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발터 벤야민의몇 가지 장면에 관하여
“내가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해방구 학교 앞 막걸리집 산골소녀들은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드 콤플렉스 번쩍했던 순간들 환멸의 기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문학은 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가 시 부문 - 낭만적 과잉의 시쓰기 소설부문 - 삶과 역사에 대한 노작가의 견인주의 평론부문 - 문학 , 밀거래된 꿈을 유통시키는 최후의 통로 번역부문 - 유려한 문장으로 원작 재창조
뻐끔담배
글 서종택_소설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44년생
소설 『외출』 『백치의 여름』 『원무』, 저서 『한국 근대소설의 구조』 『한국 현대소설사론』 등
첫 번째 1
나는 담배를 조금 일찍 배웠다. 고등학교 졸업학년 때였을 것이다. 광주의 나의 하숙방은 문학 동아리 총각들 몇 명의 아지트이기도 했는데, 당시 우리가 뿜어댄 연기는 늘 방안에 가득 찼고 문을 열면 빨래줄처럼 빠져나가는 연기에 주인아주머니는 그때마다 혀를 찼다. 우리들은 시내의 서로 다른 학교에 다녔지만 시나 소설에 의기투합된 이른바 맹렬 문청들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학년만 같았지 나이는 두세 살이 많아 자신을 형이라고 부를 것을 강요하곤 했는데, 이미 골초가 되어 있었던 그가 우리에게 담배를 꼬나무는 법을 가르쳤다.
당시 나는 문제아는 아니었지만 결손 학생쯤으로 지낸 것 같다.
가슴은 늘 허기에 차 있었고 학교보다는 과외 활동에 합류했다.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그 근거 없는 건방 끼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우습고 재미있다.
당시 나에게 담배는 작은 음모였고 자만이었다. 가슴 속 깊이 빨아들이는 연기는 성년에 진입하는 나의 어설픈 자존이었는데, 담배를 피우면서 콜록대거나 연기를 목구멍 속으로 집어넣지 못하고 입안에서 우물거리는 놈들을 나는 비웃었다. 연기를 삼키는 대신 빨아대기만 하거나 입을 오므려 동그란 원을 만들어 허공에 내뿜기나 하면서 멋을 부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건 뻐끔담배다.”
나는 그들을 경멸했다. 남도의 바닷가 작은 읍내에서 중학을 마치고 도회지로 유학을 간, 4·19의 환희와 5·16의 절망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시절, 『광장』의 첫 줄에 흥분하고 잘 곳도 쉴곳도 없이 오지도 않을 『제8요일』을 기다리는 아그네시카를 안타까워했던 시절, 《학원》 대신에 《자유문학》이나 《현대문학》을 옆구리에 끼고 충장로 거리를 배회하거나 영화 두 편을 동시 상영하는 재개봉관을 전전하며 하루 네 편을 뚝딱 해치우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담배의 멋이 맛으로 변해 버린 대학 2학년 때 결핵 판정을 받았다. 나는 그것을 담배의 해독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았으므로 담배는 예전대로 더욱 깊이 빨아들였다. 각혈이 심하지도 않아 휴학하라는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도 않았다. 연말이면 돌림병처럼 찾아왔던 신춘문예에는 번번이 낙방했다. 대학은 나에게 문학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고 문학은 더 이상 약속의 땅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나는 여전히 문학에 열병을 앓았지만 등단이 늦추어지자 중독자의 자존심이 서서히 누추해지기 시작했다. 과의 친구들은 휘문이나 동두천상고 교사로 팔려갔고, 이쪽저쪽 눈치를 살피던 나는 이내 대학원에 들어갔다. 대학원은 그러므로 나의 결단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시간끌기의 어정쩡한 선택인 셈이었다.
대학원에 들어간 해에 반송된 엽서 같은 입선통지를 받고 등단 절차를 마쳤다. 그러나 나는 그때 논문에 각주를 달고 있었으며 문학 텍스트는 이미 거대한 하나의 인식의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하나의 작품이 인문적 관점과 사회적 자료에 의해 해부되고 분해되는 과정은 재미있었지만 공허감은 커지기만했다. 대학원 세미나에는 동서고금의 문사철 유령들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이 길게 줄을 섰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싸움은 승부 없이 계속되었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가 목청을 높이는 사이 라캉인지 새우깡인지가 새로운 손님으로 끼어들었다. 담배의 맛은 사라지고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콜록대는 기침소리와 허공에 동그라미를 쏘아 올리기 위해 빨아대는 뻐끔질이 계속되었다. 텍스트와 담론들이 제각각 따로 놀고 작가와 작품들은 이산가족처럼 분리되고 있었다. 이론을 무기로 만들고 체험을 특허로 만들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 나는 문학에의 중독과 그 해독에 시달렸던 것 같다. 창작과 비평은 이혼하지 못한 부부처럼 불편한 관계만을 계속했고, 삶의 부적절함을 해소하거나 질문하려던 나의 인문적 창의는 공소한 것이 되었다. 권태도 습관인가. 내가 경멸했던 친구들에게처럼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지껄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건 뻐끔담배야.
