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빈자리
글 김중일_시인. 1977년생
시집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등
|
나무가 흔들리는 건 나무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건 바람이 기억한다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옆을 돌아봤을 때 번번이 거기에 없는 것은 그냥 이제 없는 것이다.
- 「밀주」, 김중일
스무 살이 되던 오월에 처음 시 비슷한 것을 썼다. 그 전까진 시를 쓰기는커녕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 말고는 읽어본 적도 없었다. 그 완벽한 무관심은 내가 이공계열 학생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무관심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사실 무관심이란 ‘알고는 있으나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당시의 나는 대한민국에서 시가 여전히 계속 생산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요컨대 문학이란, 스무 살 이전까지 내가 가진 지도에는 없는 섬이었다.
대학 신입생이던 나는 몇 명의 동기들과 휩쓸려 학생회관을 순회하며 몇 군데 동아리에 재미로 입회원서를 썼는데 가장 열렬히 맞아준 곳이 문학회였다.
아무 생각 없이 문지방을 넘었으나, 미안할 정도의 대접을 받다보니 계속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 회원이 극히 부족했으므로, 우리는 동아리방 책장을 정리하거나 소파를 재배치하는데 주로 앞장섰고, 간혹 집회도 쫓아다녔으며, 거의 매일 술판에 참여했다. 여전히 나는 문학이란 섬으로 상륙하기 전이었고, 갑자기 한꺼번에 몰아서 부여된 청춘 위에 표류 중이었다. 일은 그해 축제 때 벌어졌다.
시화전을 위한 시를 한 편씩 의무적으로 출품해야 했다. 나와 몇몇은 축제 이틀 전까지 발길을 끊고 도망 다니다가 붙잡혀 빈 강의실에 감금되다시피 했다. 그때 쓴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나의 첫 시. 첫 구절이 “첫눈 맞고 밟고 / 집에 오는 길에”였던 것 정도가 희미하게 생각나지만, 내용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내 유년시절 과일이나 빵 봉투를 들고 오랜만에 집에 오시던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는 십대 후반까지 아버지와 한집에 지냈던 적이 거의 없다. 그는 주로 수개월에서 길면 이삼년간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먼 이국에서 일하거나, 통근이 어려운 곳으로 직장을 옮겨 다녀야 했다. 아무튼 당연히 나의 첫 시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의미를 둔다면, 난생 처음 쓴 시에서 나는 특별히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부재’에 대해서 표현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내가 쓴 시들은, ‘빈자리’로 남은 곳의 지번을 기록하고, 차지하여 들어앉는다. 부재를 통해 극적으로 삶을 경험하고 새기며 기억하는 것이 시의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학의 ‘ㅁ’도 모르던 천둥벌거숭이가 처음 시를 쓰고 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놀라워라.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 말고도 이후에 이토록 많은 시와 소설들이 세상에 나와 있다니! 세상이 나만 빼고 저만치 한참 멀리도 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동아리방에 비치된 박노해, 김남주, 김용택 등의 시집을 읽어보기 시작했고 도서관 문학 코너로 찾아들었으며 인상적이었던 시집들은 구입해 소장하기 시작했다. 이성복, 최승자, 허수경 등의 첫 시집들……. 그리고 오정희, 조세희, 윤대녕 등의 단편소설집들……. 문외한인 나는 시와 소설의 경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짧으면 시요 조금 길어도 시며, 많이 길면 소설이구나 했다. 시를 읽듯 아름다운 문장으로 수놓인 단편소설을 찾아 읽었고, 이야기 사이를 침묵으로 채우는 시의 언어를 향유했다. 당시의 나는 소설이든 시든 내가 직접 쓸 수 있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으므로, 난독(亂讀)이었지만 순전히 유희하는 독서가 가능했다. 방학 중엔 장편이나 대하소설을 날 잡고 읽기도 했지만, 당시의 나는 거대한 서사보다는 아름다운 문장과 반짝이는 은유에 더 매혹되어 있었다. 주로 국내 작가가 쓴 시와 단편소설에 몰입했다. 나 역시 카프카, 마르케스, 쿤데라 등의 외국 소설들에 틈틈이 빠져들었지만, 다만 번역된 시는 내게 거의 감흥을 주지 못했다.
|
내 독서 목록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누구나 한 번쯤 읽었을 법한 책들이 전부다. 그중 내가 열광한 책들의 공통점을 간략히 요약한다면, 시간이나 문명에 의해서 우리 삶이 ‘잃어버린 것’ 그래서 ‘이제 없는 것’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사람의 힘으로 저항할 수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부재가 여생에 어떻게 ‘빈자리’로 자리하는지에 대한 미적이며 개성적인 기록들이다.
2014년은 뼈에 새기고 피부로 봉분을 쌓아 놓을 한 해다. 진도 앞바다에 묻힌 수백 명의 사람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여 가족들이 ‘빈자리’ 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흐르는 시간을 전 인류가 어깨 겯고 가로막는다고 막아지지 않듯, 완성된 부재에 대해 우리는 감히 저항할 수 없다. 올해의 모든 ‘빈자리’가 지금 내 가슴에 싱크홀처럼 시커멓게 뻥 뚫려 있다. 개인적으로도 올 봄에 부친이 떠나셨고, 부친을 보내드리던 자리에서 누구보다 슬피 울던 사촌 형님도 불과 얼마 전 가을 갑작스럽게 하늘로 떠났다. 그들의 ‘빈자리’에 자꾸 눈길이 간다. 습관적으로 자꾸 돌아보는데 이제는 없는 것. 그 ‘빈자리’의 단호한 침묵을 통해 나는 새삼 기억하고 상상하며 배운다. 새삼스러운 것들이 사실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든 기뻐할 만한 일에 기뻐하고, 누구나 고통스러울 일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시간은 흐르고, 잊은 듯 살아가며, 사라지는 것들에게 문학을 배우고, 또 잊고 살다가 번번이 된통 얻어맞으며 기초부터 글쓰기를 다시 배운다. 세상의 모든 ‘빈자리’는 내 글쓰기의 스승이므로, 사라지는 것들이 있는 한 적어도 나는 계속 배우며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글쓰는 행위를 통해 나 자신의 사라짐을 조금씩 대비할 것이다. 그러나 내 스스로 부재하는 자가 되는 순간에도, 끝내 부재를 다 배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세월호 참사로 인한 실종자가 197일 만에 발견되었다. 295번째 ‘빈자리’다.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 돌아올 것이다.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빈자리’라도 가족들에게 온전히 돌려주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