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봉 김기진    © 운영자

1903년에 태어나 1985년 영면한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의 여든세 해 삶은 한국 현대사의 파란 많은 굴곡과 그 역사의 무자비한 횡포에 휘둘려 굴절될 수밖에 없었던 현대문학사의 모순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사회주의에서 친일로 친일에서 반공과 친정권(親政權)으로의 변신 역정은 개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 인간의 기회주의적 처세술의 성공 과정이라 할 만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역사가 개인에게, 또 정치가 예술에게 가한 폭력의 한 궤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팔봉이 그 폭력의 수혜자인지 피해자인지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제정된 팔봉비평문학상을 둘러싸고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시비의 소리는 그의 문학이 역사의, 혹은 개인적 처세의 희생물이었음을 증명해준다.
잘 알려진 대로 팔봉은 카프문학의 초기 맹주였다. 충북 청원에서 출생한 그는 많은 한국 문인들이 거쳐간 바 있는 일본 릿쿄(立敎)대 영문학부에서 수학 도중 박승희, 이서구, 김복진 등의 유학생들과 손을 잡고 토월회(土月會)를 조직하였고 곧이어 신문학운동의 중심이었던 ‘백조(白潮)’ 동인으로도 참가하게 된다. 카프는 김두수, 박용대, 심대섭 등이 중심이 된 염군사(焰群社)와 박영희, 안석영, 김복진, 김기진 등이 주도한 파스큘라(PASKYULA)가 결합하여 1925년 결성되었는데 정작 카프가 한국문단의 주류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부터 팔봉의 문학은 비주류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팔봉이 문학의 사회성을 기계적으로 강조하는 좌익교조주의자들과 거리를 두고 소설건축론, 대중화론 등을 통해 현실 대중과 유리되지 않는 문학을 주장하는 한편 문학이 단순한 정치 선전의 도구에 머무르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1940년 무렵부터 친일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 조선언론보국회 등에서 활동하며 보인 팔봉의 친일 행적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해방 후 친일파로 분류돼 괴로움을 겪던 팔봉은 6·25가 터지고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면서 ‘인민의 적’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은 뒤 인민군들에게 몽둥이로 얻어맞고 거리에 버려졌다 기적적으로 소생한다. 그때의 처참한 모습은 제1회 팔봉비평문학상 수상자였던 김현이 병석에서 남긴 유명한 수상연설에서 “뜨거운 상징”이라고 지칭한 바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 찍혀 남아 있다.
전후 팔봉은 경향신문 주필, 펜클럽한국본부 부위원장, 재건국민회 중앙위원장 등을 역임했지만 자신의 문학적 노선을 나타내는 평론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자신의 이념적 선택과 전향에 대해 그는 “나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오늘의 문학’이 있고 ‘내일의 문학’이 따로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회현실이 지리멸렬할 때는 문학도 사회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오늘의 문학’이 되어야 하고, 그 결과 사회현실이 개조된 뒤엔 ‘내일의 문학’을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남이 뭐라 해도 나는 그때 ‘오늘의 문학’을 했던 것에 후회함이 없습니다”라고 변호한 바 있다. 팔봉의 이름을 거론할 때 항상 따라붙는 친형 김복진은 한국 현대조각의 효시이자 토월회 설립에서 카프 결성에 이르기까지 줄곧 함께 한 팔봉의 예술적 동반자였고, 초기 카프의 노선을 주도했던 이론적 지도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