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선택과 배제를 넘어서
글 곽효환_시인, 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 1967년생
시집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 저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구보 박태원의 시와 시론』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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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춘원 이광수에 관한 몇몇 기사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때맞추어 발간된 『한국전쟁납북사건 자료집』에 수록된 춘원이 납북되기 전에 인민군으로부터 자수를 권유(공산당으로 전향 종용으로 표현하기도 했다)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절필했다는 춘원의 차녀 이정화 박사의 증언에 관한 기사와 인터뷰가 그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춘원의 아내 허영숙은 인민군이 춘원을 잡으러 왔을 때 장성한 아들이 인민군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남편을 피신시키지 않는 선택을 했고, 이상주의적 세계관으로 일관한 춘원을 ‘위선자’로 봤다고 한다.
춘원은 그런 아내의 마음을 “당신은 선인(善人)인 척해 남들로부터 존경받는다/나는 손이 다 닳도록 당신을 위해 살았는데 당신은 날 위해 무얼 했소/그러니 나를 이해라도 해주는 남편이라도 돼 주소서(「아내의 설교」)”라고 시로 옮겼다고 한다.
한 가장으로서 또 아버지로서의 춘원의 면모에 대한 증언도 흥미로웠지만 개인적으로는 ‘친일파 춘원’의 자녀로서 갖는 회한을 표현한 대목이 오랫동안 뇌리에 잔영으로 남았다. “여기에 오면 밤낮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되는데”라는 조국에서 춘원의 자녀로서 맞는 처지와 “연좌제 비슷한 게 있으니 제 팔자는 민족 앞에 사과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아버님을 사랑하는 분들에게는 감사를, 미워하는 분들에게는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라는 ‘춘원의 딸’로서는 처음 입장을 밝힌다는 대목에서 잠시 복잡한 무엇이 가슴에서 뒤엉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문득 2005년 여름 민족작가대회 남측 작가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일정 후반부에 남측 작가단 가운데 일부가 평양시 외곽 용궁리에 조성된 ‘재북인사묘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거나 월북한 남측 유명 인사 62명의 유해를 안치한 이 묘역은 2003년 말 조성을 시작하여 남측 인사들에게 처음 공개한 것이라고 했다. 강원도 정선에서 제헌의회 의원에 당선되었었다는 당시 85세의 최태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이 나와 묘역에 안치된 안재홍, 정인보, 현상윤 등에 대한 기억을 짚어 나갔다. 얼마 되지 않아 남측작가단의 관심은 일제히 서너 줄 뒤에 있는 춘원의 묘에 모아졌다. 춘원은 1950년 9월 18일 서울서 출발해 10월 20일 평양에 도착했고 폐결핵이 악화되어 평양에 온 지 닷새 만에 만포의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차안에서 작고했다고 그는 증언했다. 자신은 ‘가야마 미쓰오(香山光郞)’의 친일 행적을 용서할 수 없어 그를 대상 인물에서 제외하려 했는데 ‘위대한 장군님’께서 북으로 온 것만으로도 과거를 반성한 것이라고 친히 지시함으로써 공화국은 그의 과오를 용서하고 품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춘원이 조금 더 살았으면 북의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뙤약볕 가득한 묘역을 벗어나며 필자는 ‘그가 거기서 세상을 떠난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위 두 이야기는 춘원을 바라보는 남과 북의 서로 다른 그러면서도 닮은꼴을 한 애증어린 시선을 볼 수 있다. 각자의 입장에서 의도적으로 외면, 배제하거나 필요에 따라 선택, 활용하려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딸의 증언 가운데 춘원이 인민군에 전향할 것을 거부하고 절필했다는 것은 과장되거나 자녀로서의 바람이 투사된 것일 수 있다. 1950년 7월 납북되었을 때 그는 이미 신장과 허파를 하나씩 떼어내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고 납북 과정에서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얼마 되지 않아 병사한 사실에 비추어 전향 거부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절필’은 포장된 것, 즉 이미 글을 쓸 수 없는 건강상태였을 것이다. 한편, 춘원이 북으로 온 것만으로도 과거를 반성한 것이며 공화국은 과거의 과오도 용서하고 품었다는 말은 다분히 수사로 보인다. 춘원의 이용가치를 높이 샀을 것이고 병약한 그가 일찍 사망하자 의도대로 이용하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어쨌든 역사는 이처럼 후대에 의해, 또 필요에 의해 편집되고 각색, 재정리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런데 그것을 금지하거나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객관적인 평가가 선행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춘원의 경우에서만 봐도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장이나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편집하고 추측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실은 부유하고 팩트만 남아 있는 셈이다.
필자의 경우 정규 교육과정에서 ‘친일파’인 춘원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문학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그를 접해야 했고 어떤 식으로든 그를 지나가야만 하는 여러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몹시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빼고 어떻게 근대 문학사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며, 그를 배제하고 개화기를 거쳐 근대로 이양되는 과정의 민족의식과 계몽정신을 관찰할 수 있을까.
이는 춘원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랫동안의 일제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세계대전에 가까운 민족전쟁이라는 불행한 근대사를 지나온 우리 사회 곳곳에서 공통적으로 마주치는 현상으로 결코 어떤 선택이나 배제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것은 배제하거나 선택하려는 강도가 강해질수록 더 큰 상처로, 더 깊은 갈등과 분열의 늪으로 빠지게 되고 마침내는 출구 없는 미궁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바람을 갖게 된다. 온갖 수사와 함께 21세기를 맞은 지 15년, 그리고 내년이면 해방 70주년을 맞으면서 우리 사회가 감성과 인상에 의지한 이분법적 태도에서 그리고 선택과 배제로 일관한 비평적 잣대에서 벗어나 보자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특정 대상을 부정하거나 옹호하기에 앞서 그들의 공과 과를 함께 놓고 검토, 조명함으로써 어느 정도 합의된 공동 담론을 끌어내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더 늦기 전에.
이와 관련하여 2001년부터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가 개최하고 있는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에서 중요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매년 탄생 100주년을 맞는 문학인들을 조명하는 이 문학제는 우리 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긴 작가들의 문학적 업적을 객관적으로 조명하되 친일, 월북 등 문학 외적인 요인들로 선택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그들이 남긴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여 온전한 그 위치를 자리매김해오고 있다. 이를 통해 문학만의 길을 지킨 문인, 친일의 변절의 길을 걸은 문인, 그리고 북을 택한 문인 100여명이 문학이라는 이름아래 공론의 장으로 불려 나와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거친 뺄셈보다 따뜻하게 아우르면서도 엄정히 쭉정이를 골라내는 아름다운 덧셈을 그려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