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글 윤후명_소설가, 문학비단길 고문, 국민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겸임교수. 1946년생
시집 『명궁』, 소설 『돈황의 사랑』 『부활하는 새』 『모든 별들은 음악 소리를 낸다』 『원숭이는 없다』 『협궤열차』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가장 멀리 있는 나』 『새의 말을 듣다』 『꽃의 말을 듣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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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라고 말하니 그건 ‘달빛에 바래면 신화가 된다’고 하는 서열에 드는 느낌이다. 신화의 멕기로 덧씌워지기 전에 그 달빛 아래로 나아가면 바로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풍경이 펼쳐진다. 우선 워커라는 이름의 군화를 신고, 파커라는 이름의 군용 점퍼를 입고 등교하던 대학생들이 있다. 나도 종종 그랬다.
그 60년대의 후반이 나의 대학 시절이었다. 나는 내가 다니던 학교보다는 문학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서라벌예대 부근을 근거로 생활을 이어갔다. 그 무렵 친했던 M이 그 학교의 학생회장이 되어 학생회실에서 잔다고 했을 때, 그 옆에 껴 붙어 긴 의자를 침대삼아 한동안 잠자리를 해결한 적도 있었다. 그저 어디든지 쓰러져 자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래서 그곳 문학도들과 그룹 사진도 찍곤 한 것이 졸업앨범에 우연히 실려, 나중에 나를 졸업생으로 아는 사람이 꽤 있었다. 나는 M을 따라 그의 원주집도 방문하면서 가까이 지냈다. 그가 나에게 유종호 선생의 『비순수의 선언』도 읽게 해주었고, 시인 구자운 선생도 만나게 해준 일이 웬일인지 특별히 기억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여러 해 전에 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언젠가 그를 만나 나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계획을 들려주며 둘이서 밤새워 술을 마시고 어느 여관에 들었는데, 아침에 간신히 눈을 떠보니 그는 없고 ‘잘 되기를 빈다’는 쪽지만 남아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60년대는 4·19와 5·16에 이어지는 ‘혁명’으로 문을 열었다. 5·16이라는 ‘성공한 쿠데타’는 내게까지 영향을 미쳐서 나는 ‘혁검검찰관’이 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 놓인 나는 글쓰기라는 행위를 발견하여 빠져들기 시작했고 곧 고등학교에 입학함과 함께 시인으로 일생을 살겠다는 염원을 세우게 되었다. 시는 나의 은신처였다. 그곳에서 나는 꿈꾸며 시를 썼다. 학교 공부는 뒷전에 돌린 내가 무엇을 하는지 집안에서는 알지를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은신처에서의 꿈과 글공부로 나를 일으켜 세우고 평생 그 힘으로 살리라 기도하고 믿었다.
1
지금 침몰하는 계절을 하나 가득히 담은 낙엽이/목 터지게 아우성치는 이 텅빈 광장에,/해는 마지막 체온을 발산하는/뭔가 허전한 한낮.//산란기를 기다리는 심해어처럼/나의 손은 끝없이 떨며빛을 찾고 있다.//언제부터인가/하얗게 표백된 내 손바닥은/바람과 함께 눈을 뜬 하늘같이 투명하게 가슴의 문을 열고 있다.//일몰의 파열하는 햇볕 옆에서/마음의 구김살을 활활 펴고/창백한 표피를 바라보면,/그 공허한 순간/나의 손은 나로부터 외면된 불쌍한 서자처럼 느껴진다.
2
미풍이 일 때마다/화안히 트여가는 길을 아는가?/손은 꽃이 시드는 발효로 하여 오늘 말이 없다.//온손을 뻗쳐 무성한 미래를 여는/한 그루 나무처럼/나의 손은 무엇인가 비밀히 기다리고 있다.
3
하늘 안 외길로 행적이 닿는/나무의 손 같은 나의 보람,/내 안에서 왁짜히 넘치는 생명의 소리를/손은 조용히 쓰다듬고 있다.//모든 새 아침마다 태양은 새로이 눈을 뜨듯이/언제나 새로운 식욕으로 하여/손은 깊숙한 음지 속/혈액은 바람을 타고 연하게 발효하는 향내처럼/그리하여 손은 찬란한 내일의 기도(企圖)를 화알짝 편다.
어디선가 어렵게 찾아낸 이 시는 1963년 고등학교 2학년때 성균관대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뽑힌 「손」이라는 작품이다. ‘한 그루 나무처럼 나의 손은 무엇인가 비밀히 기다리’게 되었으니 나의 은신은 더욱 공고히 되었고 그것이 벌써 50년 넘은 일이다. 백일장 장원은 내게 시인이 되어 사는 길이야말로 ‘찬란한 내일의 기도를 화알짝 편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해주었다. 그러면서 세상에 노출될수록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지혜를 배웠는데, 역사적으로도 해방구란 더욱 깊이 숨어 자신을 닦는 일을 요구한다는 교훈이 겹친다.
‘의거’와 ‘혁명’으로 어지럽게 막을 연 60년대지만 내게 가장 고통을 준 것은 부친이 뜻밖에 감옥으로 감으로써 닥친 경제적 압박이었다. 나는 버스표 한 장으로 등교하여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학교 신문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시를 투고하여 원고료를 받아쓰기도 했다. 쥐꼬리만 하다 해도 요긴하게 쓰인 돈이었다. 그로부터 ‘쥐꼬리만 한’ 원고료는 나중까지 내가 소설가가 된 뒤에도 전업작가로 굽히지 않고 일어서는데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다. 내일 끼니가 막막한 어느 날마다 어디선가 ‘쥐꼬리’가 나타난 경험이 그 몇 번이었는지!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되지 않는 시절의 ‘보릿고개’를 넘으며 60년대는 늘 엥겔계수로 표시되던 시대였다. 다들 그러했기에 사회적 갈등도 그만큼 단순했을 것이다. 먹고 살기 어려워 시골에서 올라온 학교 앞 막걸리집 시골소녀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신촌 ‘문학다방 봄봄’에 갈 기회가 있으면 잘 알 수 없는 벽화들이 그려진 굴다리를 지난다. 예전에는 없던 예술이다.
굴다리의 예술을 거치면 즐비하던 옛 ‘하꼬방’들이 망막에 세워진다. 현대 예술의 마술 같기도 하다. 거기에 내 책을 빼앗아 들고 안으로 들어가 웃음을 띠고 내게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소녀들이 나타난다. 그 소녀들이야말로 대학생인 나를 우러러본다. 다음 날 술값 없이 쭈볏쭈볏 그곳을 찾아간 나에게 소녀는 수줍게 『존재와 무』를 그냥 꺼내준다.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 실존은 굶주림 앞에서야 ‘무’를 얻는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기 이전에 가난을 건너야 한다. 보리밭에는 보리 깜부기, 수수밭에는 수수깜부기가 돋아난다. “이걸 먹고 산골로 가자. 우리는 산골로 가서 마가리에 살자.”
나는 그걸 꺾어 소녀에게 먹거리로 준다. 나 또한 소녀의 모습이다. 참여와 순수가 아직 밀집대형을 이루기 전, 60년대!
1967년에 신춘문예에 당선함으로써 나는 시인이 되었다. 어린 나이였다. 시 공부의 선생님들인 청록파의 시인들, 서정주, 김춘수, 김수영, 박남수 등등 모두들 계셨던 시절이었다. 선생님들을 직접 뵙고 이야기하며 지난 시절은 행복한 순간으로 추억을 남겼다. 그러나 그 벽의 철옹성을 보는 순간은 절망이기도 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덜컥 시인이 되었기에 나는 내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내 언어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시 안에서만 존재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괴롭게 오리무중을 헤맸다. 내가 깃대를 세울 시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예맥의 땅, 내 고향 산골로 소녀를 데리고 간다. 그리하여 「고산가(高山歌)」들을 짓는다. 얼마 전 러시아 과학자들이 3만 년 전의 패랭이꽃 씨앗을 싹 틔웠다듯 ‘3만 년 동안의 사랑’을 말해야 하리라.
‘칠십년대’ 시 동인은 69년에 첫 동인지를 내놓았다.
나는 내 언어로 새로이 시단에 얼굴을 씻고 나와야 했다. 나의 60년대는 새로운 시작이어야 했으며, 이로써 모습을 나타냈다. 모든 모색은 ‘무’에서 시작한다. 태초의 한 씨앗은 ‘현묘(玄妙)’여서 그것을 얻어 싹틔우는게 일이었다.
이 거먕빛 사랑의 바닥
아무도 갈 수 없도다
시 「사랑의 바닥」의 한 구절에 나는 썼다. ‘거먕빛’은 ‘아주 짙은 검붉은 빛’을 말했다. 이 단심(丹心)이 나의 시작이었다. ‘아무도 갈 수 없’는 사랑의 출발점을 나의 영토로 삼아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었다. 곧 무서운 시절, 유신의 이름으로 닥쳐올 70년대를 나는 나 혼자 가야 하는 고행으로 받아들일 태세를 다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