할 수밖에 없다. 이 변화는 단일민족국가로서의 한국에 균열을 가져오면서 동시에 서구 자본 중심의 단일체계로서의 지구화에 동화되지 않는 인종적, 사회적, 문화적 지역 집단을 유지함으로써 지구화의 흐름에 도전할 수 있는 지평을 제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