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대철    © 운영자

시적 분위기에 휩싸이는 황홀한 첫 순간은 금시 사라진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 그 자리엔 문장을 거느린 낯선 말 몇 마디가 드나든다. 그 말은 나의 생관과 부딪치고 삶 가운데 가장 부정적인 요소를 밀어낸다. 시를 마무리 할 때까지 나는 정신을 온전히 가눌 수가 없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썼지만 내가 쓴 것 같지 않다. 나는 아직도 마무리한 순간만 기억하고 있을 뿐 시가 어떻게 태어나고 성숙하는지 모른다. 다만 나는 울림이나 향기를 가진 시의 첫 모습보다 모래와 얼음 사막을 거쳐 온 시의 마지막 모습을 더 사랑한다.
이 글을 쓴지 20여 년이 흘렀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혼자서 제 힘으로 시를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시도 우리의 옛 시인한테 물려받은 것이고 아름다운 이미지도 사물한테 물려받은 것이다. 시 한 편이 완성되려면 주위의 삶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생생한 눈빛도 거들어 주어야 한다. 아무리 감동을 주는 시라 하더라도 현장성이 약하면 시의 긴장과 생명력이 떨어진다. 시 속에 들어앉은 현장의 구조가 시의 골격을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나의 시에 대한 태도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한 거기서 자유로울 수가 없고 체험과 현장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시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다는 점이다. 현장시를 즐겨 쓰다 보니 자연히 시의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시의 현장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비무장지대 생활을 쓸 무렵 나는 시를 쓸 때마다 숨어 있던 비유의 막을 찢고 나왔다. 그때마다 시의 실체를 가리는 수사적인 표현과 몽환적 요소가 줄어들고 마침내 상황에 억눌린 한 인간의 맨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작 활동을 중단했던 시기에 씌어진 시들은 대부분 이 억눌린 한 인간에 대한 시들이었다. 그러나 이 시들은 햇빛을 보지 못하고 노트에 그대로 묻혀 있다. 시들이 너무 어두워 민족의 화해에 초점을 둔 『개마고원』 시집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이 시들은 『무인도』 시절 「우리들의 땅」에서 잠시 내보였던 현장 체험시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지금도 사물의 속성이나 구조가 잘 드러나는 이 현장성을 그대로 살려 쓰고 있다. 나도 모르게 끼어드는 주관적인 정서와 편견을 제어하고 그것을 감당하는 데에는 현장성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표현할 때마다 기법을 이용하여 감정을 절제하고 하고 싶은 말을 대체하는 사물을 불러와야 할 것이다. 시에 있어서의 현장성의 강점은 시가 하나의 실상을 갖기 전까지 수시로 바뀌는 감정의 단위를 조절해 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객관적인 사실을 사실 그대로 유지시켜 준다는 점이다. 시를 쓰는 동안 시가 태어나고 성숙해 가는 모습을 소상히 지켜볼 수 있다는 점도 강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국보법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상황에서 현장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현장이 민감한 곳은 아무리 그 목적이 순수하다고 할지라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지난 여름에도 나는 늘 하고 싶었던 일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빗방울화석’ 동인들과 함께 백두산과 국경을 답사하고 두만강을 따라가면서 북한군과 접촉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선발대로 간 조선족 안내원은 북한군과 만나 물물거래를 주선하고 돌아왔으나 국보법에 대한 압력을 받으면서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만주벌을 달려온 ‘빗방울화석’ 동인들은 중국 공안원에 걸려 발길을 돌려야 했다. 물론 특별한 거래는 아니었다. 담배 한 보루와 산천어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인적이 없는 곳인데도 밀수와 탈북자 문제로 국경지대의 공안원들은 초긴장 상태에 있었다. 두만강 근처에 어른거기만 해도 체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우린 다만 정치적인 조건을 벗어나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것마저 불가능했다. 약속 시간은 다가오고 동인들은 멀리서 두만강 줄기만 망연히 바라보았다. 아쉽지만 북쪽에서 물물거래를 수락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어두워지면서 두만강 물줄기가 굽이굽이 우리의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이제 흘러들어온 두만강 물줄기가 굽이굽이 흘러나갈 수 있도록 쉬지 않고 시를 써야 될 것 같다. 그런데 만일 북한군과 최초로 접촉한 사람이 조선족 안내원이 아니고 ‘빗방울화석’ 동인들이었다면? 그리고 실제로 물물거래를 하고 다음 약속을 하고 그 사실을 시로 쓴다면? (이와 반대로 만일 국보법에 걸리지 않게 두만강 체험을 현장시로 쓴다면? 현실은 금시 허구로 바뀌거나 가정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구체적으로 체험한 것을 시로 써 왔다. 화전민 생활이나 군대 시절 비무장지대 이야기, 그리고 방황할 때 황야와 얼음사막에서 우연히 만난 탈북자들이나 북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다 체험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체험 이야기들은 성장과정에서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우연히 이루어진 것들이다. 나는 이 우연성을 벗어나고 싶었다. 다행히도 ‘빗방울화석’ 동인들과 어울려 십여 년 백두대간을 타면서 이 우연한 체험은 쉽게 극복되었지만 군대 시절의 민족에 대한 어두운 감정은 원체험 그대로 가라앉아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 두만강 탐사에서 북쪽과 물물거래를 트려 한 것도 심리적으로는 그 중압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엊그제 러시아 음유시인 율리 김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고령(70세)임에도 거의 두 시간 동안 악보도 없이 스물여덟(2편은 앵콜) 편의 시를 노래했다. 스탈린 치하를 견뎌온 어두운 삶의 질곡에도 불구하고 그의 바르드 음악(음유시)은 특이하게도 경쾌하고 익살스러웠다. “시는 진지하고 슬프게 쓰더라도 노래에서는 명랑함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그의 말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고래 한 마리」를 첫 노래로 불렀다. “먼먼 북쪽 바다에 / 고래 한 마리 리 리 리 / 배를 타고 어부들 / 고래를 찾네 / 아 고래 없네.”
그는 시편마다 해설을 곁들였는데, 이 시에 대해서는 모스크바국립사범대 역사인문학부를 졸업하고 3년 계약으로 캄차카 야간학교의 지리 교사로 발령받은 뒤 보지 못한 바다와 보지 못한 고래를 상상하며 쓴 시라고 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내용이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그의 젊은 날의 꿈과 좌절이 녹아 있는 시였다. 모스크바에 살면서 그가 캄차카 행을 선택한 것은 심리적으로는 자신을 억압하고 속박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이번 공연에 포함되지 않은 시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엿보였다. 그는 하찮은 것일지라도 결핍된 것을 결핍되었다고 노래하면서 진실을, 어린아이처럼 노래하면서 어린아이의 순수성을, 바다와 그 너머의 세계를 노래하면서 불가능한 꿈과 이상을 되찾으려 했다. 강압적인 현실에 대한 그의 어릿광대 같은 노래들은 마침내 암흑 속에서 웃음을 살려내어 인민의 삶에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을 것이다.
공연 한 번 보고 말한다는 게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의 노래는 내용 자체보다 경쾌한 리듬이 생명이었다. 그 경쾌한 리듬이 암흑이었고 감춰진 고통이었고 눈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아직도 살아남아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고 노래하며 고국의 청중을 향해 활짝 웃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시가 태어난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앉아 들어도 언 가슴이 후련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율리 김의 음유시를 들으면서 내가 시에서 되찾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직까지 일상적인 삶도 회복하지 못하고 정체 모를 기운에 휘말려 그저 풀더미처럼 떠밀려 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되는 대로 발표만 했을 뿐 뜨거운 시 한 편 남기지도 못한 것 같다. 시란 삶의 기록 이상이긴 하지만 시가 자리 잡을 터전은 여전히 구체적인 삶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뜨겁게 살지 않고서 뜨거운 시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때가 오면 두만강 체험시를 쓰고 싶다. 중국쪽 두만강 발원지인 적봉 기슭에서부터 저 끝자락 권하촌에 이르기까지.
다음 시는 두만강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일본해 밀어 붙이려고
동쪽으로 흐르던 강물이
잠시 숨 돌리는 곳

훈춘시 경신진 권하촌

안중근 의사가 한동안 머물렀던
성수산 끝자락 낮은 둔덕엔
묵은 밭과 오솔길

아궁이와 수도 펌프와 거실이
한 자리에 붙어 있는
낡은 초가집 하나

울안에 들어서자 끝없는 황야, 바람이 분다, 억새가 흔들린다. 의사는 여기서 경흥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했을까? 만국공법으로 의병들을 설득하고 만국공법으로 포로들을 풀어 주었을까? 총까지 돌려 준 채?

아니면 거사 앞두고 아들 분도와 연추하리 사이를 드나들다 잠 못 이루었을까? 태극기 펼쳐 놓고 왼손 무명지 잘라 ‘대한독립’을 쓰고 만세를 부르던 비밀결사여

권하 해관을 빠져나오면서
노을에 물든 강물이 깃발처럼 흔들린다.

- 졸시 「두만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