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문화권 그리고 여러 국가들과 영토를 접하고 있는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외래문화 유입에 개방적이었다. 또 러시아의 저명 예술가와 작가들 중에는 동 슬라브 족이 아닌 이민족 피를 가진 인물이 적지 않았다. 이디오피아 귀족 집안과 연결되어 있던 푸슈킨, 스코틀랜드 이민 집안의 후손인 레르몬토프, 조상이 오늘날의 리투아니아 지역 출신인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말이다.
하지만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멀리 떨어진 동북아 지역은 러시아인들에게 줄곧 낯선 문화권으로 남아 있었다. 19세기 말 우리 동포들이 두만강 국경을 넘으면서 시작된 ‘고려 사람들’의 러시아 이주는 러시아의 급격한 정치적 소용돌이와 합류하면서 우리 해외 이민사에서 가장 비극적 사건이 되었다.
한-러 수교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내 우리 동포들의 사회적 지위와 위상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지만, 동양인 그중에서도 순수한 한국 피를 가진 사람들이 러시아 문화계에서 활동하는 것은 여간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보수적이었던 러시아 문단에 한국 성을 가진 작가가 진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비에트 시대에 표면적으로는 타민족 출신 작가들의 활동을 권장했지만, 검열을 통해 문학을 통제하고 또 소속민족을 차별대우하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런 중에도 일부 한국계 작가들이 러시아 중앙 문단 진입에 성공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러시아 땅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문학 활동은 처음에는 한국어를 통해 이루어졌다. 한국계 작가들이 처음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5년경으로, 이 무렵 연해주 지방에 거주하던 동포들은 몇 개의 극장을 운영하면서 우리말 시나리오를 무대에 올리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이들 모두는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1937년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땅에 내던져졌다. 그 어려운 삶 속에서도 고려 극단은 해체되지 않고 우리말 연극을 무대에 올렸으며, 이 무렵의 대표적 극작가와 시인은 연상연과 태장춘 등이었다.
그 다음 세대의 한국계 작가들은 김일성 체제를 이탈한 북한 출신 인텔리들이었다. 러시아어 구사 능력의 제약 때문에 우리 글로 창작을 할 수밖에 없었던 망명 작가들로는 리진, 한진, 허진, 명덕우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러시아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창작 활동을 하던 리진은 소련 붕괴 이후 한국에서 자신의 시집이 나오는 기적을 경험했지만 나머지 작가들에게는 그러한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생하여 일본에서 수학한 후 극동국립대학 한국어과를 졸업한 로만 김(1899～1967)은 예외적으로 일찍부터 러시아로 글을 썼다. 한국 전쟁 이야기를 일본 스파이의 보고 형식으로 기록한 소설 『순천에서 발견된 기록』(1951)을 비롯한 그의 탐정소설과 스파이 소설은 미군들을 ‘겁 많고 어리석은 범죄자’로 묘사하는 정치색이 짙은 작품들이었다. 가벼운 필치와 흥미진진한 이야기 구성으로 소련 독자들의 인기를 끌던 로만 김의 소설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한편 초등학교부터 러시아어로 교육 받은 그 다음 세대의 한국계 작가들 대다수는 러시아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음유시인으로 활동 중인 율리 김(1936～ ), 소설가 아나톨리 김(1939～ ), 시인 스타니슬라브 리(1959～ ), 소설가 및 극작가 알렉산드르 강(1960～ ) 등이 이 그룹에 속한다
한국인 아버지와 유태계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율리 김은 오래전부터 러시아 문화 예술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모스크바 국립사범대학교 역사․인문학부 졸업 후 중등교사로 근무하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반체제운동에 운동에 가담하여, 소비에트 현실을 풍자하는 시를 쓰고 거기에 곡을 붙여 직접 기타로 연주하던 율리 김은 이 시기 러시아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비소츠키, 오쿠자바, 갈리치와 함께 대표적 음유시인 중 하나였다. 간결하고 명징한 시어를 실험적 음악어법에 결합시킨 율리 김의 노래들은 러시아 대학생들과 지식인 계층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지난 9월 말 한국에서 처음으로 연주회를 개최한 율리 김은 스탈린 시대에 부친이 정치범으로 몰려 총살당한 후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시와 노래 속에 배어있는 러시아 현실에 대한 비판과 해학은 탈을 쓰고 유쾌하게 부조리를 폭로하는 우리의 광대 모습과 닮은 데가 있다. 자유를 박탈당한 대중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탄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를 노래한 이 한국계 시인의 음악은 수많은 연극과 영화에 사용되고 있으며, 철학적 경향이 강한 그의 시들은 러시아의 대표적 문예지에 발표되었다.
시인 율리 김과 소설가 아나톨리 김은 한국계 작가가 소수민족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벋어나 러시아 내에서 두루 인정받으며 문화계의 중심에 진입하는 개척자 역할을 했다. 이들이 러시아 문단의 주류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이후 지속된 개방화와 민주화 분위기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 중에서도 현재 러시아 문단에서 대표적 작가로 인정받고 있는 아나톨리 김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각별하다. 그가 쓴 단편 소설이 러시아 중등학교 국어 교재에 수록되고, 러시아 대학 국문학과에서 대표작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22개 국어로 그의 소설이 번역되고 미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 등에서 연구논문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문단에 데뷔한 이래 많은 단편, 중편, 그리고 장편소설을 발표해온 아나톨리 김은 러시아 현대 문학사에서 새로운 행성에 버금가는 현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작가가 순수한 한국인의 피를 받은, 러시아 내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특이한 전기적 배경 때문만은 아니다. 독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구사할 수 있는 유전자를 몸속에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이 한국계 러시아 작가가 창조해 낸 독창적 러시아어 문체와 새로운 서사기법, 그리고 독특한 세계관 이다.
자신이 한국인도 러시아인도 아니라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던 아나톨리 김은 광활한 세상으로의 여행을 통해 진정한 조국과 민족을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조국은 태양계의 행성 ‘지구’였으며, 그가 속한 민족은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경계를 초월하는 ‘인류’였다. 그 결과 그의 문학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자유로운 비행을 시작했다. 극동지역을 떠나 중부 러시아의 삼림지대와 모스크바로, 외국 여러 나라로,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으로의 비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가의 주된 관심은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는 인간 영혼의 내면세계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소설에는 자기희생적인 선한 인물들과 정신적 가치에 무관심한 채 소외된 삶을 사는 다양한 인물들이 함께 등장한다. 이들 모두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은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경험하는 자아성찰의 시간 또는 혼자서 자연의 신비를 감지하는 순간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 삶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이 같은 영혼의 떨림을 포착하고 전달하려면 당연히 새로운 예술언어가 필요했다. 플롯에 대한 관심이 최소화되고, 파편처럼 흩어져있는 영적 변화의 순간들이 기억과 환상을 매개체로 하여 독특한 시간과 공간으로 재창조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는데 그치지 않고 영원한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정신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아나톨리 김 소설 형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현실 세계와 환상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점이다. 합리주의와 실용주의가 팽배한 현실적 삶의 근본적 한계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직관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초현실적 세계의 제시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2005년 ‘야스나야 폴랴나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 작가의 장편 『다람쥐』는 타락한 1980년 대 소비에트 예술계의 풍토를 희화하는 통렬한 풍자인 동시에, 진정한 예술을 통해서만 인간이 영원한 삶에 도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철학 소설이다. 풍자적 아이러니와 낭만적 서정성의 교차, 시간과 공간의 혼재와 압축, 그리고 갖가지 변신과 변용이 수시로 교차하는 이 ‘설화 소설’에서 작가가 창조한 것은 여러 종류의 다른 목소리가 함께 울려 퍼지면서 연출해내는 다성악적 세계이다.
율리 김이나 아나톨리 김이 그나마 운 좋은 세대였다면, 소련 체제 붕괴 이후 각 공화국들이 독립할 즈음 본격적 문학 활동을 시작한 젊은 세대의 한국계 작가들은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다.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하다가 러시아 중앙 문단에 진입한 시인 스타니슬라브 리와 소설가 알렉산드르 강 같은 작가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저명한 러시아 시인 쿠르다코프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시단에 데뷔한 스타니슬라브 리는 북한 출신 박일에게 한시를 사사하며 자신의 시 세계를 개척해온 독특한 배경을 가진 시인이다. “한 인간의 과거는 무한한 우주만큼 무한하며, 시인은 자신의 영혼 속을 배회하는 영원한 나그네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시인은 쓸쓸한 기억의 뒤안길을 배회하며 영원하고 변함없는 시의 씨앗을 찾는 외로운 존재”라고 주장한다. 스타니슬라브 리의 시 세계가 어려서부터 체험한 한국적 전통에 강하게 뿌리 내리고 있다면, 정치적 이유로 남편을 평양에 남겨두고 러시아로 떠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알렉산드르 강은 아버지의 부재가 안겨준 정신적 공백을 메우려는 오랜 고통과 방황 끝에 문학의 길로 들어선 실존주의적 경향의 작가이다. 처음에 물리학 공부를 하며 자신의 방황하는 영혼을 달래려던 알렉산드르 강은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삶의 밑바닥을 경험한 후 마침내 모스크바 소재 고리키 문학창작대학을 졸업하고 문단에 데뷔했다. 1994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 젊은 작가는 지금은 모스크바를 떠나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창작의 자유는 맘껏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밀려드는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러시아 순수문학의 위상이 크게 위축되면서 스타니슬라브 리 와 알렉산드르 강 같은 젊은 한국계 작가들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양쪽에서 모두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상업주의 문학이 판을 치는 모스크바에서 한국 성을 가진 이들 작가들의 작품을 출판해 줄리 만무하고, 또 이들이 거주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에서는 민족주의적 정서가 대두되면서 러시아어로 글을 쓰는 소수민족 작가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문단에서 이 같은 한국계 작가들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들이 러시아로 창작을 하고 있기에 우리 문학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는 러시아 문학계에서 한국계 작가들은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러시아어로 글을 쓸지언정 이들 작품의 중심에는 “한국의 정신적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율리 김이나 아나톨리 김 같은 러시아 문단의 원로나, 스나티슬라브 리, 알렉산드르 강 같은 젊은 작가들의 문학에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독창적 러시아어로 표현된 우리 고유의 정서와 영혼 세계이다. 운명에 의해 조국을 떠나 머나먼 러시아 땅에 살고 있는 재능 있는 우리 동포들의 예술혼이 러시아 문학에서 안식을 찾고 있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