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것에 심금이 따라 울립니다. 시를 써오면서 스스로 외로워졌던 것은 세상살이의 유정(有情) 탓이기도 했지만, 시의 세계가 지극함을 요구했던 까닭입니다.
돌이켜 보면 막막하고 서늘했던 시의 감동에 이끌려 작시(作詩)해 보려고 마음먹었던 스무 살 시점에서 어느덧 마흔 해나 멀리 흘러왔습니다. 이제 이순(耳順)의 문턱에서 바라보는 시경(詩境)은 자욱하게 사무쳐야 비로소 넓이가 짐작되는, 그러나 바닥조차 가늠할 수 없는 홀로 아득한 세계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 시의 참모습과 마주쳐 보려고 저는 무던히도 열심히 걸어왔던 셈입니다.
제게 주어진 이 상(賞)은 그런 도로(徒勞)를 보상하는 차원이라 받아들입니다. 시를 쓰는 일이 백인백태(百人百態)라 하여도 경탄, 둔주(遁走), 긴장, 진실됨 이런 것들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한갓 무미한 짓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제가 정색을 하면서 매달렸던 시는 농담조차 쉽게 수긍하지 못했던 엄숙주의자의 것이었습니다. 이 순간에도 저는 시의 감동이란 삶의 지극함에서 우러나고, 그렇게 되려고 애태우는 어떤 진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진정성이야말로 가식 없는 생의 근거를 들춰보게 합니다.
수상 시집 『파문』은 한마디로 시간에 관한 시집입니다. 순간을 무한 가까이서 체험하려는 헛되고 헛될 수밖에 없는 미망을 의식의 당사자가 자각하는 실재들로 기록한 시편을 모아놓았습니다. 실존의 시간을 견뎌내고 존재의 근거에 닿아보려 했던 저는 이렇게 허무의지에 지배를 받았습니다. 살아가는 외로움에 오래 침윤된 사람일수록 사람살이의 외곬에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언젠가 다른 상의 수상 자리에서 저는 멈추는 지점이 어디든 간에 거기가지 흘러가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립니다. 놀이가 언제 끝나던 간에 보채지 말고 몰두하여라. 이 정언명령(定言命令)을 자기암시로 되새깁니다. 이제 제게 주어진 일은 알게 모르게 스며든 제 시 속의 가식들을 마저 덜어내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차오르는 단 한 폭의 투명함과 마주치는 날, 그 지독함에 스스로의 심금이 끊어지게 탄주해보는 것입니다.
부족한 시집 『파문』을 천거해주신 다섯 분 심사위원 선생님, 큰 상을 제정해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반성의 계기를 마련한 대산문화재단의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 어린 고마움을 전해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 김명인 : 시인, 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 1946년생. 시집 『동두천』 『머나먼 곳 스와니』 『푸른 강아지와 놀다』 『바다의 아코디언』 등
小說 부문 : 김연수
엄살도 이런 엄살이 없습니다만, 가끔 소설을 쓰다보면 죽을 고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컨대 저는 마감할 때면 며칠 밤낮을 한곳에 틀어박혀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다가 깨면 몇 줄 더 쓰고, 또 쓰러져서 자다가 깨면 몇 줄 더 쓰고 하는 식인데, 그러다가 천신만고 끝에 마감해서 문밖에 나갔다가 어느새 노랗게 변해버린 나무들을 보게 되면 좀 섬뜩한 기분마저 들게 됩니다. 계절은 어느새 바뀌고 집의 아이는 새로 배운 단어를 중얼거립니다. 그럴 때면 저는 늘 폭음을 하게 되고, 며칠 끙끙끙 앓아누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어제도 술을 마셨고, 잠을 뒤척였습니다. 그러나 쓸 수 있는 문장이라도 있어서 마감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언젠가는 유격대에 관한 소설을 쓰겠답시고 느닷없이 중국에 간 적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하고 머리를 굴려 봐도 어두운 겨울 밤, 살아보겠다고 총을 들고 눈 쌓인 산을 기어 올라가는 유격대원의 심정을 알아낼 수는 없더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총까지 든 것은 아니었지만 눈 쌓인 산을 있는 힘껏 기어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어 올라가면 뭐가 보이느냐 하면, 그게 또 그렇지 않습니다. 저를 죽이겠다고 쫓아오는 적군이 없으니 그 느낌은 예상과 달리 민숭민숭합니다. 그 때, 숨이 턱까지 차오른 몸으로 뭘 느끼느냐 하면, ‘아이고, 내가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가?’는 민망함입니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기어이 소설을 써야만 하는 것이냐? 그런 자문에 맞닥뜨리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소설을 쓰면서 그런 물음을 마주한 경험이 한두 번은 아니고 서너 번쯤 됩니다. 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원래 태어난 바로 보자면 대기업의 말단 사원쯤으로 살아갔어야 딱 어울릴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유격대라도 되는 양, 어두운 중국의 밤길을 쏜살같이 뛰어갈 일은 전혀 없었던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쓰기 시작한 뒤로 제 인생은 저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변해갔습니다. 내년에 제가 서울역에서 노숙을 한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소설을 쓰는 일은 앓는 일과 비슷해집니다. 그것도 끙끙끙 소리 내어 앓는 일과 비슷합니다. 그건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기어이 소설을 써야만 하는 것이냐?”는 물음에 직면한, 그러니까 원래대로 보자면 대기업의 말단 사원쯤으로 살아갔어야 할 인생이 내는 요란한 소리인 셈이죠. 한두 번은 아니고 서너 번쯤 그런 질문을 들은 뒤에야 저는 그렇게 끙끙끙 앓는 소리를 내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습니다. 그건 바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기어이 소설을 써야만 하는 것이냐?”라는 자문에 주저 없이 “그렇다!”라고 소리치는 일입니다. “그렇다!”라는 그 말, 참으로 단순명쾌한 말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염치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온몸이 끙끙끙 앓고 있는 판국에 염치니 체면 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더 많이 앓을수록, 더 많이 끙끙댈수록, 더 큰소리로 “그렇다!”라고 외치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다른 여러 좋은 작가분들이 받아야만 합당한 이 상을 앞에 놓고서 하는 수 없이, 염치도 체면도 없는 목소리로 넙죽 받아들이는 마음이 꼭 그와 같습니다. 한 번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그 다음에 소설은 더 엄청난 것을 제게 요구하더이다. 그 때가 되었다고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으니 갈수록 몸이 힘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엄살도 이런 엄살이 없습니다만, 이 상이라는 것 때문에 요 다음번에는 제가 또 얼마나 고생할지 눈에 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즐겁다는 듯이 상을 받는 심정을 다른 여러분들께서 알아주시면 참 고맙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길은 멀고 힘은 부친데, 들어와 쉬었다가 가라며 따뜻한 아랫목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대산문화재단에 감사드립니다. 하룻밤 쉬기는 쉬데, 그게 쉬었다가 다시 ‘가라고’ 하는 말씀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쉬었다가, 푹 쉬었다가 다시 가겠습니다.
* 김연수 : 소설가. 1970년생. 소설 『꾿빠이 이상』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7번 국도』 『스무살』 등
評論 부문 : 정과리
풀리지 않는 덤의 해법
저는 늘 상이란 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먼 소식처럼 여기곤 했습니다. 간혹 가까이 왔을 때는 받기보다 주는 일을 거드는 게 즐거웠습니다. 덤은 주는 자의 관대함을 표내주지 않겠습니까? 한데 저의 기호와는 무관하게 상이 제 머리 위로 낙하하는 일이 잦았군요. 덥석 받아들 때마다 선녀를 안은 나무꾼의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선녀라면 제 몰골이 부끄러울 일이었습니다. 아니어야 하는데 그렇게 마음먹자니 무겁고 거북하기만 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로 바위를 덤이라고 한다는군요. 무엇보다도 제게 덤은 증여의 논리를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합리주의 교환 경제의 계산의 논리든 포틀래취라는 상징적 교환의 논리든 말입니다. 왜냐면 되갚는 일에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제가 덤을 받았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생각나는 건, 상의 수령은 “공금을 취하는 행위”라는 시오랑의 독설입니다. 그래서 그는 상을 안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받습니다. 저는 그와 달리 한국인이고 또 그보다 유복하기 때문입니다. 호의를 거절하면 섭섭해지는 한국인이고 상을 받는 순간 물신에 들리지 않을 만큼의 여유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덤은 여전히 무겁기만 합니다. 기왕 받았으니 불평해서도 안 됩니다. 라 퐁텐느의 나무꾼은 등에 잔뜩 진 짐을 불평했다가 죽음이 찾아오는 바람에 혼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부릴 수도 없습니다. 아무 데나 부리면 덤은 두엄이 됩니다. 함경도에선 덤이 두엄이더군요. 하지만 두엄 되기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금비하려면 금을 써야 하고 퇴비하려면 몸을 써야 합니다. 지는 거나 부리는 거나 다를 바가 없군요.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의도가 그것인 모양입니다. 그분들이 제게 보여주신 애정과 신뢰의 표현은 결국은 협박의 은유라는 게 명명백백히 밝혀진 듯합니다. 덤을 주었으니 그건 너를 ‘파라오의 친구’로 봉한다는 뜻이로다, 라는 선고지요. 울며 겨자먹기로 명심할 밖에 도리가 없군요. 기왕 주는 덤 듬뿍 주겠다는 대산문화재단에도 울며 겨자먹기로 감사할 밖에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제게 남은 자유 하나는 덤이 럼이 되는 시간만을 기다리는 것 그것뿐입니다.
* 정과리 : 평론가, 연세대 국문과 교수. 1958년생. 평론집 『문학, 존재의 변증법』 『존재의 변증법』 『스밈과 짜임』 『무덤 속의 마젤란』 등
飜譯 부문 : 프란시스카 조 (Francisca Cho)
저는 금년 대산문학상 번역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영광은 전혀 뜻밖의 것이지만 저의 학자로서의 경력에서 지금까지 제게 주어진 최고의 상임이 분명합니다. 대산문학상 심사위원회가 만해 한용운에 대한 제 번역서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뉴스를 듣고 얼마나 놀라고 숨이 막힐 듯이 기뻤는지를 상상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에 대해 저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뜻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번역을 시작했을 때 저의 의도는 그것을 주로 저 자신의 연구에 쓰려는 것이었습니다. 제 연구 분야는 동아시아 문학에 표현된 불교사상이기 때문에 저는 불교 저술로서의 『님의 침묵』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번역을 완성하고 나서 저는 영어 사용자들에게 만해의 시의 열정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 위해 그것을 독립된 작품으로 출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로서는 학문적 과제로 시작된 작업이 그 시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만해의 삶과 시적 비전에 대해 알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 번역을 읽은 사람들이 제게 보여준 반응은 만해가 한국에만 국한된 시인이 아니라 전 세계의 시인이라는 제 직관을 확실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출판사를 구하는 일도 비교적 신속하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이 시집이 출판된 후 만해의 시의 격렬한 극적 요소에 서양의 시인들이 반응을 보이고 주목한 점도 특히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번 대산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해서 만해의 걸작을 한국인들에게 재소개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오랫동안 만해의 작품에 대한 한국 평단의 해석은 주로 정치적․애국적 독법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님의 침묵』의 깊이와 여러 겹의 극적 요소를 간과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독법은 이 시들의 풍요롭고 다채로운 구조를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나 해외의 한인사회의 한국인들이 인간 한용운의 국가적 의의뿐만 아니라 세계적 의의까지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해의 시를 전부 다시 한 번 읽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저는 만해 시의 번역본인 저의 『Everything yearned for』에 관심을 가져주신 점에 대해 대산문화재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국인들이 이제는 영어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중국어에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제 대산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고 보니 그러한 말이 틀렸음이 입증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 내에서나 한국 밖에서나 만해가 중요한 영어권 시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 프란시스카 조 : 미국 조지타운대 불교학과 교수. 1961년생. 저서 『Embracing Illusion: Truth and Fiction in the Dream of the Nine Clouds 소설 구운몽 속의 진실과 허구』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