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글 이상길_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1968년생
공저 『문화와 계급』 『현대사회와 매스커뮤니케이션』 등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_프랑스의 사회학자·철학자, 1930~2002년
저서 『구별짓기』 『언어와 상징권력』 『재생산』 『예술의 규칙』 『중간예술』 『실천이성』 『호모 아카데미쿠스』 『파스칼적 명상』 『텔레비전에 대하여』 『맞불』『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등
피에르 부르디외와의 가상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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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낸 이메일을 받고 나는 놀랐다. 죽은 지 이미 십여 년이나 지난 내가 살아있는 당신의 인터뷰 요청을 받게 되어 놀란 것은 아니다.
이 무한정한 글쓰기의 공간에서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난 그저 당신이 어렵게 보낸 질문이 단 하나여서 놀랐을 따름이다. 메일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부르디외 당신은 작가(écrivain)였는가?” 그 문장은, 읽는 순간 곧바로, 내 눈에, 깨진 거울 파편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것은 결코 좋은 질문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묘하게 날 자극하는 질문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지금처럼, 잊어버린 내 얼굴이 흐릿하게 비치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당신의 이메일에 답신을 쓰고 있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짧은 질문은 내가 『자기분석에 대한 초고』를 쓰고 있었을 때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당시 내 몸속에선 암 덩어리가 커가고 있었고, 항암치료는 의연히 견뎌내기엔 너무도 버거웠다. 하루에 채 한 페이지를 쓰기도 힘든 나날이었다. 집필실 창밖으로 보이던 늦가을의 플라타너스 이파리들 마냥, 내 남은 날들도 누렇게 바래가고 있었다. 난 가끔 디디에 에리봉(Didier Eribon)에게 전화를 했다. 평소에 책을 쓸 때면 난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원고를 미리 보여주고 의견을 구하곤 했다.
철학자 푸코의 전기를 썼던 에리봉도 그런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전직 언론인답게 내가 마지막 책을 쓸 무렵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기록해 자기 블로그에 올려놓았다.
그가 포스팅한 내용을 보니, 우리가 서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 “그 자서전을 최대한 멀리 밀어 붙이시길 바랍니다.” - “그렇게는 못하겠어… 나는 차마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어… 내 동료들이 뭐라고 하겠어… 당신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을지 잘 알잖아… 난 작가가 아니야… 난 장 주네(Jean Genet)가 아니야.” - “그렇게 되세요… 당신은 하이데거에 관해 말할 때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가 되지 못했다고 못내 애석해 했잖아요. 주네가 돼서 당신에 관해 말하세요.” 에리봉은 또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도 적어 놓았다. - “사실상 당신의 모든 저작은 당신 자신에 대한 사회학이자 인류학으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어떤 면에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사회학과 인류학을 한 것뿐인지도 모르지.”
내가 정말 이런 말들을 했던가.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당시 너무 큰 육체적 고통으로 기억이 새 하얘질 만큼 정신이 짓눌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블로그에서 에리봉은 내가 결국 작가라고, 내 책들은 근본적으로 사회학의 외피를 두른 자기성찰의 글쓰기였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그는 푸코가 언젠가 그랬듯이, 사회학자 부르디외도 자신의 저작에 대해 “자서전의 단편들”이라고 고백해주길 바랐던 듯싶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으며, 그럴 수도 없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푸코의 말도 자기 책들의 기원과 의미를 송두리째 그 자신에게로 되돌릴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누구의 저작이든, 모두 한데 모아 맞추면 마침내 저자 개인의 자전적 형상이 떠오르는, 흩어진 퍼즐조각들일 수는 없다. 물론 어떤 책이라도 당연히 저자로부터 나오며 그의 일부를 담는다. 하지만 그 사실이 우리가 그 저작의 내용을 삶이든, 관점이든, 경험이든 저자의 어딘가로 온전히 환원시킬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저작의 소실점으로서의 저자’라는 관념은 내가 — 푸코도 그랬지만 — 생전에 끈질기게 반대했던 것이기도 하다. 저작은 언제나 저자를 품고 있지만, 저자는 결코 저작을 완전히 품지 못한다.
일단 이 전제를 당신이 수용한다면, 난 이제 내 저작이 어떤 개인적인 선호라든지 거부감, 혹은 트라우마에 깊숙이 연결되어있다는 점을 시인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심리적 동력이 내 책들의 가장 중요하거나 흥미로운 부분은 아닐지라도,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그것을 드러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난 간혹 이러한 인터뷰 기회들을 빌려서나 내 글쓰기의 정서적 이면에 관해 슬쩍 털어놓곤 했다. 혐오감, 질투, 수치심, 연민, 원한, 분노 같은 복잡한 감정들 말이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난 1930년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산맥 산기슭의 당겡에서 태어나 자란 시골촌놈이다. 내 할아버지는 농부, 아버지는 우체국 말단 직원이었다. 뛰어난 학교 성적 덕분에 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면서 파리의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매년 전국의 수재들만 수십 명 선발하는 고등사범학교(ENS) 문과에까지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촌놈이 엘리트 학교의 분위기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등사범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파리 상류층 가정 출신이었다. 그 친구들은 말투, 옷차림, 몸짓, 식성, 취미, 인맥 등 모든면에서 나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어있는 그들의 자연스럽게 고상하고 편안하게 우아한 태도. 그들 앞에서 말하거나 행동할 때면, 난 어쩐지 부끄러웠고 괜스레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들을 동경하는 동시에 혐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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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운데 특히 똑똑한 친구들은 철학자가 되기를 꿈꿨다. 우리 관점에서 지식인이 최고의 사회집단이라면, 철학자는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1950년대의 이 다분히 ‘수재다운’ 이상에는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라는 이름의, 완벽한 모델이 있었다. 인간 존재의 보편적 문제들을 고민하면서도 현실정치의 각종 현안에 거침없이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철학자. 난해한 철학서뿐만 아니라, 심오한 소설, 희곡, 비평까지도 쉼 없이 써낼 수 있는 철학자. 사르트르의 책들은 정말 굉장했지만, 나는 그를 근본적으로 좋아할 수 없었다. 생계 걱정이라곤 조금도 없이 카페에 앉아 고담준론을 일삼는 전형적인 파리 부르주아 지식인. 그는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에 무슨 대단한 죄의식이라도 갖는 양 말하기도 했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것은 반성도, 자기비판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성찰할 줄 아는’ 자신을 한 번 더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수사학이었을 뿐.
사르트르나 그와 비슷한 부류의 철학자들이 지식인으로서 자기존재를 불편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식인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불편해한 적은 없었다. 촌구석의 가난한 집안 출신인 탓이었는지, 나는 그와 달랐다. 난 파리의 지식사회 안에 있다는 사실이 늘 불편했고 불안했으며 불만스러웠다.
주위의 철학자들, 또는 철학자 지망생들에 대한 내 감정도 점차 실망과 경멸로 변해갔다. 재능으로는사르트르에 턱도 없이 못 미치는 그들은 심지어 진지해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마르크스주의자나 공산당원을 자처할 때조차 그러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더욱 의심스러웠다. 인민을 위한다고? 노동계급을 대변한다고? 그들이? 왜? 어떻게? 무슨 권리로? 그들이 인민에 대해, 노동계급에 대해 무얼 아는가?
나는 그들의 말이 간혹 철없게, 때로는 공허하게, 그리고 대개는 위선적으로 들렸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지적 경쟁의 선두에서 명성을 떨치고 싶어 했을 따름이다. 마치 부유층 사모님들이 이브 생 로랑을 입고 샤넬 백을 들고 스스로를 뽐내듯, 이 ‘캐비어 좌파들’은 사르트르를 걸치고 마르크스를 노래하며 우쭐댔다. 그들은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인정욕구를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정치적 신념쯤은 언제든지 새 것으로 갈아치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점점 더 역겹게 느껴지면서, 나는 애당초 품었던 철학자의 꿈으로부터 더욱 멀어져갔다.
고등사범학교 졸업 이후 난 한창 프랑스와 독립전쟁 중이던 알제리로 군복무를 위해 떠났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내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겨주었다. 120년 이상 이어진 프랑스의 식민통치 아래서 알제리 사회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로의 난폭한 이행 과정을 밟고 있었다. 기층 민중은 지배자들의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삶을 꾸려가야 했다. 난 그 사회를 더 알고 싶었고, 정확히 이해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정치적 책임이자 윤리적 의무처럼 느껴졌다. 알제리 독립을 반대하는 프랑스의 보수적 정치엘리트는 물론이거니와, 알제리의 현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실현 가능성도 없는 정치적 탄원만 일삼는 일부 ‘양심적’ 지식인들 또한 볼썽사납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군복무를 마친 뒤에도 알제 대학에 적을 두고서 알제리 사회의 이농민, 도시빈민, 소수민족 등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연구를 수행했다. 어느새 난 공허한 추상과 관념의 천상계에서 내려와 현실 세계에 두 발을 딛고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문제를 경험적으로 탐구하는 사회학자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에 돌아온 뒤, 나는 알제리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사회를 연구했고 과학적 지식을 구축하려 애썼다. 수집한 경험 자료들을 분석하기 위해 끈기 있게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내공 없는 철학자들과 에세이스트들의 어릿광대 같은 모습이 종종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들은 ‘현실’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인식 없이, 허황된 거대이론을 떠들어대거나 겉멋 든 정치 구호만 부르짖었다. 쇤베르크, 아니 존 케이지였던가? 다른 음악가들이 시시한 곡을 쓰지 못하게 만들려고 음악을 한다고 말했던 이가? 나 역시 다른 지식인들이 사회세계에 대해 허튼 소리를 지껄일 수 없게 만들기 위해 글을 썼다. 허튼 소리들은 언제나 차고 넘쳤다. 그러니 나 또한 할 말이 많았다.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분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분노의 표출 수단이 바로 글쓰기였다. 40여년의 학자 생활동안 난 40권 이상의 책을 썼고, 삼백 여 편의 논문을 썼다.
내 연구의 일차적인 목표는 사람들이 사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릇된 신화를 깨는 데 있었다.
예를 들면, 1960년대 프랑스인들은 능력과 의향만 있다면 누구나 공교육을 받고 미술관에 갈 수 있는 사회가 도래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왜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잣집 아이들에 비해 고등교육 진학률이 낮을까? 왜 하층계급은 상층계급에 비해 미술관에 가는 비율이 훨씬 떨어질까? 내 연구 질문은, 이를테면, 그런 것들이었다. 사람들의 통념처럼, 구조적인 기회가 평등하다면, 유력하게 남는 변인은 개인적인 능력 차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집 아이들이 원래 지적 재능이 부족하기 때문에, 또 하층계급이 본래 예술적 적성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회적 차이가 나타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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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원’을 불평등하게 배분받는다는 점을 간파했다. 언어능력, 생활습관, 학습태도, 세상에 대한 신뢰, 미래에 대한 기대처럼 아주 근본적인 어떤 성향들. 우리가 가족 내의 사회화 과정에서 습득하는 이 후천적 습성들은 학업 성적이나 예술 감식안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역량들의 토대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일종의 사회적 사이클이 생겨난다. 어떤 계급 환경에서 교육받고 성장했는지에 따라 사람들의 기본적인 ‘성향체계’가 집단적으로 달라진다. 이처럼 계급적으로 상이해진 성향체계는 다시 상이한 사회적 성취로 이어진다. 상류층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상류층의 성향체계가 성공에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상류층의 아이들은 다시 상류층이 되고, 하류층의 아이들은 다시 하류층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기본적인 성향체계의 차이를 낳는 문화적 불평등의 상속은 우리들의 시야에서 감춰져 있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불평등이 계급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를 거듭 강화한다. 그 메커니즘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한, 우리는 그것을 개선할 최소한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을 것이기에.
하층계급의 사람들은 그들이 겪는 불행이나 불평등을 흔히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자기가 무능해서, 재주가 모자라서 혹은 운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구조에 책임을 지울 부분은 없을까? 내 방대한 저작은 개인이 쉽게 어쩔 수 없는 사회법칙들이 있으며, 그것들이야말로 경제적·문화적 불평등의 주된 원천이라는 점을 폭로한다. 그러한 불평등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면, 그것은 피지배자들이 그 불평등을 ‘당연한 것’,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피지배자들은 ‘두 번 죽는다.’ 그들은 외적이고 객관적인 불평등(낮은 학업 성적과 빈곤한 문화생활)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가해지는 상징적인 차별(공부 못하고 교양 없다는 평가와 낙인)을 감내한다. 이는 다시 그들을, 언제 풀려날 수 있을지 모르는 속박의 굴레 안에 몰아넣는다.
난 핍박 받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사회과학 지식의 세례를 주고 싶었다. 사회 진보의 출발점은 그들이 지배의 부조리한 현실을 깨닫는 데 있다는 것이 사회학자로서 내 굳건한 신념이었다. 내가 특히 교육과 문화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지배 현상에 예민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학창시절을 거치며 지식인 친구들로부터 입은 내면의 ‘계급적 상처’가 내 작업 동기의 맨 밑자리에 숨겨져 있었을까? 어쨌거나 내 어떤 지적·정치적 선택들이 동료 지식인들에 대한 강한 반감에 의해 영향 받았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1960년대 프랑스 지식인들이 니체, 사드, 블랑쇼, 바타이유를 인용하며 ‘위반’과 ‘횡단’을 설파하고 ‘멋들어진’ 급진주의를 추구할 때, 난 사회법칙의 수학 공식을 세우고 각종 통계표로 책을 채웠다. 1970년대 너도 나도 프로이트와 라캉, ‘욕망’과 ‘리비도’를 떠들어대고 있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난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기피했다. 마르크스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정신분석학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지적 유행이 한물 가고 난 뒤부터였다. 무엇보다도 난 내 세대의 철학자들—푸코, 데리다, 들뢰즈, 바르트, 료타르, 보드리야르 등—이 다양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방식으로 지적 권위를 확보하는 게임을 벌일 때, 스스로를 그저 ‘사회학자’로 자리매김 했다.
대신 난 전형적인 사회학 책과는 다른 책을 쓰고자 했다. 사회학자가 ‘말하는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객관화하고 성찰하는 책, 그리하여 자신의 말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통제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책. 나아가 말을 빼앗긴 사람들—하층계급, 주변인, 이방인, 소수자 등—에게 그들의 말을 되돌려주는 책. 나는 어렵고 복잡한 사회학적 진실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여러 겹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사회과학의 성과를 일반인들에게 정확하면서도 흥미롭게 전달하려는 목적에서였다. 1975년 내가 창간한 학술지 《사회과학에서의 연구행위》가 대표적인 예다. 사실 그것은 당시 인기 있었던 만화 ‘팬진’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학술논문들 안에 연구 내용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사진, 도표, 그림, 인용문, 신문잡지 기사 등을 모자이크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한 시도는 이후 내 저작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구별짓기』나 『세상의 비참』 같은 내 책들을 주의 깊게 본 사람이라면, 구성이나 형식 상에 일종의 ‘예술적인’ 하위텍스트가 깔려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말년에 펴낸 작고 예쁜 문고본들 또한 체재와 디자인을 통해서도 독자들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제 슬슬 인터뷰의 답변을 마무리할 때가 온것 같다. 나는 과연 사회학자이기 이전에 작가였던가? 사실 이것이 좋은 질문인지 나는 모르겠다.
답변자의 관점에 따라, 또 ‘작가’라는 단어의 함의에 따라 그 답은 천차만별일 터이다. 어떤 이는 내 연구의 ‘과학성’을 부정하기 위해 내가 ‘단순히’ 작가였다고 말할 것이다. 또 다른 이는 내 작업의 개인사적 동기를 부각시키기 위해 내가 ‘실은’작가였을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글 쓰는 사람’을 통칭하는 평범한 의미에서, 나 또한 ‘결국’ 작가가 아니었는지 반문할 이도 있을 법하다. 나로서 그나마 공감할 수 있는 작가의 정의는, 역설적이지만, 사르트르가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18세기의 작가들은 글쓰기를 통해 “자기의 성장환경과 계급에서, 아니 모든 환경과 계급에서 벗어나고, 역사적 상황을 반성적, 비판적으로 인식한다는 단 한 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그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글쓰기는 “매순간마다 인간이 역사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움직임, 한마디로 자유의 행사”나 다름없었다. 어떤가? 당신이 보기에, 나는 작가였는가? 만일 그렇다면, 나는 어떤 작가였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