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시집이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한국 문학이 걸어온 머나먼 길에서 한국인의 정서가 듬뿍 담긴 또 하나의 작품을 스페인어 권에 선을 보인 것이다. 작품 하나에 심혈을 기울여 품위 있는 번역 작품이 나올 때 우리는 진심으로 뜨거운 갈채를 보내고 싶다. 꽃잎 하나하나가 모여 탐스러운 꽃송이가 되듯이 우리작품 하나하나가 번역되어 소개되면서 우리문학의 참 모습을 세상에 내 놓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광규의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라는 이름의 이 시집은 이성훈 교수, 그리고 시인이며 전문 번역자인 후아나 부르크하르트(Juana Burghardt)와 토비아스 부르크하르트(Tobias Burghardt)가 팀을 이루어 만들어 낸 작품이다. 비록 소박한 시집 한 권이지만 우리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는 대산문화재단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세상일이 다 그렇지만 문학작품 번역은 특히 어렵다. 이 가운데에서 시를 번역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닌 것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압축되어 숨어있는 정신과 감정의 세계를 역시 핵심적인 말 한마디로 잡아 이국인의 정서가 공감하게 한다는 것이 쉬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번역에서 직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이야기를 흔히 듣는다. 글자 그대로 직역은 씌어진 대로 옮긴다는 뜻이겠고 의역은 씌어진 것보다는 쓰려고 한 의도를 감지하여 의미 전달에 주력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번역에서 직역 의역을 논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올 바른 번역은 작가가 묘사하려는 표현에 최대한 충실하면서 작가가 전하려하는 메시지를 잡아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지나친 의역은 원래의 뜻에서 너무 멀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번역을 하려면 원작의 문장이 애매하고 모호하게 보일 때가 가끔 생긴다. 더구나 때로는 문장구성에서 문법적인 오류가 있을 때도 있다. 그렇다고 번역도 역시 애매모호하고 문장의 오류까지 그대로 옮겨도 될까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서 역자는 모호성을 깨어 버릴 용단을 필요로 할 때가 종종 생긴다. 때로는 단어 하나, 표현 하나를 두고 적당한 용어 선택을 위하여 몇 시간이고 몇 날을 두고 고민할 때도 있다. 그뿐 아니라 원활한 의미전달을 위하여 문장을 자르고 붙임으로써 문장의 우아함을 유지할 때도 있는데 아마 그렇기 때문에 번역문학이라는 용어까지 나오지 않았나 본다. 따라서 누구를 번역자로 맞이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이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하여 훌륭한 번역자를 만났을 때 그 작품은 그 만큼 돋보이는 작품이 될 것이다.
한 시인의 이야기가 꾸밈없이 펼쳐진다. 역사적으로 다사다난하였던 한국 사회의 한 모퉁이에서 시인은 노래한다. 크게 자랑할 것도 또한 크게 부끄러워할 것도 없이 담담하게 우리가 살아온 어제와 오늘, 그리고 우리 세대가 겪어온 크고 작은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누구이며 나는 이제 어디에 와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김광규의 시 세계는 넓고 깊다.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이 겹치는 착잡한 마음의 갈등을 평이하고 차분한 이야기로 전하고 있으며 역자는 이를 적절한 어휘선정과 표현으로 무리 없이 옮기면서 번역시라는 분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 세계를 만들어 내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김광규의 시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작품이 씌어진 시기에 따라 1975～79년, 79～83년, 83～86년까지 세 개의 시대로 분류되어 편집 발표되었다. 그러나 역자는 시의 내용을 중심으로 네 개로 분류하여 발표하고 있다. 이밖에도 시집에 나온 시의 순서도 역시 전부 바꾸어 놓고 보니 한국어와 비교하면서 번역시를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혼란을 주고 있었다. 역자로서는 그렇게 분류해야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원래대로 시대별 분류에다 시의 순서도 그대로 따라가면서 번역을 하였다면 더욱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생각되었다.
이제 이러한 번역 작품들이 가급적 많이 폭 넓게 전파될 때 세계문학 조류에서 한국 문학의 위치가 차차 굳어질 날도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들이 훌륭히 번역되어 세계의 독자들에게 전달되기를 기대한다.
※ 『Tenues sombras del viejo amor』는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스페인 Verbum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