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운명, 미워하지 않는다
글 이경자_소설가. 1948년생
소설 『절반의 실패』 『살아남기』 『꼽추네 사랑』 『배반의 성』 『혼자 눈뜨는 아침』 『사랑과 상처』 『情은 늙지도 않아』 『천 개의 아침』 『계화』 『순이』 『세 번째 집』, 산문집 『반쪽 어깨에 내리는 비』 『남자를 묻는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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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격적 결함 때문에 피해를 보거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우선 나 자신이다. 그리고 나의 육친과 근친들. 어떤 이유로 나와의 접촉을 피할 수 없거나 피해지지 않는 관계였던 사람들. 그들 모두에게 불쾌감과 넌더리를 내게 했던, 나의 모든 언행들은 성격적 결함에서 온 건데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언저리에 ‘아버지’가 계신다. 물론 여기에선 언급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인연을 깍지 낀 ‘어머니’도 함께이시다. 두 분 때문에 내가 태어났으니.
여기까지, 이 문장들을 거침없이 썼다. 쓰고 나서 한숨 돌리고 다시 읽어보니 과연 그런가? 이런 의문이 든다. 어떤 삶이라거나, 혹은 남이 됐건 내가 됐건 생명의 근간을 파헤치는 일이 온당하지 않을 뿐더러 주제넘은 일이란 생각도 있다. 이것은 철이 드는가 싶을 때 우러난 생각이다. 어떤 생명이든 그 자체로 존엄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존엄성엔 무엇으로도 우열을 가릴 근거는 없다는 게 나의 ‘주의’이니까. 생명은 생명 그 자체로 이미 온전할 테니.
하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생명의 근간을 파헤치는 일을 하면서 밥을 먹고 산다. 더군다나 지금 이 글은 내 인생의 운명적 주재자이신 아버지를 분해하는 것이니 좀 곤혹스럽긴 하다. 아버지가 아무리 소설가 딸을 거짓말쟁이라고 놀리시며 즐거워하셨어도, 우선 죄송하단 말씀을 드린다.
내 나이 마흔 다섯이 넘었을 때, 어느 날부턴가 인생이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 불륜소설 써서 돈도 잘 벌고 사지 멀쩡하게 잘 놀던 때에 내 내면은 황량해졌던 것이다. 살려면 죽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12층의 사무실 창가에서 저 아래 시커먼 아스팔트 차도를 내려다보곤 했었다.
이러다가 내가 나 자신에게 처방전 하나를 썼다.
- 아버지 어머니의 인생을 이해하면 내 삶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
처방전을 책상 앞 벽에 붙였다.
이로부터 아버지 공부를 시작했다. 순전히 살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와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아버지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시절과 삶에 대한 추적이었다. 이즈음 아버지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나의 곁을 떠나 세상에는 안 계셨다.
아버지를 알기 위해선 아버지가 태어나고 성장하던 곳들을 돌아다녀야 했다. 고향 땅 양양으로, 가까운 사촌이 살고 있는 인제로, 그리고 서울의 여기저기로.
아버지와 혈연인 사람들로부터 들어본 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아버지였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나쁜 아버지’, 오직 이것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아버지를 공부하던 중에 한 가지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아들이란 남자는 반드시 왕가에 태어나야 왕자로 자라는 건 아니라는 게 추적의 어디쯤에서 알게 된 현상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공부를 시키지 않고 일만 해야 하는 농경시대의 둘째 아들, 그 맏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공부한 맏아들인 아버지의 큰아버지는 결혼을 열다섯 번이나 하도록 자식을 얻지 못했다. 결국 큰댁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자 처신을 면한 건 큰아버지의 열여섯 번째 아내로부터 아들이 태어난 뒤였다. 그 아들은 현재 조카인 나와 한 살 터울의 손위이신, 그러니까 나의 삼촌이시다.
공부도 잘 하고 인물도 훤칠한 맏아들, 그러니까 당신의 큰아버지로부터 절망한 아버지의 할머니는 당신 손자인 나의 아버지를 당신 제사상에 술잔 올릴 종손으로 여겨 아주 특별하게 키우셨다. 말로만 듣던 사랑방식, 그러니까 겨울이면 가슴에 신발을 넣었다가 내놓고 어떤 어려움에도 밥솥에 쌀을 안쳐서 퍼주는 그런 대우로부터 그 외의 모든 것까지.
시오리 먼 소학교에로 오가는 길이 힘겹다고 학교 옆에 방을 얻어 수발도 하셨다. 아버지가 당신의 생활에서 요구하는 것들은 입에서 튀어나오는 즉시 할머니를 통해 해결되었다. 그게 어떤 일들인지 일일이 다 쓸 순 없지만 하여튼 이렇게 자랐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로 돌아오면 충분히 상상이 된다. 아버지는 당신이 밥을 기다릴 때 즉각적으로 밥상이 들어와야 했다. 당신이 외출하려고 할 때 원하는 옷가지가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당신의 의견엔 옳고 그름을 따지면 안 되었다. 말이 곧 법이었다. 짐이 국가다, 이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긴 겨울밤, ‘속이 굽굽하다’고 중얼거리면 즉각적으로 어른 여자들이 부엌에 나가 인절미를 만들었다.
인절미를 만들던 건 눈에 선하다. 분주한 기미에 자다 깬 나도 인절미 조각을 달게 먹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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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감정에 따라 집안 분위기가 어둡다가 밝았다가 요동을 쳤다. 화를 잘 냈다. 아버지의 화가 불길처럼 자라나면 사람이건 사물이건 집이건 무엇을 태워버릴지 예측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고통 받는 며느리인 어머니께 그러셨단다. 당신의 아들은 비가 들이치면 처마 밑에서 당신의 신발만 챙길 사람이라고. 다른 신발이 젖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늘 전전긍긍이었다. 무서운 아버지는 당연히 싫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우린 숨을 죽여서 자기 존재를 감추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색깔로 보호막을 쳤다. 나는 책상앞에 앉아 공부하는 시늉을 했다. 소설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그걸 들키면 책이 몽땅 아궁이로 들어갔다.여기에 주인공으로 등장하시는 아버지는 나의 개인소유가 아니므로 형제보안법이 있어서 내가 일일이 다 폭로할 순 없다. 이건 소설이 아니니까. 하여간 어찌 되었건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유일신이며 날씨와 기후를 주재하는 우주의 섭리 같았다. 아버지가 우울하면 우리의 내면엔 폭풍우가 치고 아버지가 화를 내면 우린 해일의 기미를 예감하며 미리 죽었다. 물론 어쩌다 반대인 날들도 있었다.
그 반대의 날들에 가장 많이 노출 되었던 사람은 나, 맏딸이었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애인이 생겼을 때 그곳으로 데려가서 하염없는 비련의 정서를 익히게 한다거나, 감상에 젖었을 때 양양 남대천 둑방길을 걸으며 유행가를 부를 때 내 손을 잡고 있다거나, 은어 낚시를 할 때 하릴없이 그 옆에서 뙤약볕을 쬐고 있어야 하는 것 등.지금도 내가 흥얼거릴 수 있는 유행가는 모두 아버지로부터 들어 저절로 익힌 것들이다. 활기찬 노래보다 감상적이고 비탄에 젖은 가락들을 즐기는 것도 물론 아버지의 내력에서 얻어진 것이리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이런 말을 들어본 자식은 아마 나 혼자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다. 등이 가려우면 나를 불러 저 벌판 같은 등을 긁게 했고 다리가 아프면 나로 하여금 올라서서 마구 밟게 했다.
어머니가 나를 미워할 때 하는 말 중에 똑 부러지는 것 한 가지.
지 애비 닮아서 성질 머리가 나쁘다는 것.
서른 서너 살부터 『절반의 실패』를 구성할 때 나는 내가 잘못 교육되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딸이면서 의식이 아버지화 했다는 것.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 이 말을 들으면 가당치 않다고 할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나를 분석하면 그렇다. 여자이면서 의식이 남성화, 그것도 가부장화 되어서 내면의 여성성이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진정한 나를 억압하고 멸시한다는 것.
이런 왜곡된 내면을 가진 채 여자로 살아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마흔 다섯 즈음부터 시작한 아버지 공부로 나는 남존여비의 근원을 다룬 장편소설 『사랑과 상처』를 썼다. 그리고 내 왜곡의 내면, 그 뒤엉킨 실타래를 머리 빗기듯 빗길 수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인간적 연민 때문에 많이 울면서 해원(解寃)굿을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나를 미워할 때 내가 얼마나 속으로 으스댔으며, 한편 절망했었는지, 이런 나 자신을 이해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화해하지 못했던 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났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나이로부터 나는 너덧 해나 더 살았다.
아버지보다 더 살고 나서 이제 안다.
아버지가 성장하지 못한 남자였다는 것.
그러나 그것을 한 번도 직시하지 못했다는 것.
이제 다 이해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이 많았던 남자였다는 것도.
지금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은데 아버지는 내 곁에 안 계시다. 아버지의 슬픔과 고뇌와 절망이 오롯이 당신 탓만이 아니라는 것, 충분히 알았다. 비현실적인 생활방식으로 성장하게 된 당신의 성장기, 당신의 운명이다.
수십 년이 지난 이즈음에도 산에 가서 나뭇가지에 매달릴 때 아버지의 절체절명의 순간, 그 숨 막혔을 순간이 저절로 떠오르는 건…… 사는 동안 앞으로도 영영 벗을 수 없는 나의 운명일 것이다.
운명, 미워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