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좋은 시는 근본적으로 말할 수 없는 생의 신비 또는 떨림에 민감하다. 그 경이와 놀라움에 동반된 생성의 힘과 자연과 생명에 대한 체험에 주목할 때 순간적이나마 시인은 우주의 역사와 영혼을 담는 소우주가 된다. 김명인이 그야말로 공허한 “무정란의 시간들” 속에서 “절망”의 몸짓이 되기도 하고, 때로 삶을 살찌우는 “거름”이 되기도 할 “텅빈 메아리 같”은 “침묵”(「꽃을 위한 노트」)에 주목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는 “끝내 채워 넣지 못할 / 환하거나 어두운 생의 허기”(「달의 뒤쪽」)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본래성을 찾기 위해 “끝내 틀 수 없는 소통의 끝자리”(「매물에 들다」)라고 할 수 있는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하지만 그런 침묵의 소리는 어느 누구에게나 그저 다가오는 소리가 아니다. 더욱이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큰소리 형태로 다가오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오랫동안 “사설 감옥에” “갇”혀 “까닭 모를” “그리움”(「기억들」)에 시달리거나 “거대한 맨홀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는 생각”(「맨홀」)과 같은 극심한 좌절감 또는 불안감을 에누리 없이 받아들일 때 겨우 들려온다. “너무 넓”어 감당하기 힘든 “바다”에 섰을 때 느껴지는 스산한 “외로움”(「외로움이 미끼」) 또는 “무료하고 무료하”(「무료한 체류」)기만 하는 일상의 시간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할 때 문득 현시한다. “마감해야할 일정”과 “남은 일정”(「절 아래 주막」) 사이에서 쫓기듯 살아가는 동안 자신을 상실하여 미처 듣지 못하거나 외면해버린 마음의 파문, 양심의 부름이 바로 침묵의 진정한 얼굴이다.

  그러기에 좋은 의미의 시인은 “눈앞에서 순식간에 제 사족을 지워”버린, 그러나 “아직도” 제 마음속에 살아있는 “잔상” 또는 “파문”을 놓치지 않는다. 제가 보거나 경험한 것이 비록 “화사한 꽃무늬뿐”인 “허술한 기억”이었을지라도 “내려가도 내려가도” “발이 닿지 않는” “바닥없는 적요”에 빠지는, 그러나 그 속에서 존재의 근원에서 이뤄지는 도약으로서 “꽃뱀의 시간”을 “피어올”(「파문」)린다. 또한 “강철을 떡 주무르던 주물조차 부식”(「기억들」)시키는 시간성 속에서 “홀로 꽃대를 세우고 있”는 “금화산”의 “절정”과 “낙화” 또는 “시듦”(「꽃을 위한 노트」)을 동시에 볼 줄 아는 생성계의 담지자로서 제 “목숨”이 다름 아닌, “퍼내어도” “덜어낸 적이 없”는 “우주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 한 두레박의 물”(「우물」)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제 “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 말의 블랙홀”(「파문」)에 곧잘 빠지곤 하는 시인들은 그렇게 “누구도 건넌 적이 없”는 “백지 한장만큼”의 실재의 ”여명”(「말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어떤 외부 “풍경과도 차단”된 “죽음의 속살”을 “비로소” 언어의 “손끝”으로나마 “만져”보는 ‘장엄미사’(「장엄미사」)에 참여할 수 있다. “느닷없이 병을 선고받은 친구”와 “창밖”의 “화사한” “꽃”핌이 동시에 일어나는, 즉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들과 우주적 연대성 속에서 자신을 구성하며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때, “꽃의 긴 부재”가 단지 부정적인 것이 아닌, “비로소 마음속 아득히 흘러가는” 그 자체로 충만한 생의 “물꼬”(「배꽃 江」)가 된다.

  그리고 이런 경지에 이르렀을 때야 시인은 단지 “수족관”의 “열대어”를 “빙하 속에 산다는” “얼음 물고기”로 아름답게 착각하는, 그러나 “상상의 자리” 또는 “테두리에 닿은 순간”(「얼음물고기」) 사라지는 것들이 들려주는, 제 “몸에 번지”는 “주름” 또는 “파문”의 “고단한 종착”(「고복저수지」)지에 안착한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채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심해의 침묵” (「얼음물고기」), 삶의 심연을 들여다 볼 줄 알 때 “굴속 같”이 “캄캄한” 삶의 “식도”를 지나 “우주 어딘가에 안착할”(「우물」) 수 있다. 이미 “진작에 흘러간 것들”조차 “마음의 갈고리”로 “붙잡”(「오동나무 배」)을 수 있을 때, 드디어 시는 인간의 가장 거룩한 작업이자 생명의 가장 본질적인 놀이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