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에르베 페조디에(Hervé Péjaudier)_극작가, 번역가. 1953년생.
희곡집『Le Souverain Fou』, 역서『Monsieur Maeng marie sa fille 맹진사댁 경사』『Un pays aussi lointain que le ciel 하늘만큼 먼 나라』등
내가 프랑스에 한국 연극을 번역 소개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베스트셀러 소설이나 영화만이 인기를 모으는 오늘날 연극 번역에 종사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얼마 전 노벨문학상이 전격적으로 희곡 작가인 영국의 해롤드 핀터(Harold Pinter)에게 수여된 것은 희곡이라는 장르가 문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 원래 형태가 종교 제례의식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연극은 최초로 창조된 문학 형태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의 고전을 보아 짐작하건대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유사한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오늘날까지 현저히 살아있는 무속 신앙이 한국 연극 속에서도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한국 연극에 관심을 갖고 프랑스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의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한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한국 연극을 번역하고 자막을 달고 출판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두 문화 사이에서 이런 중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가? 이 질문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우리 번역가들이 프랑스 현지에서 부딪친 문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오페라 애호가가 듣고 있는 곡의 이야기를 한 단어 한 단어 쫓아가지 않고도 그 오페라의 진가를 잘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말이다. 또, 연극을 감상할 때 공연되고 있는 원어 연극을 자막에 의지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만큼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는 데 대해서도 모두들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공연 경향을 보면, 연극이 되었든 오페라가 되었든 외국 공연물에는 자막처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공연에 자막이 달려있다고 해서 굳이 그것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의무적으로 계속 쫓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반대로 아래와 같이 좀 과격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대중은 내 알 바 아니다”, “파리의 관객들은 공연 전에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는 “프랑스 대중이 어떻게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겠는가? 그러니까 자막같은 걸로 현혹시키지 말자” 등등. 이런 입장은 관객과 배우에게 좀 거만한 태도로 비춰질 수 있다. 정말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한 예로, 2003년 7월 뉴욕 링컨센터에서 판소리 다섯 마당 완창 공연이 열렸다. 공연 시작 전날 ‘판소리의 번역과 자막에 관한 문제'라는 주제로 미국과 한국의 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그런데 정작 그곳에 공연을 위해 주재했던 번역가, 자막작업자, 창자(唱者)들은 초청은커녕 그런 종류의 세미나가 열렸다는 것도 몰랐고, 후문으로나 그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런 내용의 학회에 가장 우선적으로 관련되는 사람이 누군가? 바로 판소리 공연을 하는 창자 아닌가? 여기서, 한 프랑스 일간지가 2002년 파리 가을 페스티벌 공연 후 ‘춘향가'를 완창한 안숙선 선생과 가진 인터뷰 내용을 옮겨 보고 싶다. 그는 해외 공연에서는 완창 공연을 피하려 했다고 한다. 판소리의 이야기를 따라오지 못하는 외국인 관객 앞에서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여섯 시간이 넘는 공연을 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가을 파리 공연에서는 자막을 통해 프랑스 관객들이 이야기를 따라오고 한국인 관객들과 함께 울고 웃는 모습을 보며 다시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나로서는 이들 예술가들 옆에서 함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자막작업자, 고수가 하나될 수 있었던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이들은 모두 그늘 속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2002년 파리에서 시작해서 2003년 뉴욕, 에딘버러까지 이어졌던 판소리 해외 완창 공연을 함께 하면서, 창자들이 자신의 공연이 아닐 때면 직접 객석에 나와 앉아 일반 관객들과 함께 추임새를 넣었던 것은 정말 굉장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판소리와 같은 공연 창본 자체를 번역하기 위해서 이 이상 효과적인 입문은 상상할 수 없을 듯하다. 이 점에서 ‘텍스트 번역을 한다는 것 traductologie'과, 창본과 같은 텍스트가 번역이 된 후 공연 속에서 ‘말로 표현된다는 것 dicibilité두 개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번역된 텍스트는 읽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제 우리의 경험을 토대로 간단하게 출판 현실을 이야기해 보겠다. 내 경험상 프랑스에서는 두 종류의 출판사를 만날 수 있다. 희곡 전문 프랑스 출판사는 한국 희곡을 출판하려 하지 않는다. 또 한국 문학 작품을 출판하는 출판사는 희곡을 출판하려 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국 문학 작품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출판사에 희곡 작품 출판을 의뢰했다가 “한국 희곡이라구요? 그럴 바엔 차리리 시를 출판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참 난감했었다. 그 후 나와 내 공역자는 이렇게 이 출판사 저 출판사를 전전하느니, 한국 희곡 전문 총서를 만들어 규모가 작더라도 한 곳에서 꾸준히 출판을 하면 언젠가는 ‘한국 희곡'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출판사로 부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동감했었다. 그 후 우리가 찾은 출판사가 바로 ‘이마고 Imago' 출판사고, 그 출판사에서 우리가 시작한 총서가 ‘센 코렌 Scénes coréennes'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프랑스 전문 극단에 의해 한국 연극이 공연되도록 하는 것이며 한국 극단이 프랑스로 공연을 올 때 그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의 이벤트성 공연 또는 한국서 흔히 통속적으로 말하듯이 ‘잘 나가는' 쇼 비지니스성 상품이 아닌, 작품성 있는, 그래서 이곳 프랑스에서 우리의 연극 위상을 높여줄 수 있는 그런 공연이 성사되는 날이 꼭 오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번역, 자막, 출판에 대해 몇 년간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꼭 연극 번역이 아니더라도 번역 일에 종사하시는 분들께, 어떤 언어로 번역을 하든 모두가 비슷한 종류의 문제에 부딪히며, 또한 출판이라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힘든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 선배들이 우리가 설 발판을 마련해 주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기울인 노고가 밑거름이 되어 미래의 젊은 한국문학 번역가들의 작품이 당당히 세계 문학 시장에서 저명한 출판사들과 겨룰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