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은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요즘엔 VOD 서비스라는 게 있어 얼마든지 ‘다시보기’가 가능해졌지만 실은 그것도 그리 오래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고급지면에 이미 사라진 방송 제작기를 쓴다는 것이 어딘지 과분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때를 한번 떠올리자 갑자기 즐거워졌고, 드디어는 ‘방송과 문학’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는 강한 유혹이 느껴졌다.
2.
맨 처음 나는 ‘중견 문학평론가’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번 다큐멘터리가 탄생 100주년 문인들의 생애를, 그것도 한꺼번에 다섯 분 - 시인 김광섭, 국문학자 김태준, 아동문학가 마해송, 극작가 유치진, 문학평론가 이헌구 - 씩이나 다루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작을 후원한 대산문화재단 측은 ‘당신이 그 방면의 전문가이니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점 때문이었는지 제작 초기의 나에겐 제법 우쭐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애 전부를, 50분짜리 단 한편에 담아낼 수 있을까!
그 무렵 내 고민은 ‘탄생 100주년’이라는 말에도 머물러 있었다. 그 10진법의 말 속에는 무언지 모를 존경과 흠모의 마음이 짙게 배어있어서 나도 모르게 공손해지곤 했다. 그렇잖아도 평소에 나는 오늘의 문인들보다 근대 문인들이, 오늘의 문학보다 근대 문학이 더욱 문학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내게 있어 이번 작업은 교과서에나 등장하던 스타문인들에 대한 동경심을 재확인해 보는 일이었던 셈이다.
3.
과연 그들의 삶은 어땠을까.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작품연구와는 달리 생애연구에 대한 자료가 전무했다. 하는 수 없이 유족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유족들 중에는 취재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까지는 내 관심권 밖에 있던 친일 문제 때문이었다. 때마침 재야에서는 ‘친일인명사전 명단 발표’로 야단법석이었다.
나는 한 문인의 유가족을 조용히 설득해 보았다. 애당초 나는 누구를 일방적으로 미화하거나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또한, 친일문제가 유일한 잣대가 되어 프로그램 안에서 어기적대는 꼴도 싫었다. 다만,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선대의 친일문제에 관해 조용히 사죄하는 장면이 담기면 오히려 모두가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끝내는 전화마저 끊어졌다.
다른 유족들도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족들은 한결같이 집으로 우르르 몰려간 촬영팀의 첫인상부터 살폈다. 그리고는 무턱대고 어떤 흠집을 낼 사람들은 아니라고 보았던지, 그제서야 사진과 유품들을 꺼내 주는 것이었다.
근대 문인들의 육필원고를 처음으로 직접 본 것은 한창 장마철이 시작되던 6월의 어느 연립주택 지하실에서였다. 종이박스 안에 보관되어 있던 원고지는 습기에 눅눅히 젖어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우리는 곰팡내부터 털어냈다. 그리고는 일일이 작품의 전체목록과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야릇한 느낌을 주는 원고뭉치가 발견되었다. 몇 번의 확인 결과 그것은 미발표 원고였다.
생각지도 않은 특종을 건졌으니 그날은 당연히 ‘광란의 밤’으로 이어졌다. 우리 스태프들은 삼겹살 집에서 노래방으로 돌며 회포를 풀었다. 그러나 그때 발굴된 미발표 원고가 방송매체와 문학매체에 동시에 발표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4.
장대비가 퍼붓던 날, 문학평론가 최원식 교수를 찾아갔다. 인천시 구 중심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어느 언덕배기에 그의 집이 있었다. 그의 집은 차라리 ‘최원식 문고’라는 편이 옳았다. 2층 서재에 가득 찬 문학 자료들은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와 1층 복도는 물론 식탁 아래에까지 쌓여 있었다.
그 날 인터뷰는 세 시간 넘게 진행되었던 것 같다. 주제는 ‘해방 전후, 우리 문학의 길 찾기’. 그는 우리가 재조명하기로 한 다섯 분의 삶을, 마치 활판 인쇄하듯이 내게 또렷이 들려줬다. 거기엔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고 그때마다의 선택들이 있었다. 마침 담배를 끊기 시작했는데도 전혀 담배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만큼 흥미로웠던 인터뷰 내용이 물론 이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밤 10시가 넘어 그의 집을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때 떠올린 것이 ‘문학평론 다큐멘터리’라는 어설픈 개념이었다.
문학평론 다큐멘터리? 그저 내가 한번 붙여본 이름으로, 그동안 방송의 뒷전에 물러나 있던 문학평론가들을 대거 전면에 등장시켜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인천시 용현동 그 어디쯤인가의 최원식 교수 댁을 다녀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구체적인 사례나 실증 사료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 어쩌면 나는 이 프로그램이 적당한 미사여구로 그들의 삶을 기념하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이 그동안의 방송, 그동안의 문인 재조명 다큐멘터리가 해오던 구습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100년 단위의 재조명 작업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것은 연출자인 내가 함부로 나서 재단할 일이 아니며, 방송의 일반 상식수준이 아닌 문학의 당대 최고 수준에서 해야 할 일임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5.
나도 모르게 낭만주의자에서 실증주의자로 변신한 때문일까. 방송이 나가고 나서 난생 처음으로 ‘감동적’이었다는 격려의 말 한 마디를 듣지 못했다. 아직도 사람들은 ‘소설적인 다큐멘터리’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나는 크게 섭섭하지 않았다. 내 나름대로는 ‘문학평론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시도해 보았고, 또 그것이 진정한 ‘방송과 문학의 이중주’라고 믿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 평론은 인상 비평에 가까웠다. 50분이라는 분량이 그랬고, 그 좁은 공간에서 5인 그룹전을 갖기엔 너무나도 큰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1905년이라는 똑같은 출발선상에서 일제 암흑기를 겪었고, 해방과 분단을 맞으며 제각각의 정치적ㆍ 문학적 선택을 해나갔다. 그 우여곡절 속에서 그들이 견지했던 문학적 태도와 삶의 자세는 이 다큐멘터리의 최대 관심사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문인들을 조명할 때 작품 이외의 그 무엇에서 실마리를 찾는 행위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남긴 작품에 비한다면 그들의 생애는 보잘 것이 없고 남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천재 문인의 삶도 결국엔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온당하다고 믿는다.
※ 다큐멘터리 ‘해방 전후, 우리 문학의 길 찾기’(민병모 연출, 진용만․윤용성 촬영)는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의 일환으로 재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어 지난 8월 EBS에서 방송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