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판의 미로
글 천운영_소설가. 1971년생
소설 『바늘』 『명랑』 『잘 가라, 서커스』 『엄마도 아시다시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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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홀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조명은 낮고 서늘했다. 긴장을 내려놓으면서도 충만해지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미처 가시지 않은 열기를 차가운 고요 속에서 즐길 수 있는 시간. 그녀는 홀 한가운데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대 정면의 빈 영사막을 보았다. 그 막을 지나갔던 수많은 영상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초침소리와 종소리만 들렸다.
숨죽인 십오 분들. 닷새간 이어진 수많은 미팅들. 판을 깔기 위한 일 년의 준비. 다큐포트는 이제 시상식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피칭을 위해 반원형으로 배치했던 테이블들은 이미 제자리로 돌아갔다. 벽면을 장식한 스물 네 개의 참가작 플래카드까지 내려지고 나면, 이곳은 평소에 그래왔던 것처럼 누군가의 결혼식이나 어느 기관의 식상한 행사를 위한 장소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리모델링을 했지만 여전히 쇠락한 느낌이 나는 이 호텔의 외관처럼 어설프게. 에메랄드 홀은 그녀의 다큐포트를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토록 아름답고 정확하고 강력한 행사는 없었노라고. 과거에도 미래에도.
12편의 본심 진출작을 선별하는 것부터 시작해 멘토링과 모의피칭 다큐랩에 이르기까지 공식 일정만 육 개월이었다. 국내외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로 자문위원단을 구성하고 해외 자문위원을 영입하고, 국내피칭에서 아시아피칭까지 확장하기 위한 모든 준비과정을 따지자면, 지난 2회 행사가 끝난 직후부터 꼬박 일 년이었다.
다큐포트는 다큐멘터리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 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항구의 의미를 내포한 명칭이었다. 주최도시가 항구도시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 시의 예산을 확보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트레이닝과 심포지엄, 미개봉 신작 <파란>의 개막 쇼케이스.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벤치마킹한 도쿄다큐포트를 뛰어넘는, 아시아 최대의 다큐포트. 수식어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숫자들이 증명해 줄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치와 통계니까. 참가인원. 출품작 숫자. 미팅횟수. 시상과 현물지원 펀드의 규모. 모든 문서에는 숫자와 통계가 남는다. 감동이나 자부심은 장식품일 뿐이다. 3회 4회 5회…… 그 숫자가 쌓여 가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권위다. 권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벌써 다음 계획이 꿈틀거리고 있다. 판의 권위를 높여주는 프로그램.
예산만으로는 그녀가 지금까지 관여한 행사들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았다. 다큐멘터리 자체가 워낙 판이 작았다. 관객이라고 해봐야 만 명을 성공의 기준으로 잡는다. 상업영화가 1700만 관객을 기록한 마당에 고작 만 명. 일억 안팎의 제작예산. 그런 판에서 총 6억 원 규모의 상금과 지원을 내건 다큐포트행사를 만들었다. 총예산 5천만 원으로 시작한 행사를, 일 년 만에, 그녀가.
처음에 강 국장에게 프로그래머 제의를 받았을 때, 그녀는 고민할 여지도 없이 거절할 생각이었다. 다큐멘터리는 매력적인 요소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 판에 직접 뛰어들 만큼의 매력은 아니었다. 각종 음악제와 영화제 프로그래밍을 해온 그녀로서는 이력에 새로운 장르를 추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비장한 태도를 가진 모든 것을 경계했다. 장르도 인간도.
강 국장은 인생 자체가 장애물경기인 사람이었다. 굴욕을 뛰어넘고 저항하고 투쟁하고, 기어이 작은 승리를 거머쥔 사람. 그리고 다시 장애물을 향해 기꺼이 달려가는 사람. 그의 필모그래피가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감도는 비장한 표정에서는 여전히 저항 중인 사람의 결기가 느껴졌다. 저항 투쟁 승리 진실 실천 정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역시 그의 표정과 똑같이 닮아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저항의 한 방식이다. 다큐가 상영되고 여론을 형성하고 여론의 힘으로 정치적 실천을 하고. 어떤 다큐를 만드느냐는 것은 어떤 저항을 하고 싶은지가 결정을 한다. 그렇게 저항하며 살아남은 게 다큐멘터리다. 자신 또한 그렇게 살아남았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남으려고 저항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걸 안다.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정중히 사양했다. 돌아서는 그녀에게 그는 마지막 수를 두었다.
이 판을 키우고 싶다. 돈을 벌게 하고 싶단 뜻이다. 그럴 수 있는 장르라는 걸 시장이 이미 증명해 주었다. 우린 전문가가 필요하다. 판을 키워줄 전문가. 당신이 그걸 해줬으면 한다.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4년 겨울호 지면을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