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본지에서는 광복 60주년을 기념하여 해방 전후 우리 문단의 분위기와 이를 맞이하던 문인들의 초상을 인하대 윤영천 교수의 글로 지난 호부터 2회에 걸쳐 연재한다.
4.
해방 직후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일제 강점하에서 만주·일본·러시아(구 소련 연해주 및 중앙아시아) 등지로 떠나갔던 대규모 유이민 또는 전재민들의 귀향 시편이다. 이는 가령 「해빙기의 재령강반」(『동아일보』 1935. 2. 14)을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농민의 비애를 실감 있게 묘파한 민병균(주요 시집으로 『나의 노래』[국립인민출판사, 1949], 『어러리벌』[문예총출판사, 1953], 『민병균 시선집』[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8] 등이 있다)의 「고향」(1946. 3; 『서정시 선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5)이나 김우철의 「꽃다발」(1947. 3. 26; 『나의 조국』, 문화전선사, 1947) 같은 ‘재북시인’들의 작품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후자는, 1937년 스탈린 정부에 의해 원동(遠東; 연해주)으로부터 저 머나먼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벌판으로 내몰렸던 ‘고려인’의 귀환을 격동적으로 노래한 시편인데, “오로라 빛나는 북방의 붉은 군사”(제3연) ‘쏘련 해방군’과의 동반귀국 정경이 꽤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들 귀향유이민 시편과는 또다른 류의 서사송가(敍事頌歌)로서 ‘김일성 항일빨찌산투쟁 및 국내진공’을 열혈적으로 노래한, 조기천의 『백두산』(1947), 한명천의 『북간도』(문화전선사, 1948) 등을 아울러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박산운은 시 「고향에 돌아와서」(『신천지』, 1946. 6)를 통해 국외로부터 귀향한 남성 화자가 황폐한 고향의 퇴락상을 “모이면 웃통 벗고 씨름이나 하던 / 백두산 직계―나의 동무들”, “훌륭한 젖꼭지를 가진 처자들” 등의 생동하는 육체적 이미지를 통해 돌올하게 형상한 바 있다. 경남 합천 태생으로 1948년 월북한 그는 『버드나무』(조선작가동출판사, 1959), 『강철의 길』(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9), 『내가 사는 나라』(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2) 등의 시집을 냈는데, 「남의 나라」(1948), 「38선을 넘으며―구두를 두고」(1949) 등이 특히 인상적이다.
해방된 조국을 되찾은 귀향유이민 현실은 실로 참담무비한 것이었다. 그 절박한 사정을 박세영은 “추울세라 따뜻한 골방에서 왜놈은 길러줘도 / 고국이라 찾아온 동포들은 / 갈곳없어 한데서 잠자거니”(『서울 부감도』, 『신문학』, 1946. 11)라고 비창하게 노래하였다. 「아, 여기들 모였구나―야앵(夜櫻)은 시민의 마음을 떠봤다」(1946. 4. 6; 『진리』, 문화전선사, 1947)에서도 분명해진 바이지만, 1946년 6월 월북(『박세영 시선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6, 343면)한 이 시인은 “친일파, 반역자, 모리간상배들”(윗시 제2연)이 판치는 해방기 혼란의 원천을 다름아닌 ‘친일파의 새로운 발호’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당시 남한의 대대적인 사회정치적 이슈로 떠오른 이 문제는, 『부일협력자처단법수정안』(1947. 5. 20)이 미군정에 의해 구성된 과도정부입법의원에 단지 상정되는 것으로 곧 흐지부지되었다. 「반민족행위자처벌법」(1948. 9. 7)의 발효와 함께 최남선·이광수가 검거(1949. 2. 7)되는 등 한때 그 시행이 본격화하는 듯하다가, 결국 ‘반민특위’가 친일경찰에 의해 포위·해체(1949. 5. 29~6. 6)되고 뒤미처 김구 피살사건(6. 29)이 터지는 와중에서 이 문제는 해방기 역사에서 완전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1947년에 들면서 ‘잘못된 해방’이라는 시적 인식이 부쩍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훗날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등의 구차한 이념적 전향 절차를 거쳐 6?25 전쟁 중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임학수 시인에게서 그것은 “또하나 8·15”(「다시 8·15에」, 『한성일보』, 1947. 8. 15)로 표상되어 나타난다. 그는 영문학 전공자로서, C.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의 모험』(조선문학예술서적출판사, 1958), G.G. 바이런의 『챠일드 하롤드의 편력기』(국립문학예술서적출판사, 1959), 『바이론 시선』(문예출판사, 1991) 등을 번인함으로써 북한 번역문학의 초석을 든든히 다지는 뚜렷한 족적을 남기었다.
김윤식의 적절한 표현처럼 해방기란 “국가라는 가장 원초적인 체제 선택이 가능한 희유한 역사공간”(「해방 후 남북한 문화운동」; 김윤식 편, 『해방공간의 문학운동과 문학의 현실인식』, 한울, 1989, 30면)이었다. 김동석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균형을 얻은 실력선”(『예술과 생활』, 박문출판사, 1948, 151면)이라 명명한 ‘38도선’ 월북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조선프로문학동맹 서기장을 역임한 시인 박석정은, 1946년 초여름 ‘6·10만세운동’ 기념캠페인을 마친 직후 10여 명의 조선프로문학동맹 회원들과 함께 38도선을 넘은 것(송영, 『림화에 대한 묵은 론죄장』, 『조선문학』, 1956. 3)으로 보이는데, 「월경 도중」(1946. 6; 『개가』, 문화전선사, 1947)은 그 뚜렷한 시적 기록이다.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 모더니스트로서 노예처럼 ‘국책이민열차’에 실려 북간도로 끌려가는 유이민의 비애를 실감나게 노래한 바 있는 조령출은 일종의 ‘실기(實記) 월북시’ 「38선을 넘어」(1948; 3부작 「북조선으로」 첫째편)를 남기었다.
우리는 지금
38선 패말이 섰는
황폐한 산협의 길을 뛴다
아무런 증명서 한 장 없이
쐐기에 찔리며
발톱에 피흘리며
살육의 총소리 귓전에 들으며
쏜살처럼
삼팔선을 넘었다
- (「38선을 넘어」 부분, 『조령출 시선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7, 25~26면)
“북으로 / 북으로 / 장단역을 떠나서 / 25키로”(제1연) 38도선을 도망치듯 숨가쁘게 넘어가는 정황이 또렷이 돋울새김되어 있다.
일찍부터 ‘쏘련해방군 조선진주’를 열렬히 예찬한 바 있는 임화(「발자국」, 『赤星』, 1946. 6)는 1947년 가을 무렵부터 평론가 이원조 등과 함께 황해도 해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남로당 북한선전책 및 서울 조선문학가동맹 지휘책임을 동시 수행하다가, 남북연석회의(1948. 4. 19)에 즈음하여 뒤늦게 평양에 입성(송영, 「림화에 대한 묵은 론죄장」, 『조선문학』, 1956. 3)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후 유엔한국위원회 감시하에 치러진 남한 ‘5·10선거’(1948. 5. 10)의 부당성을 폭로한 작품 「고향이여! 한층 더 아름다워라」(1948) 등을 발표(박남수 외, 『한 깃발 아래에서』, 문화전선사, 1950)하기도 했지만, 1953년 8월 3일 그는 결국 이승엽·설정식 등과 함께 “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행위”(앞의 『해방후 10년 일지: 1945~1955』, 165면)로 사형언도에 처해진다.
“카프문학의 혁명전통을 계승하고 위대한 쏘련의 선전문학을 섭취, 급진적으로 발전”한 해방 후의 문학적 성과를 한낱 “‘문학 이전’이라고 경멸·조소”하는 등 김남천·이태준과 더불어 반당적인 부르주아 문학노선을 추종한 자(송영, 앞의 「림화에 대한 묵은 론죄장」)로 그는 간단히 매도되었다. 문학의 레닌적 당성을 거부하고 “민족적이란 미명 밑에 문학의 초계급성과 창작의 정치로부터의 자립”을 제창(한설야, 「전후 조선문학의 현 상태와 전망」, 『제2차 조선작가대회 문헌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6, 12면)하는 등 소부르주아적 문학관을 공공연히 표명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5.
북한현대사에서 말하는 ‘평화적 건설시기’(1945. 8~1950. 6) 및 ‘조국 해방전쟁 시기’(1950. 6~1953. 7)를 통틀어 볼 때, 이 시기 북한문단의 주요 구성은, (1) 리찬·민병균·안룡만·리원우·김우철·박남수·양명문 등 ‘재북파’(넓게는 백석도 이에 포괄될 것이다), (2) 김조규·김북원·천청송 등의 ‘만주파’, (3) 조기천·정률 등의 ‘쏘련파’, (4) 조선프로문학동맹·조선문학가동맹 양대 산맥의 ‘월북파’ 등이다. 그러나 당시 북한문단의 추축은 역시 월북파, 그 중에서도 단연 조선프로문학동맹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무엇보다 그 문학노선상의 우위에 따른 결과적 현상이라 하겠는데, 상대적으로 임화 중심의 조선문학건설본부, 즉 조선문학가동맹 측의 부침은 매우 격심한 것이었다.
납북문인 이광수·김동환, 정치적 파란의 벼랑으로 내몰린 끝에 남로당 수뇌부 박헌영·이승엽 등 “미 제국주의자들의 고용간첩”(한설야, 앞의 글)으로 단죄돼 문학적 단명을 고한 임화·설정식 및 김남천·이태준, 1950년 이후에는 이렇다 할 문학활동이 거의 전무한 것으로 미루어 6·25 전쟁 중 사망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정지용·오장환·김동석·함세덕 등은 일단 차치하고라도, 특히 조선문학가동맹 회원 상당수는 남북한 문학사 양쪽으로부터 모두 ‘실종’되는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평안북도 정주 태생으로 해방 직후까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학풍』, 1948. 10) 같은 품격 높은 작품을 선보인 백석(1912~1995)이 북한문단에 본격 귀속되면서, 그나마 드문드문 시를 발표한 것은 고작 1961년까지에 불과했다. 유폐당하듯 1962년 이래 함경북도 삼수군의 한 국영농장 관리인으로 쓸쓸히 일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문학과 절연하였다. 1950년대 백석은 아동문학 평론 및 소련문학 번역에 주력함으로써 건강한 문학주의자의 위엄을 끝내 견지했던 것이다. 「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조선문학』, 1956. 5) 및 「작은 문제 큰 고찰」(『조선문학』, 1957. 6) 등은 전자의 대표적 사례이며, 후자의 주요 업적으로는 『이사곱쓰끼 시초』(1949. 12),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1~2(1949), 『레르몬또브 시선집』(조쏘출판사, 1956)과 『찌호노브 시선집』(조쏘출판사, 1957), 『쏘련시인선집』 1~3(공역; 국립도서출판사·국립출판사 1953~1955) 등이 저명하다.
조선문학가동맹 회원으로 1949년 8월, 시인 배호 등과 함께 조선문화단체총연합 서울지부 핵심요원으로 활동하다 피체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의 서울 점령시 풀려나 곧장 북한군과 동반 월북한 이용악(1914~1971)은 평판작 「평남관개시초」(1956) 등을 골고루 망라한 『리용악 시선집』(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7)을 출간하였다. 경남 거창 출신으로서 보도연맹에 가입해 있다 6·25 전쟁통에 북한 의용군에 입대해 월북한 김상훈(1919~1987)과 공동번역서 『풍요 선집』(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3)을 내기도 했으나, 아쉽게도 그는 해방기 이전의 시적 활력을 지속적으로 발현하지는 못하였다. 그 역시 북한 체제문학의 중압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병철(월북 후 펴낸 주요 시집으로 『내 삶의 한생은』[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5]이 있다)과 박산운·김광현·유진오 등의 합동시집 『전위시인집』(1946) 및 개인시집 『대열』(1947), 『가족』(1948) 등을 상재한 김상훈의 경우, 그 강한 이념적 지향에도 불구하고 서정성 드높은 『남쪽땅아』(1951), 「열무김치」(1980) 등의 우수 시편들을 담은 시집 『흙』(문예출판사, 1991)의 출간이 돋보인다.
일찍이 농촌 출신 제사(製絲) 여공의 깊은 애한을 처연하게 노래한 『가을』(『조선일보』 1930. 11. 2)의 시인 홍종린(洪鍾麟)은 이러한 시적 정서와 이념적 지향을 적정하게 융합한 『우리는 담벽같이 일어섰다』(1950. 12), 『봉선화』(1962. 7. 24) 및 시집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1952)를 선보였다. 또한 그는 번역물로 소련시집 『마야곱쓰끼 시초』(1953), H. 하이네가 극찬하고 노신(魯迅)이 높이 평가한 헝가리 혁명시인 S. 페테피(1823~1849)의 『뻬떼피 시선집』(국립출판사, 1957) 등을 우리말 특유의 미적 질감을 되살리어 옮김으로써 번역문학의 차원을 고양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20년 강원도 횡성에서 출생해 원주에서 성장, 휘문고보에서 정지용에게 시를 배우고 해방 후 시집 『옥문이 열리던 날』(1948)을 내놓은 김상민(金常民)―본명 정기섭(丁驥燮)은 상당한 지주의 아들로서 한문에 특히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계급적 기반을 송두리째 부정하고자 변성명(變姓名)까지 했는데, 6·25 전쟁 중 월북, 「전야의 우등ㅅ불」(1962), 『진달래』(1962) 등 시 창작에도 힘쓰는 한편, 김상훈과 번역한시집 『사가시선 四家詩選』(국립문학예술출판사, 1958)을 공역하였다.
일찍이 함형수·천청송·김북원·유치환·김달진 등과 함께 『재만조선시인집』(김조규 편; 간도 예문당, 1942)에 모더니스트풍 시편들을 발표했고, 4·3 제주민중항쟁(1948. 4. 3)에 참여한 민중들의 투쟁적 삶을 형상화한 「산사람들」(『문학』, 1948. 7), 귀향유이민들의 집단적 비극을 뛰어난 시적 색감(色感)으로 훌륭히 포착해낸 「행색(行色)―고국을 찾은 사람들」(임학수 편; 『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등을 발표한 이수형(李琇馨)도 쉽게 지나칠 수 없다. 이용악과 동향(함북 경성) 시인으로서 그는 시 「권양기 운전공 처녀」(『조선문학』, 1957. 6), 「어머니」(『조선문학』, 1964. 1), 평론 「시의 진실과 민족적 정서」(『문학신문』, 1962. 2. 2), 그리고 현지보고 실기(實記) 「고래 잡는 사람들」(『문학신문』, 1959. 8. 28)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활동을 고루 펼치었다.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해 인천에서 성장했으며, 해방기 신진 아동문학가로 활약하다 6·25 전쟁 시기 북한군으로 입대, 함경도 원산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던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인 우봉준(禹奉俊)은 문학평론 「동화문학에 대한 생각」(『조선문학』, 1962. 10), 동시 『형님 가신 길』·「바다에 핀 꽂」, 동화 「조그만 화분」·「가짜 주인과 진짜 주인」 등의 우수작을 거두었다(이상 『 해방후 동요』·『 동시편』·『 해방후 동화편』, 학생소년출판사, 1962 참조).
고향인 평양에 머물러 있으면서 북한 전기산업 부흥의 단면을 감정적 수식 없이 담담하게 노래한 「성장」(『조국의 깃발』, 문화전선사, 1948)의 박남수나, 김일성 체제로의 고착이 점차 현실화 돼가는 북한 전역의 ‘도·시·군 인민위원회 위원선거’(1946. 11. 2)의 축제 분위기를 간명하게 스케치한 「풍경」(1947. 1. 31; 『송가』, 문화전선사, 1947)의 시인 양명문 등은 훗날 6·25를 전후하여 월남을 결행한다.
평안북도 의주군 태생으로 1931년 일본으로부터 귀국, 안룡만과 더불어 ‘프로문학 아동문학연구회’를 결성, 적극 창작활동에 나섰던 재북시인 김우철(『김우철 시선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7, 135면)의 「찬우물고개」(1945. 10; 『나의 조국』, 문화전선사, 1947)는 시인 자신의 이념적 성취 공간으로 남한을 선택하는 서정적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는 ‘월남시’를 선보여 특별히 우리의 눈길을 끈다.
이로써 보더라도 해방기는 엄혹한 긴장과 전율 속에서도 남북한 넘나들기가 팽팽히 유지된 시기, 말하자면 이념적 통풍이 충분히 가능했던 현실적 역사공간이었음이 분명하다.
1916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임화에 의해 조선프롤레타리아 시의 발전적 면모를 보여준 “진실한 낭만주의의 전형”(『신동아』, 1935. 12)으로까지 고평된 데뷔작 「강동(江東)의 품―생활의 강 아라가와(荒川)여」(『조선중앙일보』, 1935. 1. 1)를 발표하여 당시 문단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던 재북시인 안룡만의 다음 시편 역시 위의 김우철 시와 동일한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츠렁 츠렁 새까맣게
윤나는 머리채
그 머리채 댕기끝에
송이 송이 꽃이파리 꽂고
바닷가 저녁노을
조개줍던 그날의 동백꽃
- (「동백꽃―항쟁의 제주도여」 부분, 『조국의 깃발』, 문화전선사, 1948)
‘4·3 제주민중항쟁’을 한층 고무·추동하는 일종의 아지프로시인데, 지금은 고향땅 제주도를 떠나 압록강변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 여공을 앞세워 일그러진 남한현실을 혁신코자 하는 시적 페르소나의 정치사회적 열망이 선명하게 양각돼 있어 크게 이채를 띤다. 무엇보다 그것은 검은 머릿결, 선혈 같은 동백 꽃이파리, 붉은 저녁노을 등의 빛깔 이미지들이 서로 교직하면서 빚어내는 드높은 서정적 환기력에 말미암는다. (안룡만의 주요 시집은 『동지에의 헌사』, 평양예술연맹 1946; 『안룡만 시선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6; 『새날의 찬가』,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4 등이 있다.)
6.
지난 7월 20일부터 25일까지 북한의 평양과 백두산·묘향산 등지에서 남한 민족문학작가회의 및 북한 조선작가동맹 공동 주관의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가 치러졌다. 미국·러시아 등지의 몇몇 재외동포 문인을 포함하여 총 200여 명의 남북한 작가들이 역사적 회합을 가진 것이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들이 합의한 3가지 원칙, (1) 우리 민족끼리의 자주적 통일 (2) 남측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의 공통성에 바탕한 통일 지향 (3) 경제협력과 사회문화 등 여타 분야의 협력 등을 실현하기 위한 문학 쪽의 공동모임이었다.
1945년 12월 13일, 조기 월북한 조선프로문학동맹(1945. 9. 17) 계열의 한설야 등 19명과 남측의 임화를 주축으로 한 ‘문건’(1945. 8. 16) 회원들이 연석하여 조선문학동맹으로 통합된 지 정확히 60년, 그리고 ‘1989년 3월 남북작가회의 무산’ 16년만에 이룬 뜻깊은 회동이었다. 회의 첫날 남북 문학인 대표들은 주저 없이 ‘6·15민족문학인협회’를 구성(2005. 7. 20), 남북 문학인 대상의 ‘6·15 통일문학상’ 제정, 기관지 『통일문학』의 발행을 합의한 것이다.
이번 모임에는 6·25 당시 16세 소년으로 인민의용군에 입대한 전남 장성 태생의 오영재 시인도 참여하였다. 김일성 항일유격대투쟁을 상찬한 「좋은 밤이여!」(『당에 영광을』,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1)를 비롯해 「혁명의 홰ㅅ불」(『청년문학』, 1962. 5), 「이 벌판에 내리는 함박눈은」(『문학신문』, 1962. 12. 11) 등 혁명적 열기를 가파른 서정적 호흡으로 끌어올리는 데 능란한 솜씨를 발휘한 그는 ‘김일성상 계관시인’(최재봉, 「북에서 만난 작가들―오영재」, 『한겨레』, 2005. 8. 3)이기도 하다.
함경북도 경성고보 시절 김기림으로부터 영어와 시를 접하고 정지용·박태원의 문학을 탐독했던 김규동은 김일성대학 조선어문학부 2년생 신분으로 1948년 1월 단신 월남했다. 거기서 이미 “3년간 생활했으니 다음 기회에 가겠다”(「김일성대 출신 김규동 시인의 월남기」, 『조선일보』, 2005. 8. 6)고 후배 문인들에게 전언하였다는 그는 이번 방북을 고향의 「느릅나무에게」(『느릅나무에게』, 창작과비평사, 2005) 보내는 안부로 대신하였다. 이 작품은 혼란으로 점철된 ‘해방 서울’의 겨울 한밤중, 고향땅 경성을 향한 사무친 정한을 그윽히 토로한 이용악의 「그리움」(1945; 『협동』, 1947. 2)과 너무나 방불하다. 가까운 듯 아득한 60년 전의 이 노래와 그만큼 깊은 시적 친연을 이루고 있다는 증좌이다.
남북 양자간의 문화적 이질성의 편폭이 거의 회복 불가능 상태로 넓혀진 오늘날 남북 상호간의 문학적 교류가 과연 어느 수준까지 가능할지는 사실상 매우 의문스럽다. 그러나 지난 60년간의 분단문학을 단단히 긴박한 이데올로기적 협애성으로부터 시원스레 벗어나기 위해서도, 특히 남북한 문학사에서 줄곧 그 존재증명 기회조차 망실당해 온 조선문학가동맹 문인들의 행방을 현단계 시점에서 온전히 자리매김하는 일이 참으로 절실하다.
| ▲ 2005년 평양에서 개최된 민족작가대회 © 운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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