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에 살면 산이 더욱 그립다. 가을날 단풍에 물든 산을 보고 돌아오면 겨우내 눈앞에 그 산이 가물거린다. 이제 단풍이 모두 진 산은 괭하다. 이럴 때는 옛사람의 글을 통하여 지난 계절의 단풍놀이를 추억하는 것이 좋으리라.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장가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40대 초반에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겸임하였지만 틈만 나면 문서더미에서 벗어나 산을 찾았다. 그래서 선조 36년(1603)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왔지만 산수벽이 더욱 도졌다. 그래서 사직의 글을 올리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북한산 중흥사(中興寺)에 있던 공문(空門)의 벗 성민(性敏)이 단풍놀이를 오라는 편지를 보내었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산중에 늦서리가 내렸지요. 단풍잎이 정말 붉답니다. 며칠이 지나면 시들고 말텐데요. 마음이 있으시면 한번 오시지요. 이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정구는 그때 멀리 금강산을 아득히 생각하고 표연히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떠날 마음이 들던 중이었다. 편지를 받고 나니 마음을 자제할 수 없었다. 곧바로 행장을 갖추고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때 신응구(申應矩)가 보낸 편지가 이르렀기에 이렇게 답장을 썼다.
“산승이 나를 맞아 단풍과 국화 구경을 하자기에 이제 가려 하오. 당신도 함께 갈 뜻이 있다면 홍제동(弘濟洞) 다리에서 기다리면 될 것이오. 또 산중에서 피리가 없을 수 없으니 가능하면 당신 집의 피리 부는 하인을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소이다.”
그리고 음력 9월 15일 술 두 동이를 가지고 삼각산으로 향하였다. 신응구에게 데려오라고 한 하인은 억량(億良)으로 당시에 피리로 도성 안에 소문이 나 있던 자다. 이정구는 혹 그가 오지 못할까 하여 다시 피리에 능한 이산수(李山守)를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임진왜란 7년 전쟁이 종식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팔자 좋은 양반네들은 도처에서 풍악을 즐겼기에 피리를 잘 부는 이산수도 무척 바빴던 모양이다. 이산수는 당시 도성에서 알아주는 악단을 이끌고 있었으니, 집에 있을 리가 없었다.
이름난 악공을 데리고 가지 못하여 실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어 그냥 홍제원으로 갔다. 게다가 신응구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중흥동 석문(石門)에 이르자 신응구가 바위 위에 앉아 일행을 맞았다. 신응구도 삼각산 단풍놀이에 마음이 설레어 일찍 출발하여 이곳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신응구는 억량이 이미 다른 사람의 잔치에 불려가 데려오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정구는 신응구나마 만난 것이 다행인지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민지동(閔漬洞) 입구에 이르렀을 때 피리 소리가 개울 사이에서 들려왔다. 자세히 들어보니 억량이 부는 소리 같았다. 종을 시켜 가서 살펴보게 하니 과연 그러하였다. 양반들이 신나게 잔치를 벌이고 있는지라 빼내오지 못하고 하인을 시켜 자신들의 행선지를 알려주었다.
중흥사에 도착하니 해가 막 지고 있었다. 여러 승려들이 허겁지겁 월대(月臺)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정구는 목이 말라 술동이를 끌러 시원하게 한 사발씩 들이켰다. 그때 갑자기 피리소리가 먼 데서 가까워졌다. 이윽고 한 사람이 오더니 절을 하는데 바로 억량이었다. 설사가 난다고 둘러대고 지름길로 뛰어온 것이었다. 곧바로 한 곡조를 불게 하고 큰 술잔에 술을 따라 상으로 주었다. 조금 있으니 달이 이미 앞산에 돋아 있는데 가을 하늘이 공활하여 한 점 구름조차 없었다. 산은 텅 비고 골짜기는 고요한데 온갖 소리가 모두 멎어 있었다. 피리소리가 맑게 퍼져나가니 마치 신선이 사는 세상 같았다. 밤이 깊어 승방에서 일행과 이불을 나란히 덮고 등불 아래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전 소년 시절에 책상을 지고 공부하던 때 같았다.
이정구는 아침 일찍 일어나 걸어서 산영루(山映樓) 터로 내려갔다가 향옥탄(響玉灘)을 찾았다. 옥소리가 울리는 여울이나 그 물소리가 아름다웠으리라. 이때 묽은 서리가 지난 며칠 밤 동안 살짝 내리고 지나가 단풍잎이 성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푸른 소나무와 누른 국화가 개울과 계곡에서 고움을 다투고 있었다.
이정구는 내친 김에 백운대(白雲臺)까지 가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전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이 없어져 버렸다. 다만 노적봉(露積峯)으로 희미하게 나무꾼이 다니는 길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위로 올라가기는 어려울 것이라 승려들이 말렸다. 이정구는 이미 백발이 된 나이에 백운대 산행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밥을 먹은 후 절 뒤쪽 작은 암자에 올랐다. 기암괴석이 길에 어지럽게 놓여 있어 열 걸음에 아홉 번이나 넘어지면서 노적봉 아래 이르렀다. 바위가 험준하고 길이 울퉁불퉁하여 발을 붙일 데가 없었다. 두 승려가 먼저 올라가 돌 틈에 나무를 끼워 사다리를 만들고 허리띠를 풀어 드리웠다. 이정구는 허리띠에 몸을 묶고 가장 높은 정상에 이르렀다. 까마득해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없었기에 눈을 감고 정신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잠시 쉬다가 먼 곳을 바라다보았다.
서남의 큰 바다가 멀리 푸른빛으로 가지런하고, 떠 있는 구름과 지는 해에 은빛 세상이 아득하였다.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양주의 수락산(水落山)과 아차산(峨嵯山), 강 남쪽의 관악산(冠岳山)과 청계산(淸溪山), 개성의 천마산(天磨山)과 송악산(松嶽山), 성거산(聖居山) 등으로, 차곡차곡 개미집처럼 포개져 있었다. 양평의 월계협(月溪峽)에 물길이 터져 있는데, 놀란 물결이 서쪽으로 퍼붓듯 달리고 있었다. 한강 한 줄기가 완전히 얼음같이 흰 비단을 풀어놓은 듯 뻗어 있었다. 구불구불, 굽이굽이 도성을 에워싸고 흘렀다. 먼 곳의 봉우리들과 어지럽게 놓인 섬들이 구름 가에 어른거렸다. 승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에게 저기는 무슨 산이고, 여기는 무슨 강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이때 황홀해서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렇군, 그렇군” 하였을 뿐이다. 도성의 백만 채 가옥이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발아래 밥 짓는 연기가 연출하는 생생한 그림 한 폭만 보였다. 구름 틈으로 상투처럼 생긴 것이 하나 드러나 보이는데, 바로 남산이었다.
어렵게 올라온 백운대라 이정구는 목구멍이 타서 컥컥 먼지가 날 지경이었다. 급하게 술병을 끌러 술을 들이켰다. 흥이 무르익어 몇 병을 다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취하여 노래를 부르고 아들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 피리소리가 바람을 따라 높은 하늘로 흩어졌다. 이때 민지암 쪽을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고개를 쳐들고 흰옷을 휘날리며 마치 누구를 부르는 듯하였다. 이정구는 의아하였지만 알 수 없었다.
마침 흥도 다하고 술도 떨어져 민지암으로 내려왔다. 승려들이 마련한 두부를 반찬으로 하여 밥을 먹고 포단(蒲團)에 누워 쉬면서 안정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렸다. 악사 이용수의 제자로, 이정구가 삼각산을 오른다는 통지를 듣고 급하게 거문고장이 박소로(朴召老)를 데리고 와서 민지암에서 기다리다가 백운대에 있는 이정구를 보고 옷을 흔들어 불렀던 것이라 하였다. 이들은 귀로에 무릉계(武陵溪)의 가을빛도 감상하고 갈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정구는 산사의 승려들과 헤어져 개울을 따라 내려왔다. 골짜기 입구를 나서자 이산수가 거문고를 안고 마중 나와 있었다. 이때 가을물이 완전히 줄어들지 않아 물소리가 콸콸 났고 기이한 바위가 반짝반짝 영롱하였으며 긴 소나무의 어른거리는 푸른빛이 사람에게 파고들었다. 이때의 풍류를 이정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여러 사람들이 맨발로 물을 밟았다. 옷을 벗고 바위에 앉았다. 임시로 얹은 솥에서 음식을 만들어 연신 바쳤다. 고기와 견과가 수북하였다. 혹 술잔을 띄워 다투어 마시기도 하고,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단풍가지를 꺾어 머리에 꽂고 나는 국화꽃을 꺾어 술잔에 띄웠다. 술에 취하니 더욱 즐거워 손뼉을 치고 춤을 추었다. 좋은 거문고로 묘한 곡조를 연주하며 공교롭고 기이한 솜씨를 다투니 모두 천고에 드문 음악이었다. 신응구가 말하였다.
“세 악공이 정말 국수(國手)이기는 하지만, 오늘 더욱 빼어남을 알게 되었구려. 어찌 땅이 아름다워 그런 것이 아니겠소?”
세 악공이 말하였다.
“땅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오늘 요행으로 뭇 신선들이 모이시는 것을 만나게 되었으니, 저희들 또한 정이 끌리고 흥이 나서 가락이 절로 좋아지게 된 것입니다. 마치 신령이 도와주신 것 같습니다.”
저물녘에 다함께 일어나 휘청휘청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술에 취한 뒤 말을 나란히 하여 돌아왔다. 길에서도 피리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거문고 또한 때때로 연주되었다. 행인들이 바라보고 신선처럼 생각하였다. 조금 있으니 달이 동쪽에서 떠올랐다. 나는 다시 흥이 나서 말 위에서 큰 술잔을 채워 마셨다. 황혼에 사령(沙嶺)에 올랐다. 먼저 뜀박질을 잘하는 이를 시켜 성문을 조금 열어놓게 하였다. 성문 밖에 이르니, 수많은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달빛이 대낮 같았다. 남은 술동이가 아직 많은지 묻고 수문장을 불러 데려오게 하였다. 함께 앉아 잔을 씻고 다시 술을 따라 마셨다. 몇 곡조 흐드러지게 연주하였다. 취하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집에 이르니 이미 자정이었다.
- 이정구의 「삼각산을 유람한 기행문 遊三角山記」
이정구는 문장이 뛰어나 한문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북한산을 유람하고 쓴 이 기문은 예조판서, 혹은 대제학으로서의 위엄을 찾지 않았다. 또 산을 유람하고 적는 유산기(遊山記)가 일정을 중심으로 사실의 전달이나 의논을 주로 하지만, 이 글은 맑은 흥이 깃든 서정소품이라 할 만하다. 특히 여러 악공들이 어우러진 한바탕 풍류가 산수의 흥을 더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좋은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과 어울려, 단풍잎을 머리에 꽂고 국화꽃을 술잔에 띄워 마시는 풍류, 삭막한 이 계절에 더욱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