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책상은, 책상이다?
글 오정희_소설가. 1947년생
소설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새』 『옛 우물』 『중국인거리』 『가을여자』 『돼지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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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는 세 개의 책상, 즉 컴퓨터와 프린터를 올려놓고 사용하는 널찍한 책상과, 앤틱풍의 견고한 독서용 책상과, 그것들보다 작고 오래된 책상이 있다. 갖가지 필기구며 안경, 노트, 펼쳐진 책들로 어수선한 다른 책상들과는 달리 그 낡은 책상은 사용하는 흔적이 없어 쓰일 일 없이 공연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내 방에 와본 사람들은 그 책상에 대해 ‘이런 물건이 아직도 있다니요?’ 하고 놀란다. 이제는 폐기물 창고나 재활용센터에서도 보기 힘든 모양새와 크기가 중고등학생용으로 보이는 책상이 작가의 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거나 먼 기억속의 옛 물건에 대한 향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내게 긴하지 않은 물건들을 치우라고, 이제는 필요치 않은 것들을 정리할 때라고 충고한다. 옳은 말이다. 나또한 아침에 눈뜨면 오늘은 또 무엇을 없애나 하는 궁리부터 하게 되지 않던가. 내게 세개씩이나 책상이 필요할 이유는 없다. 나는 말없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하지만 그 책상을 내 손으로 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을 안다. 목재를 사용하여 만든 물건일 뿐이라지만 나는 그 책상에 대해 그렇게 명쾌히 정의내릴 수 없음을 아는 탓이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50년 가까운 세월이거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깊숙하고 가차 없이 바라보던 시선, 그 시선이 뜻하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상은 그동안 잦은 이사로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흠집투성이가 되었다. 발 받침대가 부러지기도 하고 서랍 밑이 처져 여닫이가 원활치 못하다. 늙은 책상은 때때로 삐걱삐걱 신음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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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내 소원은 잠글 수 있는 서랍이 달린 책상을 갖는 것이었다. 전쟁 후 어려웠던 시절, 어느 집이나 아이들은 많고 가난했다. 남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끼리 여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끼리, 어린아이들은 부모와 한 방을 썼다. 온 식구가 단칸방살이할 지경만 아니면 그만해도 먹고살만한 집이라 했다. 아이들 각자마다 책상을 마련해주는 일은 당연히 어려웠을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어머니는 사과궤짝 책상을 마련해주셨다. 얇은 송판을 이어 만든 사과궤짝을 옆으로 누이고 보자기를 씌워 그 안에 책과 공책을 넣었다. 알록달록한 보자기 안쪽은 좁은 공간이었지만 아늑하고 비밀스러운 장소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그 안에 공책이나 책 외에도 공깃돌 헝겊인형 따위 내게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물건들을 넣어 간수했다. 일종의 사물함이었다. 살아가는 환경 자체가 아무것도 감추거나 숨길 수 없는 헐벗은 구조였기에 비밀에 대한 갈망은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방을 함께 쓰는 형제들이 몰래 그 안을 뒤지거나 물건들을 빼가기도 하여 자주 싸움이 벌어졌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내 궤짝책상에 숨겨둔 일기장을 훔쳐보고 놀리는 오빠와 싸우고 둘 다 어머니로부터 호된 회초리질을 당한 다음 날 아버지는 두 개의 앉은뱅이 책상을 들여오셨다. 잉크자국이 배어 있고 흠집이 나 있는 그 책상은 새것은 아니었지만 두개의 서랍까지 달려 있어 이제야 비로소 나만의 것으로 채워진 자기의 세계, 비밀을 갖게 된 것 같았다. 꿈속에서도 뛰놀고 성장하는 아이들은 밤새 온방을 헤매며 잠을 잔다. 한밤중 오줌이 마려워 잠을 깨면서 좁고 어두운 상자 속에 머리가 꽉 낀 듯한 느낌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일이 생겼다.
험한 잠버릇 때문에 그처럼 책상 밑으로 머리가 들어가면 꼭 악몽을 꾸었다.
사춘기 시절, 나는 학교 공부를 젖혀놓고 그 앉은뱅이 책상에서 소설책을 읽고 일기나 감상적 단상 따위 글을 썼다. 책 한 권 공책 한 권 펼치기에도 빠듯한 넓이의 앉은뱅이 책상이 좁고 답답하게 느껴지던 것, 책상이 교과서나 참고서를 펴놓고 예복습을 하거나 숙제를 하는 평범한 실용적인 용도를 넘어 보다 정신적, 문화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아마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면서부터 외국 소설책들을 읽을 때면 집필 중인 저자모습 사진에 보이는 책상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나는 크고 튼튼하고 아름다운 책상을 갖고 싶었다. 그러한 책상에서라면 그만큼 가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내 집을 갖게 되면 벽의 한 면을 책상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서랍달린 책상이 비밀을 지키기 위한 꿈이었다면 이때의 책상은 오직 창작을 위한 것이었다. 하긴 비밀과 창작에의 욕망은 그리 먼 거리의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대학 다닐 때는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들여온 철제 책상을 썼는데 끝내 정을 들이지 못했다. 사무용 책상으로 좁았을 뿐더러 차가운 철제 감촉에 심한 거부감이 일었고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삑삑대는 금속성의 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누구의 청춘인들 버겁고 혼란스럽지 않을까만 대학 2학년이던 1967년은 내게 특히 힘든 해였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선생들께 배우면 되었지 뭐가 더 필요한가 하는 마음으로 앞뒤 잴 것 없이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진학했으나 한 학년이 지나면서 스스로 ‘재능 없음’ 의 결론을 내렸다. 뭔가 인생의 진로를 달리 잡아야 할 것 같은 초조감에 빠져 있던 나는 작가로서의 재능과 자질을 시험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여기며 신춘문예에 응모해보기로 하였다. 전국에서 단 하나뿐인 문예창작과라는 곳에 입시원서를 내던 때의 오기도 발동했을 것이다.
마감일을 한 달 앞두고 나는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예의 철제 책상 앞에 앉았다. 역시 책상테두리 굽이 손목에 걸리고 차가운 감촉에 진저리가 쳐졌다. 초고를 잡아가면서도 순전히 사무용품으로서의 실용성만을 강조한 그 책상에서는 작은 사무실의 경리사원이 된 것 같은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결국 밥상을 들여놓고 소설을 쓰면서, 당선은 무망한 일이라고, 그저 문창과 학생으로서 한번 해보는 짓이라고 짐짓 무심한 척 했지만,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당선이 된다면 한 학기 등록금 마련으로 부모의 짐을 덜어드리기보다는 우선 크고 튼튼한 책상을 장만하리라 마음먹었다.
운이 좋게도 당선을 했고 나는 상금을 헐어 드디어 꿈의 책상을 마련했다. 가로 120센티, 세로 70센티의 크기로 60,70년대 가구 산업의 수준을 보여주는, 어느 정도 조악하기도 한 물건이지만 당시의 내게는 앞으로 내가 이루어낼 수 있는 모든 것, 성취와 열망을 보장하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고결하고 고독한 작가로서의 운명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작은방에 그 책상을 들여놓던 날 밤 나는 가족들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려 나만의 촛불의식으로 나름의 각오와 포부를 다지는 의식을 치렀다.
그 책상에서 나는 1968년 등단 이후의 거의 모든 글을 썼고, 무디고 더딘 글쓰기로 인생의 어려운 고비들을, 내면의 격랑들을 넘어갔다. 그래서 나는 그 책상 앞에 앉아 보낸 시간들을 삶이라고 하고 문학이라고도 한다. 책상은 치열한 전투장이기도 하고 세상으로부터의 피난처, 권태롭고 지루한 일상사에서의 탈출이 가능한 소도(蘇塗)가 되어주기도 했다. 또한 오랜 세월, 맹목의 열정으로 치솟아 오르는가 하면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을 반복하는 조울증의 문청일 뿐인 나를 보았고 글쓰기가 진행되지 않을 때 더 이상 진화나 성장없이 사물화 되어 버렸다는 자괴감과 슬픔에 시달리는 나를 보아왔다. 글을 쓸 때의 온갖 비대발괄과 지리멸렬, 기고만장을 보았고 한숨과 우울과 그 많은 몽상과 가슴 뜀을 보고 들었다. 나는 때때로 마음이 가닿을 곳 없이 허허로워질 때, 혹은 살아 있고 살아가고 있다는 일이 참으로 이상하고 신비스러워질 때 오랜 세월 함께 한 그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손바닥으로 엷게 깔린 먼지를 닦아내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 책상이, 내가 앉은 이 자리가 이제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삶의 적막감과 고독, 두려움에서의 의지처가 될 것임을 아는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