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디지털 현실 속에서 구원과 신성을 성찰하다

라이따이한에 관한 거짓 혹은 진실

삶의 주인이 되는 길

선택과 배제를 넘어서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책상은, 책상이다?

운명, 미워하지 않는다

폭설 속에 새긴 궁핍한 시절의 꿈 하나

빈자리

신촌, 유령이 떠도는 거리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詩샘

판의 미로 데자뷰

밤에 듣는 밤 이야기

뻐끔담배 우산을 꽃이라 불러보는 오후 새들은 어디서 날아오나 시간을 담는 용기 흔해빠진 자살 여행

글밭단상

시간을 담는 용기

글 윤해서_소설가. 1981년생
소설 『최초의 자살』 등

네 번째 4

아랫집 윗집 사이에 울타리는 있지만. 슬픈 일 기쁜 일 모두 내일처럼 여기고. 이렇게 시작되는 동요가 있다. 나는 이 동요를 들으면 언제, 어디서든 3학년 5반, 복도 끝 교실로 던져진다. 담임선생님은 지금 생각해도 참 힘든 분이셨는데 단체 기합이 없는 날이 없었다. 9살, 10살 우리들은 줄 맞춰 더 무거운 의자가 있는 과학실로, 의자를 들고 서 있는 벌을 받으러 내려가곤 했다. 교실 한쪽 구석에는 매가 한 묶음 놓여 있었는데 하루에 한 개씩 부러졌다. 아이들이 맞아서 부러지지 않은 날에는 선생님이 두툼한 손으로 꺾어버렸던 것을 기억한다.
아랫집 윗집 사이에 울타리는 있지만. 그 동요를 처음 배웠던 날.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해가 질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밖이 어둑어둑해지고도 한참 우리는 책상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 동요를 수십 번, 수백 번 불렀다. 제대로 따라 부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몇 차례 단체 매질을 당했다. 서로 서로 도와가며 한집처럼 지내자. 우리는 한겨레다. 단군의 자손이다. 이렇게 마무리되는 동요의 끝부분을 아이들은 거의 울먹이며 불렀다. 분명 즐거운 기억은 아니지만. 그 시간은 고스란히 아랫집 윗집 사이에 담겼다.
만약 우리가 시간을 어떤 용기에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은 내밀한 일기장이나 부치지 못한 엽서, 한 장의 사진, 책 귀퉁이에 남은 낙서 같은 것일 수 있다. 혹은 그 시간을 함께 통과한 누군가. 그 사람의 몸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음악.

음악은 어떤 시간을 아주 선명하게 소환한다. 시간은, 어떤 기억은 스스로 음악 속에 고인다. 길을 걷다가 무심코 듣게 된 오래 전 유행가에 괜스레 첫사랑을 떠올리게 되는 일. 나에게는 언젠가부터 습관이 하나 생겼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음악과 접붙이는 것인데. 계획성도 준비성도 전혀 없는 내가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하는 유일한 준비가 있다면 그건 음악을 고르는 일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곳에서 들을 음악들. 그 도시의 거리를, 새벽을, 밤을 담을 용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음악은 시간을, 공간을, 나를 집어삼킨다. 나는 먼 곳으로 떠밀린다. 끌려간다. 한 순간, 어떤 음악들은 내가 우주의 일부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나는 지금 헝가리안 랩소디 No.6을 듣고 있는데 이 경쾌한 피아노곡은 나를 푸시 산을 오르는 새벽의 계단으로 안내한다.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려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캄캄한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무서움을 달래기 위해 이 음악을 듣고 또 들었었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동시에 그 산의 계단을 오른다. 손전등의 불빛이 닿는 곳마다 서있던 검고 무성한 나무들, 문 닫힌 매표소와 커다란 돌탑. 그런 것들이 아르헤르치의 힘찬 타건과 함께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기억을 두드린다.
거리를 걷다가. 가만히 강물을, 호수를, 바다를 바라보다가. 나무 아래 서서 나뭇잎들 사이로 흔들리는 빛을 향해 나도 모르게 손을 뻗다가. 담아 두고 싶은 순간이 생기면 나는 음악을 고른다. 한 곡을 반복해서 듣는다. 어떤 음악들은 이렇게 기억과 접붙여진다. 시간은 음악 속에 담긴다.
사실 더 많은 음악들은 스스로 기억된다. 무의식중에 한 곡을 반복해서 들었던 시절은 저절로 그 음악 속에 깃든다. 김광석의 많은 노래들이 내게는 그렇다. 제임스 블레이크의 어떤 노래들은 나를 밤으로 이끈다. <인사이드 르윈>의 OST는 지금 들으면 지난 겨울을 떠올리게 한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피아노 가이즈의 연주는 아마도 올해 가을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침묵.
굳이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음악의 절반은 침묵의 몫이라는 것을.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도 침묵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음악을 음악이게 하는 침묵. 그러나 때로 부끄러운 침묵 속에서 슬픈 세월은 무심히 흐른다. 올 봄은 지난봄이 되고 지난해 봄이 되고 언젠가 그해 봄이 되겠지만. 우리의 봄은 고스란히 침묵에 고일 것이다. 침묵은 불시에 봄을 불러낼 것이다.
도처의 침묵은 봄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를 봄으로. 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