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흔해빠진 자살 여행
글 장희태_소설가, 11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1987년생
소설 「시안 쥐와 함께 잠들다」 등
다섯 번째 5
질문을 하나 하겠다. 일 년 열두 달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달은 언제일까. 실제로 이 질문을 했을 때, 연말인 11월과 12월을 꼽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한 해의 끝물에서, 삶에 회환을 느껴본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밖으로는 외투의 단추를 단단히 잠가야 하고, 안으로는 잦은 모임과 연말 스트레스로 찬바람이 불어댄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 우울증이고, 계절성 우울증 중 겨울철 우울증을 앓는 환자가 가장 많다는 통계도 이 가정에 힘을 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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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답은 정반대이다. 최근 10년간 평균적으로 가장 자살률이 높은 시기는 5월, 봄이다. 11월과 12월, 그러니까 당신이 읽고 있는 이 《대산문화》 겨울호가 발간 될 무렵은 일 년 중 자살률이 가장 낮은 달이다. 연말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자살을 생각하지만, 도리어 가장 적은 사람만이 그걸 실행하는 이상한 계절인 셈이다. 나는 이 묘한 통계를 처음 봤을 때 9년 전, 자살을 마음먹었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2005년 11월, 인터넷 카페를 돌아다니다 눈에 띄는 게시물을 발견했다. ‘자살 여행을 떠날 동반자 구함’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나는 그때 고등학교 3학년이었지만 학교를 거의 다니지 않았고, 딱히 종교를 믿는 것도 아니면서 광주 무각사에서 유발행자를 하고 있었으며, 죽을 날이 까마득하면서도 합법적으로 안락사가 허용되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생에 마지막 날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글에는 메일 주소만 적혀 있었다. 연락처라던가 자살 방법과 같은 상세한 내용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나는 당장 우울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내가 적은 글자들은 영락없이 하루하루 겨우 존재하고만 있을 뿐인 사람을 훌륭히 연기해 주었고, 곧바로 답장이 왔다. 핸드폰 번호와 아주 짧은 메시지였다. ‘날짜는 이틀 뒤, 강변역 1번 출구에서 만남, 목적지는 그 날 점심을 먹으며 결정’ 그가 올렸던 게시물은 이미 지워져 있었고, 막상 너무 쉽게 자살 여행에 합류하게 되자 겁이 좀 났다. 자고 있는데 다짜고짜 칼로 찌르거나 몰래 약을 먹이지는 않을까? 아니면 신종 인신매매 방법인가? 별별 생각에 잠을 설쳤다.
이틀 뒤 테크노마트 버스 정류장에서 강변역 1번 출구를 살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는데, 유난히 춥더니 눈까지 내렸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지나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내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적잖이 놀랐다. 그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악의 경우 그녀를 힘으로 제압할 수도 있으리라. 나는 놀란 기색을 추스르며 그녀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이십대 중반쯤 됐을까, 다행히도 세련된 미인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마른 몸에 회색니트와 청바지를 걸치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너무 수수해서 촌스럽게까지 보였다. 다만 주근깨 많은 파리한 얼굴과 대조되는 검고 긴 생머리만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근처 김밥 나라에서 제육덮밥과 김밥 두 줄을 먹었다. 여자가 물을 떠다 주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밥을 먹고 곧장 동서울터미널에 들어가 경포대 가는 표 두 장을 샀다. 여자는 바다를 보고 싶어 했다. 생의 마지막 여행치고는 꽤나 소박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여자는 창가 자리에 앉아 한참이나 창유리 너머를 응시하더니, 이내 머리를 기댄 채 잠들었다.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머리가 창문에 부딪치는데도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그저 강한 충격이 오면 눈을 게슴츠레 떴다가 다시 잠드는 것이었다. 나는 좀 바보가 아닌가 생각하며 그녀의 머리를 내 어깨 쪽으로 기댔다. 그리고 여자의 가방을 열어 보았다. 두통약, 핸드폰, 지갑, 휴지, 속옷 한 벌, 여행을 떠나는 여자의 가방 치고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칼이나 약이 없다는 사실에 그제야 나도 조금씩 잠이 쏟아졌다. 지갑 안에는 십만 원짜리 수표 몇 장과 만 원짜리가 두툼하게 들어 있었다.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하고 고단한 얼굴로 잘 잤다. 내가 지나치게 경계를 한 것 같다. 강원도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둘 다 아무 일 없이 무사했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경포대로 향했다. 비수기의 밤 바닷가는 고요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먹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바다와, 경계가 불분명한 하늘, 그리고 눈뿐이었다. 나는 발이 너무나 시려 신발조차 벗을 수가 없었는데, 여자는 한참동안이나 맨발로 눈 덮인 해변과 바다를 걸었다. 해가 완전히 지자 하늘과 해변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았고, 나는 어둠 속에서 춤추듯 걷는 여자를 지켜보며 소주 한 병을 마셨다. 여자도 소주를 가져와 병째로 마셨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취하자 죽기로 결심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댐이 터지듯 여자의 이야기는 쏟아졌다. 여자는 새 아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세상의 어떤 존재도 저만의 고유한 비극을 지닐 수 없다는 사실에 나도 조금 울었다. 바다 바람에 여자의 암막 같은 머리칼이 흩날릴 때, 몇 번인가 입을 맞추기도 했다.
나는 그녀를 거의 업다시피 해서 근처의 팔도민박으로 향했다. 바다로 뛰어들었어야 할 그녀는 술기운탓에 금세 잠들었고, 나는 이끼 낀 낡은 욕조에서 올라오는 물비린내를 맡으며 샤워를 했다. 코를 고는 여자 옆에 누워서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다 깨달았다. 나는 동반 자살을 프러포즈 받은 것이다. 잠든 그녀를 두고 민박집을 나오니 눈발은 더욱 거세져 있었다. 나는 혼자 강릉역으로 향하며, 스위스 융프라우 열차를 타고 만년설을 휘도는 전 세계의 안락사 희망자들을 떠올렸다. 꿈을 이루기 위해 천만 원이 넘는 비용을 지불하고, 대기번호표를 뽑은 후 몇 년간을 더 연명했을 그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놀랐던 건, 자신의 죽음을 위해 그렇게까지 많은 걸 쏟아 붓고 낯선 스위스 땅으로 건너간 사람들 중에, 끝내 마지막 주사를 맞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언젠가 그 이유가 궁금해 자살 희망자들의 수기를 찾아본 일이 있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대목은 이런 문장이었다. 스위스의 만년설을 휘돌아가며, 나는 내 목숨이 한 없이 작은 점처럼 뭉쳐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날 밤 나는 경포대를 떠나며 그 이유를 분명히 깨달았고, 그녀는 그날 죽지 않았다. 그 여자와는 그 뒤로도 두 번 더 만났는데, 마지막으로 만난 여름에 그녀는 인천에서 독립을 한 상태였다. 눈이 오렌지색인 길고양이와 함께였고 사이가 좋아 보였다. 헤어지는 순간에 그녀는 살이 좀 오른 양팔을 흔들며, 내가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가 떠난 아침 죽음조차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여자가 그날 봤을 낡은 모텔 풍경은, 알프스의 만년설과 다르지 않은 압도적인 풍경이었으리라.
여담이지만 그날 나는 경포대에서 강릉고속버스터미널까지 두 시간 가량을 걸어서 갔다. 얼음눈이 섞인 바닷바람을 맞으며 하염없이 갔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나와 여자와 어떤 예약된 죽음들을 떠올렸지만, 내 손은 필사적으로 코트 자락을 여미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