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우산을 꽃이라 불러보는 오후
글 윤향기_ 경기대학교 대우교수. 1953년생
시집 『피어라, 플라멘코!』 『엄나무 명상법』 『굴참나무 숲과 딱따구리』, 수필집 『차 한잔 하실래요』, 학술서 『에로티시즘 시 심리학에 말 걸다』 등
두 번째 2
우산은 오래된 울음이다. 보슬비나 미풍에 대해서는 순하디 순하지만 우레 치는 세상을 향해서는 온 몸으로 막아서는 보디가드다. 삶으로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사용할 수 없는 약속시간, 구름의 농담, 첫 데이트의 마스코트다. 아니다 스스로 달래고 보살펴온 신생의 꽃송이다. 이렇게 세상에는 젖기 위해 태어나는 꽃도 있다.
사상 유례 없는 더위다. 폭염을 식혀주려는 듯 엊그제는 강풍을 동반한 비가 요란하게 내렸다. 바람까지 동반한 비가 많이 내다 보니 길 여기저기 부러진 우산이 나뒹군다. 아침 출근길에 접는 우산을 갖고 나갔다가 살이 하나 구부러지는 바람에 제대로 비를 피할 수가 없었다. 부피가 있더라도 큰 우산을 들고 나올걸 후회하는 순간 이미 스커트는 다 젖고 말았다.
오늘처럼 우산이 고장 날 때마다 내 삶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큰머슴 생각이 난다.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쏟아진다. 등교시간에 맞춰 여름 정수리를 내리친다. 꽃무늬 알록달록한 포프린 책보를 맨 소녀가 방에서 나온다. 마루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는다.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큰 머슴이 다가와 물어볼 것도 없이 덥석 등에 업는다.
“가입시다.”
“얘야, 슈룹(우산의 고어) 여기 있다. 슈룹 꼭 잡고 가거라.”
학년 딸아이를 염려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사이로 섬광처럼 우레가 지나간다. 얼마를 걸었을까. 진논샘을 지나고 도깨비툼벙을 지나고 밀밭 길을 지나자 무한천 시내가 나타난다. 집에서 시내까지 걸어오는 사이 빗물은 불어 평소에 물위로 걸어 다니던 돌다리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있긴 있었느냐는 듯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큰 머슴은 검정고무신을 서둘러 물가에 벗어놓고 바지가 젖는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난 급류처럼 몰려오는 황토물속으로 당당하게 몸을 맡긴다. 겁도 없이 소녀를 한 번 더 추켜올려 꼭 다잡아 업고 건너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이 뚫렸는지 비가 그치질 않는다. 어느새 물색도 황토색으로 변해 으르렁으르렁 달려온다. 허리 구부려 논과 밭에 마음을 심던 그의 등에서는 시큼한 땀 냄새가 물큰 솟아오르고 땀내를 막아주는 종이슈룹에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에서는 아주까리기름 냄새가 톡톡 튀어 올랐다. 정신없이 물을 건너던 큰머슴은 소녀에게 더욱 자신의 목을 꼭 잡으라 이른다. 소녀는 무서워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만 끄덕인다. 언제 다 건넜는지 맨발인 채로 성큼성큼 걸어 학교 옆 면사무소 길목에 이르자 천천히 소녀를 내려놓으며 그는 말한다.
“아기씨! 올 때 꼭 슈룹 챙겨 나오시소. 지 그때 다시 오꾸마요.”
나는 아직 고향에 가지 못한다. 고향에 두고 온 나를 찾아가지 못한다. 아직도 나를 기다리는 그 큰 머슴에게 슈룹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없어 나는 아직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있다.
모퉁이 찻집에 앉아 몸을 녹이다 잠시 졸았나보다. 횡단보도를 타고 흐르는 빗물 사이로 몰려가는 색색의 우산을 보고 있자니 큰머슴이 왔다 가고 다시 신기료 아저씨가 다가온다. 버려진 것들을 보물로 만들어주던 마법사아저씨!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고칠 우산을 찾아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고 있진 않을까? 와병으로 누워 있는 아내를 일으켜 죽 몇 술 뜨게 한 다음 손수레를 끌고 절룩절룩 폐지를 구걸하러 다니는 건 아닐까?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오늘(present)을 축복의 선물(present)로 생각하며 하루의 추억을 아름답게 수선할 줄 알던 아저씨.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본 적이 없는 얼굴로 조문하듯 신발과 가방과 우산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아저씨. 어쩜 아저씨는 자신의 조락을 다독여 온전히 비도 피하고 절망도 비켜가려고 우산 고치는 그 속도로 자신이 자신을 선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이제서야 그런 생각이 든다.
먹구름 사이로 아이들의 해맑은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 노란 우산 빨강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 길에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가는 우산 꽃들을 보며 지난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참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다고. 아, 모든 것이 바로 어제 일만 같다고. 새해에도 하늘에 무지개가 뜨면 아이처럼 좋아하고, 막걸리 한 잔에 지평선이 노을에 물들 듯 아저씨 얼굴에도 단풍 들었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